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107
107화. 순서.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한국어로 해석한 책을 즉석에서 일본어와 중국어로 그냥 읽듯이 번역한 퍼포먼스의 영향력은 컸다.
금괴의 수입이라던가, 먹방 너튜버, 드라마 작가라는 화려한 모습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언어를 현지인처럼 할 줄 아는 언어능력자’의 정체성이 그 한 순간의 장면으로 그대로 드러났다.
“작가님. 혹시 다른 언어로도 같은 걸 말하실 수 있으신가요?”
“그럼요.”
흔쾌히 대답한 난 도곤어와 러시아어, 투르크메니스탄어로 같은 페이지를 읽었고, 이런 내 모습은 정말로 큰 화제가 됐다.
‘파피루스 속 고대 이집트인의 숨결’은 일반인 대상으로 기획된 책은 아니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충분히 자랑스러울 만한 요소가 많았다.
무려 이집트 정부가 자국의 유산인 파피루스 속 상형문자를 한국인인 내게 맡겨, 아랍어와 영어, 프랑스어로 출판한 것이다.
국뽕을 정확히 저격한 것도 있지만.
피라미드나 고대 이집트 신화는 그리스 로마 신화와 더불어「만화로 보는 이집트 신화」라는 어린이 교양 도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더없이 익숙한 소재.
고대 이집트라는 신비의 세계가 궁금한 사람도 많아서, ‘파피루스 속 고대 이집트인의 숨결’의 초판 3천 부가 매우 빠르게 소진됐다.
만음사는 계획했던 것처럼 2쇄 2만 부를 거의 쉬지 않고 찍었지만, 2만 부가 품절되는 것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연일 희소식이 날아드는 가운데.
집에서 대본 작업을 하던 중, 미정이가 찾아왔다.
“오빠. 미정이에요.”
“어. 오랜만이네. 어쩐 일이야. 희택이는?”
“희택이 오빠는 시골 내려갔어요. 양계장 두 곳이랑 위탁 계약한다더라고요.”
“그래? 혹시 무슨 일 있어?”
“두 가지 보고가 있어요.”
미정이는 너의 아저씨 제작사인 중국의 신려전매고분유한공사와의 연락을 도맡아 진행하고 있다.
그 일인가?
“중국 제작사에서 뭐라고 해?”
“네. 그렇긴 한데, 좋은 쪽이에요.”
“응?”
“6부 대본까지 보냈잖아요. 중국 제작사에서도, 당에서도 대만족인가 봐요.”
“그래? 다행이네. 뭐, 맞춤으로 그렇게 쓰고 있으니까.”
“다음 작품 계약을 제의해 왔어요. 이번엔 너의 아저씨 번안 같은 게 아니고, 오리지널 컨텐츠로요.”
어려운 일이다.
넷플에 넘긴 작품이 동시 방영되면, 난 중국과는 한 하늘을 두고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사이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건 무리지. 너도 우리 계획을 잘 알잖아.”
“저도 오빠 생각은 잘 알긴 한데, 좀 간단하지는 않아요.”
“왜?”
“케이 픽쳐스에서 넷플 계약에 앞서서 변호사 자문을 받았는데요. 중국 쪽에서 걸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나봐요.”
변호사의 의견으로는 중국 제작사와 우리가 한 계약서에 따르면, 세부 스토리가 달라도 메인 캐릭터와 줄거리가 유사한 것만으로도 계약 위반을 주장할 수 있다고 했다.
“그래?”
“네. 그리고 중국 제작사의 배팅도 어마어마해요.”
“얼마나 준다는데?”
“회당 5억 5천씩 주겠대요. 박작가님이랑 오빠랑 2억 5천씩에 오빠에게는 번안료조로 5천만 원을 더해서 회당 3억 원을 제시했어요.”
중국 제작사가 배팅한 돈에는 큰 욕심이 들지 않았지만, 내 계획에 불법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 걸렸다. 나도 작가님도 법률에 그다지 밝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는데, 미정이가 나를 설득했다.
“오빠. 지금 넷플용으로 준비하는 대본이요. 그걸 팔아먹는 건 어떨까요?”
“응?”
“그걸 중국 측에 보내보자고요. 그건 분명한 명작이니까요. 중국 제작사가 마이너 버전을 찍고, 그건 케이 픽쳐스가 찍는 거예요.”
미정이의 의견은 간단했다.
중국은 각 지역마다 주류 방송국이 따로 있을 만큼 파이가 크니, 잘 조율하기만 하면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줄거리의 드라마가 방영되더라도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것이다.
