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91
91. 소년미(2)
“…나 어제 집 어떻게 왔지?”
생각도 생각인데, 인간적으로 머리가 너무 아팠다.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가 다시 그대로 이불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울려서 어쩔 수 없었다. 리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형, 그래도 귀소 본능은 있는가 봐요. 마스크도 잘 쓰고 택시 타고 들어오던데요. 근데 누가 있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다행히 새벽에 산책하던 가을 형이 발견해서 다행이죠.”
리온이가 이렇게 말을 길게 하는 건 좀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데. 은찬이 아직 먹먹한 정신으로 리온을 빤히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도저히 지금은 제 낯짝으로 리온이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쪽팔린다…….’
막내한테 그런 모습을 보였다니, 마치 발가벗은 기분이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나를 아는 사람이 근처에 없었던 게 첫 번째로 다행이고, 가을이가 발견했다는 게 두 번째로 다행이고.
‘가을이한테 밥이라도 사줘야겠네.’
나 때문에 어떤 고생을 했는지는… 별로 기억해 내고 싶지는 않다만.
“…아~”
양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은찬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끙끙 앓았다. 이불을 발로 뻥뻥 차버리고 싶었는데, 그것만큼은 차마 체면 때문에 하지 못했다. 대신 뒹굴거리던 은찬의 몸에서 리온이 이불을 걷어냈다. 피곤해 보이는 리온이 은찬의 손틈 사이로 비쳤다.
“이거 마셔요.”
리온이는 한 손에 머그컵 하나를 들고 있었다. 잠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가만히 있자 리온은 안 마실 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물?”
“꿀물 탔어요. 인터넷 보니까 이게 숙취에 좋다길래.”
순간 머리가 개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기분만이지만. 형은 이렇게 술 먹고 개가 돼서 민폐를 끼치고 있는데 막내는 형 꿀물도 타주고.
‘사랑스러운 놈…….’
은찬이 감격에 젖은 눈망울로 두 손을 뻗어 머그컵을 받아 들었다. 리온은 그런 은찬의 눈빛을 받는 것이 머쓱한 듯 자꾸만 시선을 피했다.
‘근데 우리 숙소에 꿀이 있었나?’
은찬이 물었다.
“꿀은 어디서 났어?”
“…주혁이 형 자리에서… 음, 빌렸어요.”
그럼 그렇지. 공용 주방에 꿀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주혁이는 스트레스 받을 때마다 짜 먹는 꿀을 하나씩 먹고는 했는데, 아마 그걸 가져온 모양이다. 머뭇거리다가 빌렸다고 말하는 걸 보면 주혁이한테 허락을 못 받은 거겠지.
‘몰래 가져왔구나…….’
하지만 주혁이라면 보나 마나 쿨하게 가져가라고 했을 테니까. 어쨌든 제 생각을 해준 막내가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은찬이 상체를 일으켜 머그컵을 들고 있지 않은 한 팔을 리온의 목에 둘러 꼭 껴안았다.
“으앗.”
“고마워. 잘 마실게.”
“형, 술 냄새 나요.”
“아직도? 아오, 진짜 안 빠지네.”
리온이 제 목에 둘린 팔을 꾹꾹 밀어내길래 바로 몸을 물려 뒤로 떨어졌다. 손바닥에 머그컵의 온기가 전해져 왔다.
‘달아…….’
한 모금 마시자 갈증이 해소되면서 속이 뜨끈해졌다.
‘속이 왜 뜨겁지? 꿀물이 막 뜨거운 것도 아닌데.’
나 어제 토한 건가.
“네. 그거 마시고 천천히 일어나세요. 마시라고 깨웠어요. 힘들어 보이길래.”
“나? 내가?”
“네. 어제 화장실에서 잘 안 나오고… 아무튼 걱정됐어요, 조금.”
정확히 정답이네.
등 뒤가 순식간에 오싹해졌다. 목이 갑자기 더 타는 것 같아 꿀물을 연거푸 마셨다. 리온이 그런 은찬을 바라보며 고개를 내저을 때였다. 방문이 열리더니 지금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리고 그놈은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보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오리온, 넌 뭔 저런 애를 챙기고 있어?”
“챙긴 거 아니에요.”
“아씨…….”
짜증은 나는데 할 말은 없다. 어제 그 추태를 현주인도 봤다면 이건 정말 혀 깨물고 죽어야 할 판이다. 물론 봤겠지만.
‘하… 오늘은 정말 가만히 있어야지.’
쉬는 날이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오늘은 침대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모니터링이나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럼 전 나가볼게요. 쉬세요.”
“리온아, 배고프면 말해. 밥값 보내줄게!”
“괜찮아요. 저 돈 많아요.”
“어, 응…….”
상당히 멋진 발언을 들은 것 같다만.
