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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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목.
크아앙.
나비의 포효에 공간이 흔들렸다.
먼저 도착해 있던 마법사 할아버지가 귀를 막으며 서너 발자국이나 뒤로 물러서는 게 보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나 역시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정신없는 그때.
커다란 몸집으로 변했던 나비가 한 번의 포효 후에 다시 원래의 크기로 돌아와서 내 어깨에 올라섰다.
이상했다.
나비가 내 무릎이나 어깨에 올라타는 것은 집에서도 가끔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은 느낌이 달랐다.
사아아-
나비가 내 어깨에 올라타자마자 차원을 이동하며 울렁거렸던 속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어두웠던 공간이 환하게 보였다.
무엇보다 습도가 가득한 공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정확하게는 공기 중에 스민 습기와, 이끼의 풀내음. 비릿한 무언가와 돌의 차가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느꼈던 감각이다.
거란문서 사진을 보던 중 나비가 두 번째로 변했을 때, 나비의 눈과 감각으로 접했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감각의 장점만을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난 번의 감각공유 때는 정말 고양이의 시선과 후각으로 세상을 봤었다. 가까운 곳은 흐리게 보였고, 색상은 단조로웠다.
후각이 너무 예민해서 온갖 냄새 때문에 괴로웠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고양이의 시각도 이 정도는 아닐 거라고 생각될 만큼 세상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무엇보다 비릿하고 쿰쿰하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냄새가 사라졌다.
“어찌 된 일인가?”
“잘 모르겠습니다.”
감각의 공유는 굉장했다.
난 벽을 보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아닌 냄새만으로 정확히 마법사 할아버지가 서 있는 위치를 짚어낼 수 있었다.
미야옹.
나비가 울었고, 난 그제야 나비의 특이한 변화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깨에 올라와 있는 나비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로 손을 가져갔다.
나비는 여전히 내 어깨에 앉아 있었지만, 마치 영체(靈體 신령스러운 몸)처럼 만져지지는 않았다.
팟.
공주 역시 20cm 정도 높이의 공간에 떠서 도착한 뒤 익숙한 듯 바닥에 사뿐히 내려왔다.
공주는 도착하자마자 내 어깨에 앉은 나비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늦은 그녀는 나비의 포효를 듣지 못했던 만큼, 여전히 발랄한 얼굴로 나비를 대했다.
“나비도 왔네. 오빠, 나 아까 전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나비가 오빠의 어깨에 올라타고 오빠가 차원을 이동했잖아요. 혹시나 나비나 오빠가 잘못됐을까봐 되게 걱정했어요. ···다들 왜 그래요?”
공주는 마법사 할아버지에게 어떻게 된 것인지를 물었지만, 마법사 할아버지는 대답해주지 못했다.
엄청나게 커진 나비의 포효를 들은 후 마법사 할아버지는 나비를 두려운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마법사 할아버지는 외려 내게 물었다.
“상민 군. 상민 군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
“네.”
“자네의 세상에서 흔히들 읽는다는 그 소설들에게서는 이런 현상을 설명하는 부분이 없는 겐가?”
“네. 그렇지 않아도 좀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어요. 제가 읽었던 소설에선 정령을 신수(神獸)가 아니라 물과 땅, 바람과 화염을 관장하는 영적인 존재로 표현하고 있었거든요.”
크아앙.
내 말이 끝나자, 나비가 다시 호랑이 울음소리를 냈다.
발아래에서 뭔가 쑥하고 튀어 올라오는 게 보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고양이였다.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할아버지와 공주는 한 공간에 있었지만, 멈춰 있었다.
나비에게 시간을 건드리는 능력이 있었다니.
하지만 나비가 내게 해가 될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나는, 가만히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관찰했다.
흙으로 만든 고양이를 신기하게 바라보는데 습하고 끈적했던 공기 속에서 바람이 불며 반투명한 색의 고양이도 나타났다.
저건 또 뭐지?
두 고양이는 나비와 내 앞에서 배를 내놓고 엎드렸다.
복종의 자세다.
슬쩍 다가가 고양이들을 쓰다듬었다.
[흙의 정령 노움] [바람의 정령 실프]절로 백호는 대지와 폭풍을 다스릴 수 있다는 신화가 떠올랐다.
스르륵.
신성마법을 익힐 때와 같았다.
기술이 해금되는 것처럼, 맞닿은 곳에서부터 노움과 실프가 내 안에 들어왔다.
계약 같은 건 필요하지 않았다.
실프와 노움을 통해 할 수 있는 일들이 해금됐다는 걸 본능적으로 인지했다.
정령마법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실프의 봄바람]실프는 따뜻한 봄바람을 불게 할 수 있어요.
[노움의 땅속 보기]노움은 땅속을 볼 수 있어요.
이거다.
예상치 못한 능력에 나는 반색했다.
실프의 봄바람이 어떤 효용을 가져다 줄 지는 아직 모르지만, 노움은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땅 속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들이 많다.
