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89
89. 보이는 라디오(2)
단언컨대 은찬이 데뷔 후 겪은 날들 중 제일 극악의 스케줄이었다. 회귀 전 칠월칠석과 지금 제네시스까지 포함한 모든 날들 중에서.
“은찬아, 안 피곤해? 괜찮아?”
“네, 형! 한가한 거보다는 훨씬 낫죠~”
“야야, 이거라도 마셔라.”
“감사합니다~”
앞좌석에서 매니저가 뚜껑 딴 비타민 음료를 건넸다. 은찬은 양손으로 음료를 받아 들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마침 피로했던 참이라 받아 든 비타민 음료를 단숨에 들이켰다. 이미 식어 미지근한 음료수였지만 기분 탓인지 속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나는 뭐 드릴 게 하나도 없냐.’
별이처럼 평소에 간식거리라도 들고 다녔으면 좋았을 텐데, 꼭 이럴 때 주머니가 비었다.
은찬은 빈 병을 만지작거리며 미안한 마음에 정면을 주시하는 매니저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형, 하루 종일 운전하시고 너무 고생하시는 거 아니에요? 다른 애들도 데려다주시고 또 오신 거잖아요.”
“야, 내 이름이 왜 진국이냐.”
운전대를 붙잡고 있던 매니저가 피식하고 웃더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은찬이 앞쪽의 백미러를 보자 자신만만한 표정의 매니저와 눈이 마주쳤다. 장난기가 발동 걸렸을 때마다 나오는 전형적인 표정이었다.
“성격마저 진국이라서 그런 거다. 네 걱정이나 해~”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어금니를 악물었다. 저거 농담 섞인 것도 아니고 진심으로 하시는 말 같은데.
“그, 그렇죠. 역시 형이 짱!”
그래도 매니저 형을 머쓱하게 만들 수는 없으니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그러자 매니저 형은 만족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래도 새벽부터 운전대를 잡으셨으니 피곤하실 법도 할 텐데.’
사실 오늘은 어떤 칭찬을 해줘도 모자라지 않지.
오늘은 새벽부터 다음 앨범 재킷 촬영이 있었다. 낮과 밤 버전으로 두 가지 컨셉 촬영을 한다기에 해가 뜨기 전부터 나설 수밖에 없었다.
앨범 안에 수록될 사진들을 촬영하고 이번에는 멤버들이 셀렉까지 참여했다. 최종 결정은 회사가 하겠지만 후보를 추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깊었다. 촬영 전부터 장장 12시간을 넘게 붙어 다녔으니 아무리 체력 좋은 매니저 형이라도 기력이 빠질 수밖에 없을 터였다. 멤버들마저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으니까.
‘게다가 멤버들 내려주고 내 라디오 스케줄마저 데려다주고 계시니…….’
심지어 평소라면 퇴근했을 시간일 텐데 해가 진 지금도 나를 방송국으로 데려다주느라 차를 모는 중이다. 일을 한 나도 나지만 매니저 형은 계속해서 운전대를 잡았으니까. 저게 얼마나 고된 일인지 알고 있다.
“라디오는 생방송 아니냐, 근데?”
“네. 맞아요. 우와… 긴장된다.”
“은찬아, 얼굴 좀 보자. 메이크업 수정하게.”
“아, 넵.”
방송국 근처에 도착했을 즈음, 뒤에 앉아 핸드폰 게임을 하던 스타일리스트가 몸을 앞쪽으로 빼며 은찬의 어깨를 톡톡 쳤다. 은찬 또한 곧장 얼굴을 빼 들고 얌전히 눈을 감았다.
오늘이 변승채 선배가 진행하는 라디오에 게스트로 출연하는 날이었다. 보이는 라디오인 데다 스틸컷이 방송 종료 후에 업로드되니 얼굴에도 확실히 신경을 써야 했다. 마찬가지로 퇴근을 못 한 스타일리스트 누나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솟았다.
‘라디오 대성공으로 보답하겠습니다… 형, 누나.’
현주인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며칠 동안 변승채 선배의 라디오를 청취해 보기도 했는데 딱히 요령이랄 게 없었다. 방송이라면 표정 연습이라도 할 텐데 라디오는 연습이랄 것도 딱히 필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자연스러운 모습이 제일 중요했으니까.
‘불안해해 봤자 뭐 해. 해내야지.’
해본 적 없는 분야라 긴장이 됐다. 역설적으로 한편으로는 설레기도 했고.
“잘하고 오겠습니다!”
“어엉~ 말실수만 하지 마~”
“은찬이는 그런 걱정 안 해도 돼.”
말실수만 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되뇌며 차 문을 열었다. 발걸음이 생각보다 가벼웠다.
