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ee hearts in failed idol’s eyes RAW novel - Chapter 92
92. 컨셉 시안(1)
“여기네.”
회사 옆 건물을 가리키며 은찬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한번 잠긴 목소리는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방금 전 목소리를 높여서 더 그런 걸지도.
현주인이 인터폰으로 리온의 작업실 호수를 누르고 호출을 했다. 곧 1층 문이 열렸다. 리온의 작업실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 거울에 얼굴을 비춰보았다.
“…나 오늘 왜 이렇게 초췌해?”
곧 내 몰골에 기함을 했지만.
‘꼴이 말이 아니잖아!’
잠을 못 잔 것도 아닐 터인데 눈 밑의 다크서클과 피곤함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은 누가 봐도 전날 술 먹은 놈이다. 대충 얹듯이 쓰고 왔던 볼캡을 다시 푹 눌러썼다. 이 얼굴로 함정원을 대면했다니, 두 배로 쪽팔렸다.
“평소랑 똑같은데.”
“뭐? 너 눈이 없냐? 생각보다 심각하잖아. 이럴 때 칭찬해 주려고 하지 마. 나도 아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지랄은…….”
잘 보일 사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관리를 못 했을 때의 죄책감은 조금 심했다. 아이돌로서의 자아가 일상생활까지 침투하기라도 한 건지.
아무튼 그렇게 리온이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 작업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내가 먼저 고개를 내밀었다. 안쪽 작업 책상에 앉아 있던 리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어?”
“리온아, 형도 왔어.”
“형, 왜 왔어요? 쉬고 있지. 괜찮아요?”
“나 완전 멀쩡해~”
“여기엔 약이 없는데. 숙소에는 상비약이 있어도…….”
내가 온다는 걸 미리 듣지 못한 듯했다. 현주인이 말을 해둘 줄 알았는데. 어쨌든 반갑게 손을 흔들거리자 리온이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직 어려서 숙취가 뭔지 모르나 봐. 귀여워… 그냥 아파하니까 순수하게 걱정해 주는 것 같은데 그게 술 처먹다 이런 거니까 양심에 좀 찔린다. 걱정을 받을 입장이 아닌데.’
걱정은 요즘 작업에 몰두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는 리온이가 받아야 하는 것이다. 은찬이 눈앞의 리온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다 리온을 꼭 끌어안을 때쯤이었다. 현주인이 산통을 깨왔다.
“술 좀 많이 마신다고 안 죽어.”
“힘들어 보이던데…….”
“그거 오늘 오후 되면 싹 나을 거다.”
“그래요?”
작업 책상 끝 쪽 의자에 앉아 있던 놈은 책상 위에 놓인 종이 더미들을 뒤적거리던 중이었다. 감정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툭 내뱉는데,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은찬의 입술이 빼쭉 튀어나왔다.
“술이 그렇게 무서운 거였나.”
심지어 리온이도 그런 현주인의 말을 듣고는 그런가, 하며 수긍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다른 사람 같긴 했어요.”
“…나 어제 주정 부렸니?”
“…음.”
끊겨 버린 기억 속의 난 도대체 무슨 행동을 한 건지. 어떻게 저 순수한 애가 단박에 수긍을 한단 말인가. 아무리 떠올리려 해봐도 숙소에 들어오고 난 뒤의 기억은 아예 잃어버린 게 분명했다. 영 깜깜해서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서 뭔가를 했나?’
큰 사고는 안 친 것 같은데. 고민을 하는 듯한 리온의 얼굴을 초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
네가 말해보라는 듯 현주인을 쳐다봤다. 내가 늦게 귀가했다면 놈도 방 안에 있었을 테니까. 놈은 피식 웃기만 하고 대답을 기피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냥 말도 없고 대답도 단답으로 하고. 얼굴에서 냉기도 나오는 게 형 평소 모습답진 않았어요.”
“…앗, 그래?”