특히 말리라는 가난한 열사의 땅에서 난 석유나 지하수, 금을 찾아내야 한다.
이 정령들은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당장 실험해보고 싶었다.
우선 텁텁한 공기를 털어내고 싶다는 생각에, 실프에게 봄바람을 부탁하자 반투명한 파란색 고양이가 입을 벌리고 바람을 내뿜었다.
“오빠, 레몽드 왕실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어서 올라가요. 여긴 지하라 좀 기분이 나빠서······ 어?”
불쾌했던 습한 공기 대신 따뜻하고 상쾌한 바람이 불었다.
공기가 통하지 않는 곳에 바람이라니. 공주의 앞머리가 날리는 것을 보고는 공주와 마법사 할아버지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았다.
실프와 노움은 이미 내 몸 속에 스며들어, 그들은 영문을 모른 채 눈을 깜박여야했다.
당황하는 두 사람에게 난 이 일을 내가 했음을 밝혔다.
“할아버지. 바람은 제가 불게 한 거예요.”
“응? 그게 무슨 소린가?”
“레몽드는 역시 제겐 행운의 땅이이에요. 전 방금 대지와 폭풍의 정령을 얻었어요.”
“저, 정령이요??”
할아버지와 안젤리나 공주는 내가 제국만 가지고 있다는 정령을 얻게 된 일에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그건 집무실로 올라가서 만난 펠리페 2세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게. 영상 통화로 이미 봤지만, 그래도 역시 얼굴을 직접 마주하게 되니 너무나 반갑군.”
“저 역시 아주 많이 반갑습니다. 그동안 레몽드에 꼭 와보고 싶었습니다.”
“혹시, 어깨 위의 그 고양이가 신수인가?”
“네. 어떻게 된 것인지는 저도 잘 모르지만, 나비가 신수인 백호의 현신은 맞는 것 같습니다.”
펠리페 2세는 나비의 전투 능력에 대해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는 당장 검증할 수 없는 것. 입맛을 다신 펠리페 2세는 나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이 작은 고양이가 백호라니 믿기지 않군.”
“레몽드에 처음 도착했을 땐 사람보다 더 커지지도 했는데, 솔직히 나비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나비 덕에 실프와 노움을 얻었습니다.”
펠리페 2세는 실프와 노움이라는 정령의 이름을 몰랐다.
정령과 계약했다는 말에 잠깐 놀라긴 했으나 봄바람을 불게 할 수 있고, 땅속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에 펠리페 2세는 시큰둥한 얼굴이었다.
당장 대규모의 농사와 전투를 진행하는 입장에선 다소 아쉽게 느껴질 법도 했다.
“겨우 바람이라니.”
“하지만, 아직 처음이니까요. 대지와 폭풍의 정령이라 했으니 시간이 지나면 정말 폭풍을 일으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 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군. 아. 상민 군. 같이 점심을 먹지.”
기술은 시공간을 초월한다.
펠리페 2세와는 처음 얼굴을 맞댔지만, 지난 몇 달 동안 꾸준히 한 통화 덕분인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면서 앞으로의 일을 상의했다.
박화영 작가와의 작업 때도 느낀 것이지만, 역시 직접 보고 하는 대화는 밀도가 달랐다. 수많은 정책이 튀어나왔다 사장되고, 미래에 대한 다양한 예측을 주고받았다.
펠리페 2세는 의외로 궁금한 게 많았다.
“왕국에서 자란 닭 말일세. 반응은 어떤가?”
“좋습니다. 축성한 닭보다는 못하지만, 닭을 사 먹으려고 줄까지 서는 형편입니다.”
“그 찜닭이라는 것 말이야. 아주 입맛을 당기더군. 간장을 만드는 비법을 알고 싶네.”
“찜닭에 쓰는 간장은 공장에서 생산된 것들입니다. 말리에서 하누아나의 삼촌이 수입절차를 위해 애쓰고 있으니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것입니다.”
반색한 펠리페 2세는 말리에도 관심이 많았다.
아무래도 삼각무역의 중요 축이어서일 것이다.
반란이 일어났고 아직 국제사회의 제재가 풀리지 않았다는 말에 안타까워하면서도, 펠리페 2세는 말리 쪽에 보낼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선물을요?”
“특별한 것은 아니네만, 모래로 가득한 땅이라니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마생목이네.”
“마생목이요?”
“마생목은······. 빌어먹을!”
펠리페 2세는 나무 이야기를 꺼내다 말고 갑자기 분통을 터뜨렸다.
다소 감정에 솔직하긴 해도 진중하던 군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마생목을 떠올리자마자 열이 뻗치는 일이 생각나서 말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던 것입니까?”
“제국 놈들 때문일세. 빌어먹을 놈들이야. 중신들의 말을 들어보면, 우리가 손해날 것은 없네만 정말 무례하고 무도한 놈들일세!”