라디오 방송국은 처음이었던지라 천천히 주변을 살피며 문을 열었다. 일찍 와서 대본을 보고 있었던 모양인지 변승채 선배는 헤드폰을 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은찬이 일부러 크게 소리 내어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뭐야. 왔어? 와줘서 고맙다!”
은찬의 활기찬 인사를 듣자마자 승채가 고개를 팍 쳐들었다. 그러고는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은찬을 격하게 반겼다. 은찬은 주변에 앉아 있는 스태프들에게 차례차례 인사를 건넨 뒤 승채 곁으로 가서 고개를 숙였다.
“선배가 불러주신 덕분에 이런 자리에 게스트로 앉아도 보고 저야말로 영광이죠. 감사합니다.”
“아하하! 은찬 씨 사회생활 잘하네~ 그렇죠, 작가님?”
“진심이에요~”
“으하학, 역시 마음에 든다니까. 이리 와서 얼른 앉아. 곧 온에어다.”
승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의자를 빼주었는데, 은찬이 괜찮다며 허리를 숙여도 얼른 앉으라며 능글맞게 성화를 부렸다. 은찬이 머쓱하게 웃으며 안내받은 자리에 앉자 책상 위에는 종이 한 장이 은찬을 반기고 있었다.
‘이런 거, 사소한데 되게 감동이란 말이야.’
이라고 적혀 있는 글자는 꼭 날 환영해 주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자리에 앉아 변승채 선배와 몇 번 사진을 찍고 나니 어느새 온에어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오늘도 무탈한 하루셨나요? 아주 사소하더라도 좋은 일이 하나쯤은 떠오르는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으로 시작합니다. 승채입니다~”
종이를 붙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긴장감에 무의식적으로 목울대가 울렸다.
“오늘의 게스트는요. 요즘 떠오르는 아이돌그룹이죠. 언급량이 눈에 띄게 늘어서 저도 관심 있게 보고 있었던 후배랍니다. 제네시스의 은찬 씨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은찬입니다~”
빨간 불이 켜지고 일 모드로 들어선 변승채 선배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솔직히 말해 변승채 선배의 첫인상은 가벼워 보이는 면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진행을 하고 있는 변승채 선배는 말 그대로 프로 DJ였다.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변승채 선배의 라디오를 청취할 때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눈으로 그 모습을 직접 보니 그 이질감이 더욱 심했다.
‘하긴 선배… 무대도 엄청 잘했어. 일할 때만큼은 항상 진심이시구나. 그러고 보니 리얼리티도 그렇고 실제로 뵀을 때도 그렇고 성격 때문에 오해하고 있었나 보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딱히 의외인 사실이 아닌데도 혼자 놀라고 있는 걸 보면.
“요즘 제네시스 언급량이 많아지고 있는데 기쁘겠어요. 저희한테도 신청곡으로 제네시스 곡 자주 들어와요!”
“저야 항상 너무 감사하죠. 더 열심히 해서 보답해 드려야겠다는 생각뿐이에요.”
“지금보다 더~? 뭐였더라… 은찬 씨 지금도 별명이 있던데… 청순열정남이었나?”
“제발… 선배~!”
“아하하!”
은찬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팍 숙였다.
“아, 은찬 씨, 혹시 제네시스로서 목표라든가 꿈 같은 거 있어요? 인터넷 반응을 보면 다들 열심히 하는 은찬 씨의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더라고요.”
승채가 부끄러워하는 은찬을 보고 웃더니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네.’
은찬이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 가장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될 때도 있는 법이었다. 지금 은찬의 가장 확실한 목표는.’제네시스 단독콘서트’.
하지만 그런 질문에 너무 솔직하게 대답하면 팬들이 부담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절대적으로 팬분들의 지지가 필요하고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한다면 팬분들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더더욱 노력을 하실 거고.
‘부담감을 안겨 드리고 싶진 않아.’
분명한 목표를 말하면서도 팬분들이 무리하지 않을 정도의 대답을 해야 했다. 찬찬히 생각하며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은찬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좀 더 많은 분들이 저희 제네시스를 알게 되고, 더 큰 무대에서 공연하는 게 목표죠. 하지만 이건 아이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꿈일 거라고 생각해요.”
“네, 그렇죠~ 저도 데뷔 초에는 그 꿈 하나로 여기까지 달려왔던 것 같아요.”
“맞아요. 그런데 모든 아이돌이 성공하는 건 아니니 어쩌면 이루지 못할 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저는 목표치를 못 이루더라도 지금처럼 이렇게 팬분들이랑 행복하고 싶어요. 항상 과분하고 소중한 저희 팬들이 저로 인해 행복해하시는 게 소소한 목표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큰 무대에서 볼 수 있다면 더더욱 좋겠죠?”