은찬이 되묻자 리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서히 굳어가던 은찬의 얼굴에도 다시 화색이 돌았다.
“네.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없었어. 왜 그랬을까~”
안심했다.
‘아… 나 만취하면 입 닫았지.’
텐션이 오르고 말이 많아지다 어느 한계점을 넘어가면 입을 딱 닫아버리는 편이었다. 바로 어제가 그런 상태였던 모양이다. 평소에 무표정이었던 적이 거의 없었으니 리온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했다. 차라리 애매한 것보다 무지막지하게 술을 들이부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뭘 왜 그러긴 왜 그래. 개가 돼서 그랬지.”
“맞아…가 아니고. 뭐가 맞아? 아오.”
“형, 괜찮다면 그 얘긴 이제 됐고 무대 컨셉 디테일 잡았는데 한번 들어볼래요?”
“어! 말해줘!”
대화 주제를 변경한다니, 대환영이다. 은찬은 과하게 오버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주인의 앞에 있던 종이 더미의 중간쯤에서 푸른색 색인을 달아놓은 몇 장의 종이를 뽑아 책상 위에 쭉 펼쳤다. 종이 위에는 간결한 단어 몇 개와 도형이 그려져 있었다.
“솔직히 저한테는 ‘소년과 남자 사이’라는 게 몰입이 잘 안 돼서요. 대상을 주인이 형으로 잡고 생각해 봤는데 기분 안 나쁘죠?”
“나쁠 리가. 상관없어.”
“다행이네요. 형이 센터기도 하잖아요. 사실 상관없을 것 같긴 했어요.”
역시 현주인 앞에서도 기 한번 죽은 적 없는 막내다운 발언이다. 괜히 살짝 둘의 눈치를 살피게 됐다. 무심한 룸메이트 둘답게 서로 딱히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전에 가을이를 데려와 컨셉 얘기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러고 보니 그때는 나를 모티브로 해서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리온이의 영감에 도움이 되었다는데 싫을 리가 없지. 그건 현주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리온이의 재능은 모든 멤버가 인정하고 가는 부분이었으니까.
리온이는 종이 위에 있는 간결한 내용들이 PPT라도 되는 것처럼 차분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제의 언어 그대로 너무 어른스럽게 가지는 말고 아슬아슬함을 강조하자는 게 그 의견이었다. 갓 스물이 된 만큼 발랄한 듯한 모습도 놓치지 않으면서 중간점을 잘 찾은 절충안이었다.
‘청량 컨셉은 아니어도 너무 무거운 컨셉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하긴 같은 컨셉으로 두 번 연속 나오는 건 무리지. 사람들에게 각인이 안 돼. 청량 컨셉 전문 그룹이라는 이미지가 고정될 수도 있고… 우리 멤버로 그렇게 가기엔 좀 아까운 면이 있긴 해.’
아직 가사가 붙진 않았지만 데모곡도 좋았다. 적당한 템포의 곡이었던 타이틀곡 후보와 컨셉 설명이 아주 잘 어울렸다. 은찬이 고개를 끄덕이며 리온의 설명을 주의 깊게 들었다.
‘역시 리온이가 창의적인 부분에서는 머리가 잘 돌아가. 이러면 완전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은 치겠어.’
게다가 이런 컨셉까지 세세히 생각해 놨다니, 아주 기특하다. 리온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주인이 형이 이번에 딱 20살이니 잘 맞겠네요. 무슨 말인지 알죠? 무엇보다 표정연기가 중요할 것 같거든요.”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은 그런 리액션도 영 만족스럽지 않은지 반복해서 주인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고는 말을 덧붙여 왔다.
“형들도 알다시피 전 저희 노래 성장 서사로 썼거든요? 데뷔곡은 설렘, 첫사랑, 만남. 지난번 싱글에서는 꿈을 향한 도전, 풋풋함. 그래서 이번에는 사랑을 주제로 쓰고 싶은데.”