은찬은 배웅할 상대가 떠나 머쓱해진 손을 내리며 그대로 뒷목을 문질렀다. 그대로 다시 누워 조금만 더 잠을 청하려 했는데, 따가운 시선이 꽂혀 그러지 못했다.
“…왜?”
현주인이 이쪽을 째려보는 중이었다.
‘젠장… 평소라면 뭐라고 말이라도 했을 텐데 지금은 내가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니 말을 못 하겠네.’
잘못한 게 있을 수도 있는데 큰소리를 내면 너무 양심이 없지 않는가. 그래도 사람 도리는 해야 할 것 같아 조용히 꿀물만 홀짝였다.
‘머리 번쩍거리는 거 봐.’
컨셉 포토 촬영 때문에 다시 탈색 후 색을 덮어서인지 유독 깔끔한 머리가 눈에 띄었다. 몸이 무거운 나와는 달리 저 머리 덕분에 오전부터 후광이 비치는 것 같기도.
‘아, 지금 이런 생각 할 때가 아니지.’
“아, 왜… 나 뭐 잘못했냐? 사과할게. 말해봐.”
차라리 뭐라고 핀잔이라도 줬으면 이렇게 민망하지는 않았을 텐데. 현주인은 별말 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내젓더니 제 할 일을 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건가 싶어 다시금 이유를 캐물어도 여전히 말이 없었다.
‘때 되면 말해주겠지, 뭐.’
머그컵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다시 몸을 뉘었다.
그래도 만취한 와중임에도 변승채 선배의 호감도는 확인했다. 선배와 헤어질 당시 거의 끝물 상황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호감도 확인을 했던 것만큼은 선명하다. 백무영 선배한테서는 어떤 정보를 읽어내려 해도 에러가 뜨길래 조금 긴장했는데, 다행히 변승채 선배에게서는 무리 없이 호감도를 읽어낼 수 있었다.
[ 변승채 ♡ +20% ]내 생각보다는 높은 수치였다. 원래 만인에게 기본적으로 사랑이 넘치는 분이신 것 같았으니 나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재밌는 분이었어.’
본능적으로 경계를 했던 게 미안해질 정도랄까. 표현 방법이 과격해서 그렇지, 어쨌든 정이 많은 사람임에는 확실하다. 백무영 선배를 친구로서 정말 아끼는 마음도 잘 드러났고, 거짓말도 못하시는 것 같았다. 지금의 백무영 선배와는 정말 다르게.
‘그나저나 요즘은 연락을 안 한다고 하셨는데… 근황 물어볼 방법이 없나. 선배한테 직접 과거의 백무영 선배에 대해 더 묻는 방법밖에 없을까. 날 좋게 봐주시는 것 같긴 한데. 백무영 선배를 마주치기라도 해야 반지의 정체와 시스템 에러에 대해서 알아보기라도 할 텐데 나도 선배한테 연락할 건덕지가 없…….’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중이었다. 눈을 감기 위해 몸을 뒤척거리는데, 눈앞에 나타난 현주인의 존재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씨! 깜짝아!”
놈이 내 침대 앞에 있었다. 그것도 내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몸을 낮추고. 몸을 돌리자마자 놈과 눈이 마주쳐서 정말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볼일 보던 거 아니었어?
“욕했냐?”
“씨…에서 끊었거든? …왜?”
“야, 일어나.”
“왜? 좀 더 자려고 했는데.”
오늘은 간만에 쉬는 날이라고. 레슨도, 스케줄도, 녹음도 없는 온전히 쉬는 날. 게다가 숙취 때문에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운데 대체 왜 나를 끌어내려 하는 거냐고.
“오리온 프로듀싱 시안 확인하러 가게. 스탯도 줄 거라며?”
“…….”
아주 잠깐.’하필 오늘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스쳐 갔다.
‘악마 같은 놈… 오후에 가도 되는 걸 굳이 지금 가자는 걸 보니 나 괴로워하는 거 보고 싶어서 저러지.’
하지만 그 이유라면 그냥 닥치고 따를 수밖에 없지. 내가 천장을 보면서 눈만 끔뻑이자 알겠다는 답으로 해석한 건지 놈은 다시 몸을 일으켜 제자리로 갔다. 그저 고통스러운 듯 양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르며 으으, 하며 낮고 짤막한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 씻고 올게.”
그러다 인상을 퍽 찌푸리며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는 데는 겨우 성공했으나 방에서 화장실까지 가는 길이 천 리였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머리가 울려서 도저히 인상을 펼 수가 없었다.
***
은찬과 주인은 리온에게 댄스 스탯을 분배하기로 결정 내렸다. 그리고 프로듀싱 시안을 확인할 겸 겸사겸사 스탯 해금까지 시도하기로 했다.
‘매정한 새끼.’