“통과될 리 있겠냐?”
“그러니까 줘 보자고요. 넷플이랑 계약은 어렵지만, 이 건은 그냥 있는 거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거잖아요.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고요. 그리고 중국 제작사들도 눈이 있으면, 저걸 놓치는 건 바보같은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거잖아요.”
일단 박 작가님과 상의해보기로 했다.
다음으로 미정이는 중국 건 이외에도 내 새로운 책이 한국에서는 물론이고, 책이 출간된 나라들에서 반응을 얻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래? 어떻대?”
“다들 난리예요. 저도 봤는데, 엄청 재미있더라고요. 파피루스 속의 글들도 뭔가 신기하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되는 게 흥미로웠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따라붙은 오빠 설명이 더 좋더라고요. 고대인들의 삶을 그대로 들여다 보는 것 같았어요. 인터넷 반응을 살폈는데, 다들 저랑 비슷한 느낌인가 봐요.”
“다행이네.”
“오빠, 제가 확인한 게시판 반응 링크로 보내드릴게요. 이집트 학 교수님들이 한 논평도 3건이나 있어요.”
“교수님들이?”
“네. 권병수 교수님이라는 분은 자기가 직접 방송 프로그램을 잡아올 테니 이집트 학술 여행을 다녀오자는 제안서까지 보냈어요.”
미정이는 권 교수의 제안에도 긍정적이었다. 어차피 3권까지 분량이 계획돼 있으니, 이집트 붐을 일으켜서 나쁠 게 없다는 의견이었다.
“일단 좀 참자. 20부작이잖아. 대본 마무리 지으려면 최소한 2달은 꼼작 마라야.”
“그러니까요. 2개월 후에 다녀오면 되잖아요. 어차피 방송사도 프로그램 기획하고 팀 꾸리고 하다보면 2달은 금방이에요.”
“그 건도 생각해보자.”
“네. 아! 오빠, 식사는 잘 챙겨 드시는 거죠?”
“어. 걱정하지 마. 어차피 작가님들이랑 같이 있어서 꼬박꼬박 때 안 놓치고 잘 먹고 있어.”
“오빠, 제가 작업실에 수면베개 보냈어요. 오빠 거랑 오빠 부모님들, 안젤리나 건 오빠 방으로 보냈고요.”
“수면 베개?”
“네. 효과가 좋다더라고요.”
수면 베개라는 말을 듣자마자, 레몽드가 생각났다.
레몽드와 말리, 나의 관계는 점점 더 원전과 번역본 같이 변하고 있었다.
드라마 작업 때문에 닭이나 달걀의 공출 날이나, 레몽드랜드의 개관식 같이 중요 행사를 빼고는 레몽드에 좀처럼 가지 못하고 있었지만 사고의 언저리에 늘 레몽드와 말리가 있었다.
그리고.
백성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때와 비교하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레몽드 백성의 형편이 좋아졌지만, 펠리페 2세에게 제국은 더 이상 경쟁상대가 아니게 됐다.
그의 목표이자 경쟁상대는 바로 한국이었다.
펠리페 2세는 한국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볼 수 있는 6시 내 고향을 꾸준히 시청하고 있었다.
달성되지 않은 욕망은 바닷물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이미 하와이의 성공으로 백성들의 삶을 개선시킨 경험과 자신감은 펠리페 2세에게 ‘조금만 더’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펠리페 2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였다.
펠리페 2세는 나만큼이나 숙면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미정이에게 베개를 몇개 더 챙겨달라고 했다.
* * *
모르는 번호로 국제전화가 왔다.
하지만, 20번으로 시작하는 국가 코드를 보고선 이집트에서 온 전화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책 때문인가?
만음사는 이집트에서 주문한 3만 부의 아랍어판 책 중 500권을 항공편을 이용해서 미리 보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았더니, 이집트 대통령실이었다.
책을 출판하기 전에 미리 PDF판을 이집트 대사관에 보내서 이집트 정부의 확인을 받았었다.
하지만, 문제없을 것 같았던 중국 건도 결국은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긴 후여서, 무슨 일일지 걱정이었다.
하지만, 전화를 건네 받은 압델 파타 앨시서 대통령은 내 인사를 받자마자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김 작가. 앨시서입니다.
“네 대통령님 건강은 어떠십니까?”
-나야 뭐 나쁠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좋은 일도 생기고요. 김 작가, 김 작가의 솜씨에 정말 탄복했습니다.