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레몽드도 펠리페 2세도 독립적인 구석이 많다.
공주가 레몽드의 소식을 자주 물어오기도 하고, 안토니 왕자도 아버지나 내게 이런저런 자문을 구할 때가 많지만, 레몽드에서 추진하는 많은 일들 중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특히 제국과의 일은 내가 도울 수 없는 만큼, 펠리페 2세와도 초반을 제외하고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제국 놈들이 또 뭘 요구하는 겁니까?”
“도둑들일세. 끝도 없이 왕국에 콩과 닭을 요구하고 있다네.”
“이미 반 이상을 가져가지 않았습니까?”
“바보들이야. 제국은 우리에게 가져간 닭과 콩을 키우지 않고 있네.”
“네?”
“모두 먹어치웠다네. 그리고는 우리 걸 달라는 거지. 언제든 빼앗으면 된다는 게지!”
제국은 강성했지만, 그뿐이었다.
제국에게 있어 레몽드산 닭과 콩은 화장지와 비슷한 여파를 불러왔다고 했다.
화장지를 한 번 써보면, 화장지 없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이 고역이 되고 만다.
비슷하게, 레몽드에서 가져간 닭과 콩은 너무 맛이 좋았다.
입이 너무 많은 제국에서 키우려던 닭과 콩이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제국의 선택은 다시 한번 레몽드의 목을 죄는 것이었다.
“힘만 센 바보 강도떼들이야.”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거절해야지. 제국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게야.”
“네?”
“우리에게서 콩과 닭을 모두 징발해가면 그걸로 다시는 그 정도의 닭과 콩을 먹지 못한다는 걸 제국도 알고 있으니 말이야. 보여줄 것이 있네.”
펠리페 2세는 내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자신의 아공간 가방을 보여줬다.
내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큰 가방 속 공간엔 금과 보석들이 가득했다.
“굉장하네요. 제국에서 받은 것입니까?”
“그렇다네. 꽤나 벌었지. 말리라는 나라와 교역만 정상화될 수 있으면, 우리 레몽드도 분명 한 몫을 단단히 해낼 게야.”
“콩값으로 받으신 것입니까?”
“아닐세. 종이값으로 받아냈지. 제국엔 이미 우리가 만든 종이가 아니면 용변을 보지 못하는 귀족들이 셀 수 없이 많다네.”
닭과 콩 징발을 거절하면 어떻게 될지가 궁금했는데, 이야기가 엉뚱한 곳으로 진행됐다.
펠리페 2세는 자랑스레 레몽드에서 만든 화장지를 건넸다.
품질이 놀라웠다.
색이 새하얗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운 감촉과 쫀쫀함이 현대의 고급 화장지 못지 않았다.
“어떻게 만드신 것입니까?”
“여러 실험을 하고 있네. 다행히 운이 좋았어. 처음엔 여러 나무를 되는대로 쪼개고 끓여서 종이를 만들다가, 나무를 구별해 보는 것이 어떤가 해서 결국 이 나무를 찾아냈지.”
마수의 숲을 개간하면서 벌채된 베르푸라는 나무는 곧 화장지 나무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했다.
“화장지 나무를 찾아낸 이후에 또 다른 제조법을 알아냈네. 그냥 쪼개서 끓이는 것보다, 쪼갠 나무를 찬물에 일주일 이상 담가 뒀다가 찌는 편이 종이 제조에 유리하다는 것도 알아냈다네.”
“대단하십니다.”
“아! 아까 말한 마생목 말일세. 마생목 역시 마수의 숲에서 찾아낸 것이라네. 물이 거의 없는 곳에서도 자라는 나무지.”
펠리페 2세의 말은 놀라웠다.
펠리페 2세의 말에 따르면, 마생목은 판게모니아의 누머족이 사는 곳에서 자라는 나무였다. 양서류와 인간의 반인반수인 누머족에겐 습기가 필수였다.
마생목 숲이 자라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늪지가 생긴다고 했다. 사막화가 심각해져 가는 아프리카에 보물이 될만한 나무였다.
물론 모든 나라는 식물이나 동물의 통관을 까다롭게 관리한다. 유입된 동식물이 자국 환경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리의 사정은 좀 달랐다.
말리는 반쯤, 아니 70%는 죽어가고 있는 땅이다.
도곤 족은 이 나무의 존재를 알게 되면 제발 심어달라고 매달리려 할 것이다.
펠리페 2세가 내게 전해 준 묘목은 아직 어렸지만, 의미는 대단히 컸다.
오늘은 게이트만 안전하게 넘어갔다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세 개나 얻었다.
레몽드는 역시 좋은 곳이다.
말리에서 자라는 레몽드의 나무가 기대됐다.
반짝이는 눈으로 나라의 미래를 이야기하는 펠리페 2세를 앞에 두고, 나는 말리의 사람들이 딱 레몽드만큼만 자신의 발로 서서 함께 길을 걸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