은찬은 속으로 열심히도 투덜거렸다. 회사 근처의 리온의 개인 작업실까지 가는 데 택시를 타고 가자고 그렇게 애원을 했건만 주인은 은찬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은찬이 택시비를 본인이 내겠다고 하는데도.
‘아마 저 새끼, 지금 돌려서 복수하는 걸 거야. 어제 개처럼 숙소 기어들어 왔다고.’
누워 있을 땐 머리만 아픈 줄 알았는데 걷다 보니 속까지 울렁거려 설상가상이었다. 얼굴은 말할 필요도 없이 초췌했다.
병 주고 약 주고인지는 모르지만 주인은 숙소 근처의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를 하나 사 와 은찬에게 건넸다. 은찬은 주인이 준 초코우유를 신경질적으로 빨아 먹으며 울리는 머리와 속까지 진정시켜야 했다.
“다 온 거 아니냐…….”
“어. 연락해 뒀는데.”
“엇.”
텅 빈 초코우유 상자를 바닥까지 빨 때였다. 옆에서 누군가가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소리 나는 쪽을 바라본 은찬의 표정이 순식간에 미묘하게 변해 버렸다.
“안녕하세요! …아.”
그리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오늘이 주말이고 마침 회사 근처인지라 함정원도 연습을 하러 나온 모양이었다. 함정원은 현주인을 보고 활짝 웃음을 보이다 이내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겨 버렸다.
‘아, 하필 이럴 때 마주치냐. 평소에는 더럽게 안 보이더니…….’
좀 깔쌈할 때 마주쳤으면 덜 쪽팔렸을 텐데, 하필 퀭하고 거지꼴 하고 있을 때 만나다니. 무슨 법칙이라도 있는지 꼭 이렇다니까.
“…어, 누구더라?”
“저 연습생 함정원입니다! 선배랑 같이 연습도 했었어요!”
주인을 바라보는 정원은 꼭 무슨 강아지 같았다. 꼬리라도 보일 것처럼 해맑게 웃다 무어라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그 큰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꽤 오래 연습했는데도 몰라보는 놈이 좋나…….’
아무리 상습적인 연습 프로불참러 현주인이라도 같은 연습실 쓴 적이 꽤 있을 텐데. 함정원이 현주인을 과하게 좋아하는 건지, 그냥 현주인이 남한테 관심이 없는 건지.
“형네 팀은 오디션 프로그램 아무도 안 나가시나요?”
“어. 안 나가는데.”
“형한테 물어본 거 아닌데요.”
관자놀이에 힘이 빡 들어갔다. 옆에서 현주인이 빨리 자리를 뜨고 싶어 하는 티를 너무 내길래 적당히 대답해 준 건데 이렇게까지 환영을 못 받을 줄이야.
‘저게… 가뜩이나 숙취 때문에 빡치는데…….’
은찬이 입가에 힘을 주며 겨우 미소 지었다.
“나 너한테 뭐 잘못했니……?”
“은찬 형, 그때 데뷔조 발표할 때 저 비웃지 않았어요?”
“그랬어?”
“내가?”
함정원의 속사포 같은 말에 나와 현주인이 동시에 되물었다. 지금 함정원이 언제를 말하는 건지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 상황까지도.
“다 보이던데.”
“아니, 그런 적 없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다. 그때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서.”
“동정은…….”
함정원이 말하는 건 제네시스 데뷔조 발표 당시였을 것이다. 신발 끈을 묶고 있는데, 연습실을 나눈다는 말에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함정원이 눈에 밟혀 멈칫했을 때.
‘아오, 저게 진짜…….’
동정이라고 이름을 붙이면 틀릴 것도 없지만. 꼭 그런 식으로 해석해야만 하겠냐. 그저 그 상황이 안쓰러워서 감정에 솔직했던 건데 그걸 이런 식으로 받아들였을 줄이야. 물론 받아들인 사람이 기분 나쁘다면 그런 거겠지만, 좀 억울한데.
“얼른 들어가. 형, 우리도 가자.”
“선배,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하루 기분 좋게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어, 그래.”
다행히 타이밍 좋게 날 이끌어내는 현주인 덕분에 머리를 조금 식힐 수 있었다. 함정원은 언제 차갑게 정색을 했냐는 듯, 현주인에게 방글거리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현주인이 인사를 받아주자 부끄러운 듯 뒤를 돌아 회사 쪽으로 도도도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와~ 너는 선배인데 나는 그렇게 찬밥 신세냐?”
“흠.”
저놈도 자기 신경 안 써준 건 똑같을 텐데, 왜 나한테만 난리야? 대체 뭔 일이 있었는지 알 수도 없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답답하게 있어야 하냐고.
‘슬슬 짜증 나네…….’
은찬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고 눈을 세게 감았다 떴다. 그러고 보니 회사 근처라면 리온의 작업실 근처까지 왔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