“네?”
-로젠타 스톤 때도 건방진 프랑스 학자 놈들과는 전혀 다른 위엄이 넘치는 영광의 파라오를 느끼게 하시더니, 3시간 전에 책을 받고 읽다가 점심을 놓쳐버렸습니다. 굉장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미 내용을 모두 아시지 않으셨습니까?”
-태블릿으로 보는 것과는 전혀 느낌이 다르더군요. 한국에서도 우리 책이 아주 열풍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네. 이례적인 흥행세입니다. 사전 예약분으로만 4만 부 가까이나 나갔더라고요. 출판사에서는 1부의 판매량을 20만 부 이상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흥분한 앨시서 대통령의 반응으로 이집트의 속내를 엿볼 수 있었다.
대통령은 이집트 정부 역시 말리처럼 확실한 관광 인프라를 구축하겠다고 약속하며, 나와 말리 먹방 팀을 이집트로 초청하겠다고 했다.
결국은 관광인가?
이집트 정부에서 내게 상형문자 해석을 의뢰한 것이 관광을 위해서였다는 것을 알고 조금 실망하려던 순간, 대통령은 전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김 작가, 이제 와서 고백하는 말이오만 세네갈과 말리에서 주문한 프랑스어판 말이오.
“네. 프랑스어판은 번역은 끝냈지만, 아직 인쇄가 끝나지 않아 부치지는 못했습니다.”
-실은 그걸 주문한 사람은 나입니다.
“네?”
-건방진 프랑스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말리와 세네갈 사람들에게 아프리카 정신의 태두가 이집트에 있다는 것도 알리고 싶기도 했고.
뭔가 복잡한 속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리나 세네갈에도 송가이나 팀북두같은 고대 제국이 있기도 했고, 자국의 문화적 영향력을 내세우려면 먼저 굶주린 국민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라는 말이 목 중간까지 나왔지만 참았다.
좋은 관계를 입을 털어 망칠 이유는 없다.
하지만, 이집트 대통령의 입에서 나온 말은 또다시 내 예상을 벗어났다.
-세네갈과 에티오피아가 한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알고 있소. 김 작가의 공으로 말리 역시 한국 체인에 몸을 실으려 하는 것도 말이오.
한국 체인이라?
물론, 한국은 아프리카 전체와 비슷할 정도의 경제력을 갖춘 명실상부한 무역 선진국이지만, 한국이 중심이 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하지만, 이집트는 매력적인 카드였다.
나라의 크기와 국력도 그러했지만, 이집트는 중동과 유럽과 연결돼 있는 북아프리카의 맹주였다.
나라의 위치는 항상 중요했다.
이집트가 한국과 동반자적 관계가 된다면, 북동부의 에티오피아-이집트, 서아프리카의 세네갈-말리로 연결된 거점을 확보할 수 있다.
더구나 두 거점엔 아디스아바바 공항과 다카르 국제공항이라는 아프리카의 허브공항들이 있기도 했다.
세네갈이나 말리와는 달리 이집트는 이탈리아만큼이나 정말로 큰 관광자원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좋은 제안이시네요.”
-그렇지요? 제 뜻을 한국 정부에 전달해주실 수 있을까요?
“네?”
한국정부라니, 또다시 생각 못한 말이었다.
이집트 대통령은 진지한 말투로 자신의 속내를 말했다.
-전 김 작가를 믿습니다.
“네?”
-모토바 대통령에게 김 작가가 지금껏 말리에서 해온 일들을 모두 들었습니다. 모토바 대통령은 김 작가를 두고 자국의 다른 사람들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훨씬 더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라고 말하더군요.
“모토바 대통령님께서요?”
-모토바 대통령은 김 작가를 믿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을 속일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더군요. 그러면서 김 작가가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많은 언어를 할 수 있는 건,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단 마음이 선량하고 상대방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다.
대답하지 못한 사이에 금칠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글엔 사람이 드러나게 돼 있습니다. 김 작가가 쓴 이 책에는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경외와 존중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린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김 작가는 무슬림이 아니지만, 난 김 작가가 이 세상의 누구보다 제 말을 잘 이해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 말에 결심이 섰다.
“대통령님.”
-네. 김 작가.
“그럼, 대통령님의 계획과 심정을 모두 들려주십시오. 전 몇 시간이라도 대통령님의 지금 생각과 마음을 모두 듣겠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건 그 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말을 옮기는 것이라면, 그쯤이야 얼마든지 해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