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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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가지가 새다.
아이돌은 바빴다.
캔디스의 이연은 촬영이 끝난 후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길 원했지만, 예정된 다음 일정이 있었다.
이연은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이어서 팬으로서 그녀와의 만남이 무산된 것은 아쉬웠지만, 자연스럽게 구설에 오를지도 모르는 일을 피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이연을 보내고 이재훈 배우와 방송국 근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선생님. 좀 도와주십시오.”
나이 차가 꽤 나는 배우에게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일이 어색해서 편하게 부르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이재훈 배우는 선생님이라 부르는 게 편하다며 내게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다.
이재훈 배우는 25부작 드라마의 대본 번역을 부탁했다.
“아까 녹화 때 말씀드렸던 것처럼 중국 드라마에 주연으로 캐스팅됐습니다. 그런데, 번역된 원고를 봐도 도무지 역할이 이해되지 않아서요. 선생님께 대본 번역과 발음 교정을 부탁드리고 싶어서요.”
이재훈 배우는 내게 사례비로 2,500만원을 약속했다.
물론 중국어 발음 교습까지 포함된 가격이었지만, 드라마 1화는 대략 3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다. 그 정도 번역에 100만 원은 꽤 큰 비용이었다.
이재훈 배우의 말로는 회당 출연료가 1200만 원이라 했다.
이재훈 배우는 자기 출연료의 1/10을 이미 번역본이 있는 대본을 새로 번역하려는 데 쓰려는 것이었다.
작품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진지하고, 각오가 대단했다.
“번역료로 너무 큰 지출을 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니요. 전 방송 전부터 선생님을 만나 뵙길 기대했었습니다.”
“네?”
“사실 이걸 봤어요.”
이재훈 배우가 손에 쥔 건, 내가 새로 번역한 폭풍우의 출력본이었다.
“아니, 어떻게 그걸?”
“이번 드라마를 결정짓기 전까지 여러 시나리오와 책들을 찾아서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생의 건너편을 읽었습니다. 충격이었어요. 외로운 사나이 드몽이 꼭 저 같았거든요.”
머뭇거리던 이재훈 배우는 자신의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전 배우로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게 무슨 소리신가요?”
“배우는 자리를 잃으면 끝이에요. 아직 주연급이긴 하지만, 최신작들은 성적이 저조한 편이에요. 더는 화제작의 단독 주인공을 할 수 없게 됐죠. 영화로 활로를 뚫어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망했고요. 이제 남은 건 해외 뿐이라서······.”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고민하는데, 이재훈 배우가 내게 받았던 감동을 이야기했다.
“이번 생의 건너편을 읽고 나서, 너무 주인공에 몰입하는 바람에. 다른 작품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알렉상드르 작가님의 다른 출간작이 없더라고요.”
“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선생님이 새로 번역하신 폭풍우를 읽게 됐어요.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번역가의 인터뷰를 찾아보는데 구축하신 캐릭터가 너무 생생했어요. 이거다 하고 눈이 뜨였습니다.”
이재훈 배우가 내게 원한 건, 주인공의 성격분석이었다.
“폭풍우는 충격이었어요. 전 이미 마지막 숨결(푹풍우가 실린 단편집)을 읽었던 적이 있었거든요. 새로운 번역본을 보고 나서야 왜 주인공과 바다에서 온 남자가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됐어요. 선생님, 도와주십시오. 정말 제겐 마지막 기회입니다.”
아직도 주연급인 이재훈 배우가 이번 작품에서 실패한다고 해서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하지만, 매사에 진지한 이 책을 좋아하는 배우의 일을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필요해서 내민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이었다.
레몽드와 인연을 맺은 후, 난 많이 바뀌었다.
더는 싫은 일을 억지로 하고 싶지 않았다.
예전 같으면 싫더라도 신하중을 그런 식으로 몰아붙이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제 마음에 내키는 대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질서와 상관없이 욕망을 발산하며 살고 싶진 않았다.
이번 일은 적당했다.
또한 호감이 가는 사람을 먼저 믿고 돕는 일이 결국 내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이번 일로 증명하고 싶었다.
난 수락의 말 대신 손을 내밀었고, 이재훈 배우는 내 손을 잡았다.
크고 따뜻한 손이었다.