“다정하네요, 은찬 씨는~”
여태껏 환하게 웃으며 방송을 진행하던 승채도 이번만큼은 감명을 받은 듯 은찬을 바라보며 박수를 쳤다. 은찬은 그 반응이 쑥스러워 뒷목을 매만지다 목을 가다듬었다. 그 이후로 몇 번의 질문이 더 오갔고, 은찬의 추천곡 몇 곡도 들었다.
변승채 선배가.’저희 팬이라고 하시던데…’ 하고 짓궂은 질문을 해왔을 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그냥 솔직하게 답했다. 너무 좋아해서 이 자리에도 앉아 있을 수 있게 된 것 같다고. 대화를 나누듯 라디오를 진행하다 보니 어느덧 1시간이 지나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럼 은찬 씨와 같이 힘내고 있는 동년배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해줘요.”
“엇, 제가 뭐라 말씀드릴 입장이 못 되는데. 음, 솔직히 우리 같은 20대는 앞이 깜깜하기도 하고 잘 안 보일 때도 많잖아요. 저도 그랬고요. 청취자분들이 대학생이실 수도 있고, 직장인이실 수도 있고, 취준생이실 수도 있고. 음…….”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승채의 시선에 은찬이 눈을 좌우로 굴렸다.
“다들 각자의 위치에서 힘든 일이 있을 텐데 너무 연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힘들 땐 힘들어해도 괜찮아요. 미래의 나는 항상 과거의 나를 응원해 주고 있거든요. 그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고… 최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고…….”
회귀하기 전에는 절대 깨닫지 못했던 사실이다. 나도 그렇게 살기 싫어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살기 싫었던 게 아니라 더 잘 살고 싶어서 느꼈던 감정들이었다.
“저는 이게 잘 안 돼서 많이 힘들었어요. 뻔한 말이지만 시간은 지나가잖아요. 동년배인 대한민국 20대 여러분, 같이 파이팅 해요! 저도 파이팅 할게요.”
“진심이 잘 느껴지는 말이네요. 옆에 있던 저한테까지 위로가 되는데요~ 혹시 인생 2회 차인가요?”
“아하하… 진심이 닿았다면 다행이에요.”
‘틀린 말은 아닌데…….’
은찬이 살짝 움찔거렸다.
‘미친… 정신 차려.’
최대한 빨리 방송에 집중해야 했다.
조금 늦었지만 이전에는 완벽주의가 있어서 부정적인 생각을 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이 마음이 청취자들에게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며 말을 마무리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변승채 선배가 마무리 멘트를 마치자 온에어의 빨간 불이 꺼졌다.
완벽히 내 위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게 적당히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이 프로다웠다. 선배의 얼굴은 다시 첫인상대로 돌아와 있었는데, 피곤한 기색은커녕 오히려 즐거워 보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은찬이 양손을 깍지 낀 다음 앞쪽으로 해서 기지개를 켜며 승채를 향해 물었다.
“으아, 저 좀 횡설수설하지 않았어요?”
“잘하던데? 아, 맞아! 은찬 씨!”
“네?”
은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는데 승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은찬이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벌떡 일어난 승채를 쳐다봤다. 승채의 얼굴에는 어느새 음흉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끝나고 스케줄 또 있어? 없겠지.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아, 없어요. 이게 마지막이에요.”
“그럴 것 같았어. 가자.”
“네?”
“가자고.”
의문스러운 제안에 당황해 몇 번이나 되물었으나 여전히 답은 같았다. 뭔지 알아야 대답을 하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변승채 선배는 주변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완벽히 첫인상 그대로의 변승채였다.
“따라와. 술 한잔하자. 이것도 기념인데. 작가 누나도 가실래요? 뒤풀이. 싫어요? 에이… 그럼 형은? 아, 또 왜~”
‘아하…….’
이대로 가기는 아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른 스태프분들은 피곤한지 그런 변승채 선배의 제안을 웃으며 거절하는 중이었다. 변승채 선배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변해갔다.
“너는 안 뺄 거지?”
그러다 변승채 선배는 다시 나를 보고 물었다. 원점이다. 아마 원래 타깃이 나였던 것 같다.
‘윽.’
이 분위기에서 싫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 원래부터 술자리를 좋아한다는 건 리얼리티를 통해 익히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앞에서 보니 예상보다 더했다. 저렇게 기대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을 거절하는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소년미 멤버인데.
“…가시죠.”
결국 핸드폰을 들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형…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네… 다른 일정이 생겨서 택시 타고 들어가려고요. 푹 쉬세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꼭 푹 쉬셔야 돼요.”
화면 위의 [이진국 형] 네 글자를 애처롭게 바라봤다. 그 편안했던 승차감과 과한 걱정이 이렇게 그리울 줄이야.
변승채 선배는 내 어깨 위에 팔을 두르고 주차장으로 가더니 어딘가로 차를 몰았다. 일반 술집에 가진 않을 것 같긴 했는데, 연예인들이 찾는 프라이빗한 술집이라나 뭐라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