지금껏 들었던 것보다 더욱 귀를 열었다. 리온이가 쓰고 싶은 거라고 하기엔 조금 생소한 주제긴 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건.
‘…이놈이 그런 걸 소화할 수 있으려나?’
현주인이 그런 풋풋한 컨셉의 사랑 노래를 소화할 수 있을는지가 문제다. 연애를 많이 해본 것과 리온이 말하는 사랑이 다른 부류인 것쯤은 연애 숙맥인 자신도 알고 있는 바였다.
“형, 사랑해 본 적 있어요?”
“풉.”
역시 사람 생각 다 비슷하구나.
“커피라도 사 올까.”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뜨리자 현주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를 뜨려는 생각인지 몸을 일으키려는 놈의 손목을 리온이 낚아챘다. 리온이는 그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현주인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보기엔 주인 형이 되게 어른 같긴 해서요.”
“난? 리온아, 난?”
“…….”
괜히 끼어들어 봤는데, 본전도 못 찾았다.
‘이씨…….’
입을 다물고 리온이의 옆얼굴을 지켜봤다. 지금의 리온이는 현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듯 보였다. 그 표정과 몸짓이 드물게 강경했다.
“근데 사랑한다는 말은 일절 안 쓸 거예요.”
리온이는 들으라는 듯이 일부러 힘을 주고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다시 의자에 앉은 현주인은, 그제야 흥미롭다는 듯 리온의 눈을 마주 보았다.
‘음?’
그리고 나도. 그 말에는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사랑의 정의가 꼭 이성 관계일 필요는 없으니까. 사랑에는 다양한 범주가 있죠.”
‘오…….’
내심 감탄했다. 그건 나조차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거였다. 그제야 리온이가 자기답지 않게 사랑을 타이틀곡의 가사 주제로 선택한 게 이해됐다.
‘이제 18살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리온이의 말대로 사랑의 정의가 꼭 이성 관계일 필요는 없다.
주어는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가 될 수도 있으며 팬과 가수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리온의 말대로 가사에 직접적으로 사랑이란 단어는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가사만으로 사랑의 감정을 ’느낄 .’ 있게 해주는 게 더 감성적이고 효과적이지.
“주어는 마음대로 생각해서 표현해도 되겠네요. 감이 좀 오나요?”
“우리 아기… 천잰가 봐…….”
“형은 이해를 잘했네요. 주접은 떨 필요 없으시고요. 그런 표현을 지양하겠다는 소리예요.”
“지금 난 네가 뭐라 말해도 타격이 없어, 리온아. 너 너무 멋있어…….”
역시 머리가 비상한 놈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회귀 전에도 리온이의 곡을 매번 들었음에도 이렇게 직접 곡을 만들 때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그것도 그게 우리 곡이라서 더더욱.
“뭐, 알겠어.”
내가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는 동안 가만히 듣고만 있던 현주인은 턱을 괸 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무표정이었던 얼굴이 고개를 끄덕였다.
‘누굴 떠올린 건가?’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해만 했으면 된 건가? 회상을 한다는데 간섭할 필요는 없지.
“그러니까 형.”
“어.”
현주인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리온이 목을 가다듬었다. 꽤 결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마 지금부터가 부탁의 본론인 것 같았다.
“좀 벗어줘요.”
“푸핫……!”
“…….”
무대에서 노출을 해달라는 소리겠지? 저 직설적인 화법마저 막내답다. 막내가 꾸리고 싶은 무대가 있다는데 따라줘야지, 암.
“아~ 그래, 벗어줘. 주인아~ 한두 번 벗는 것도 아니고.”
“막내, 밥은 먹었어?”
무표정이던 놈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 천천히 물었다. 말을 돌리려는 게 여실히 티가 나는 걸 보니 천하의 현주인도 조금 당황한 모양이었다.
“네가 웬일로 당황을… 음?”
웅-
그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내 핸드폰이 진동했다. 변승채 선배로부터의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