* * *
집주인 아저씨가 1층을 비웠다.
예상보다 이사가 빨라진 건 엄청나게 떨어진 대전의 집값 때문이었다.
집주인 아저씨는 이번 빌라 매매계약을 중개한 부동산 사장님의 소개로 급매로 40% 가까이 빠진 도안동의 빈 아파트를 샀다.
과정이 매우 순조로웠다.
모두 만족하는 거래였다.
우리도 우리였지만, 집주인 아저씨도 학교에 대형 BTL(민간투자임대) 기숙사가 지어진 후 점점 값이 떨어지는 빌라 대신 환금성이 좋은 아파트로 옮겨갈 기회를 얻은 것에 기뻐했다.
집주인 아저씨가 아파트를 계약했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부모님 역시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셨는데, 주변 7개 동네에 하나뿐이던 방앗간 건물이 제일 먼저 팔렸다.
“집은요?”
“집은 아직이지. 어차피 네 집값은 대출로 잔금까지 다 치렀으니까, 천천히 팔아도 돼. 급할 것 없어.”
“그럼 대전에는 언제 올라오실 거예요?”
“복숭아는 다 따고 올라가야지. 복숭아 철 끝나면, 바로 올라갈게.”
“네.”
보통 복숭아는 인건비 절약을 위해 수확시기에 따라 6월부터 8월까지 여러 품종을 나눠서 심는다. 조생종을 섞어 심어서 많은 물량을 한꺼번에 출하해야 하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좀 생각이 다르셨다.
방앗간이라는 메인 직업을 가지고 계셨던 아버지는 품이 좀 더 들더라도 비싼 조생종 신품종을 심어서 단번에 따내고 단번에 일을 마치는 쪽을 선택하셨다.
과수원 일은 7월 초면 수확이 모두 끝나니, 앞으로 3주 정도만 더 고생하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부모님이 올라오셔서 슈퍼를 하실 거라고?”
희택이는 우리 부모님이 내가 사는 빌라 건물을 구매하셔서 올라오시는 것도, 부모님이 대전에서의 호구지책으로 슈퍼를 택하신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이었다.
이야기를 전해 들은 순간부터 틈만 나면 나를 말리려 들었다.
“슈퍼 장사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야. 생각보다 자금도 엄청 많이 들고.”
“응?”
“슈퍼하는 아버지를 둔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좀 우습긴 한데, 슈퍼는 약간 사양산업이야.”
희택이는 슈퍼가 경쟁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다는 것을 지적했다.
“무겁고 큰 건 다 코팡에서, 장은 다 대형마트에서 봐. 학생들은 더 비싸도 무조건 편의점에 가. 그거 다 이겨내야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거야. 만만한 장사가 아니야.”
난 부모님이 슈퍼를 하시는 것은 돈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레몽드와의 교역을 편하게 하기 위한 가짜 사업장이라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이유가 좀 궁색했다.
“내가 합치자고 했어.”
“어?”
“벌 만큼 벌잖아. 앞으로는 더 벌 거고. 돈 모아서 어디다 쓰냐? 기말 끝나고 집에 내려갔다가 아버지 일하시는 걸 도왔는데, 감당 못하겠더라.”
“뭔 소리야?”
“떡집일 새벽 5시에 시작하시더라. 2시간 내내 땀빼면서 일 끝나니까, 복숭아 따러 가야 하신다면서 나가시는데 못 보겠더라고.”
“다 좋은데, 왜 슈퍼야?”
그래도 희택이는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난 일반적인 슈퍼를 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큰 슈퍼를 할 생각은 없어. 그냥 동네 구멍가게를 하려고.”
“어?”
“왜 테이블 몇 개 있고, 라면이나 떡볶이, 김밥 같은 것도 팔면서 하는 작은 슈퍼 있잖아. 그런 걸 할 거야.”
“답답해 죽겠네. 그러니까 그런 망하기 딱 좋은 가게를 왜 하려고 하냐고?”
“그런 가게는 동네 사랑방이잖아.”
난 일이 쉬우면서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는 가게를 차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그제야 희택이는 조금 납득했다.
“돈 벌 생각하지 않으면, 나쁘진 않긴 하겠네. 너희 어머니 음식 솜씨 좋으시니까. 그리고 네 말대로 일은 넘치게 들어오고 있으니까.”
“이재훈 배우 건은 내가 알아서 할게. 지금 2부까지는 보냈어.”
“오케이. 이번 주 수요일에 방송 나오면 아마 여기저기서 컨택 들어올 텐데. 하나 더 할래?”
“어. 이번에는 좀 더 히트할 수 있는 작가 작품으로.”
“알아볼게. 이번엔 프랑스 작가가 아니고 일본 작품이나 영어 작품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사람들에게 어필하기도 좋으니까.”
“알았어. 하나 더 하자.”
‘이번 생의 건너편’과 나는 상부상조로 서로를 도와주고 있었다.
천재 번역가 김상민이 문화예술계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조금씩 알려지고 있었다.
또한 방송 예고편을 보고 나라는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 사람들을 통해 ‘이번 생의 건너편’이 베스트 셀러 순위에 오르며, 작품에 대한 반응이 서서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사회든 같은 국적의 천재는 대중에게 사랑받게 돼 있다.
인터넷 커뮤니티마다 갑자기 나타난 천재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ID: 사망다람쥐 ]-그냥 말도 안 됨. 최근 2달 사이에 번역한 논문이 14개나 됨. 그중 7개는 한국 논문을 영문으로 번역한 것. 쌍방이 다 됨. 거기다 중국어 / 일본어 / 영어 가리지 않고 막 번역하고 있는데, 번역 퀄리티가 엄청나다고 함.
[ID: 에눌안돼요]-소문에는 6개 이상의 언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한다던데요? 나 아는 언니가 김상민이랑 같은 과인데 직접 타갈로그어로 필리핀 유학생이랑 대화하는 걸 봤다네요.
[ID: 조회팔]-주작.
∟주소도 주작 222
∟김창경 주작 3333
[ID: 꿈은키리나남친]-수요일에 빛이 나는 클래스에 나온다고 함. 그런데 그정도면 왜 번역가를 하지? 여행 너튜버하면 끝내줄 텐데.
“오빠, 오빠 이야기가 엄청 많아요.”
안젤리나 공주가 치즈돈가스를 떡볶이에 찍어 먹으면서, 커뮤니티에서 내 글을 검색해서 읽고 있었다.
안젤리나 공주는 적어도 내 방안에서는 이미 한국에 완전하게 적응한 17살 꼬맹이 아가씨였다.
“오빠, 진짜 상민 오빠가 너튜브하면 재미있긴 하겠네요.”
“내가요?”
“그냥 오빠 얼굴이 너튜브에서 나오면 반가울 것 같아요. 오라버니나 아빠에게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아!”
“왜요?”
“나중에 오빠가 레몽드로 올 수 있게 되면, 사람들에게 레몽드를 찍어서 보여주면 엄청 신기해하지 않을까요?”
안젤리나 공주는 비밀의 무게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부모님이 이사를 오게 되면, 1층의 남는 방에 자기 방을 꾸밀 생각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아꼈다.
“콩은 잘 자라고 있어?”
“네! 그렇다더라고요.”
요새 번역일에 이사, 방송일이 겹치며 레몽드에 조금 소홀해졌다.
레몽드의 왕실 역시 내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는데, 무섭게 자라고 있는 콩밭을 늘리는 일과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고 있는 제지 산업에 적극적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공주가 돌아간 뒤, 이재훈 배우의 대본 번역을 하나 더 할까 해서 컴퓨터 앞에 앉았는데, 펠릭스 2세의 전화가 왔다.
빌라구매 건으로 있는 돈을 다 써버리는 바람에 차를 구매하지는 못했지만, 펠릭스 2세는 서운해하진 않았다.
집을 구매하는 것이 안전을 확보하는 필수적인 일이라는 것을 인정한 데다, 내가 대신 최신형 스마트폰을 개통해서 보냈기 때문이다.
“상민 군. 큰일일세.”
펠릭스 2세의 목소리가 심상찮았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왕실에 쥐새끼가 있었네. 제국 황실에 화장지가 들어가 버렸어. 사신이 파견된다는데, 사신이 아니라 염탐꾼에 도적들일 게야. 어찌하면 좋을지 모르겠네.”
이럴 수가.
바가지는 저쪽에서 먼저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