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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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울수록 부족해지다.
프랑스어 소설 번역에 대한 반응은 이전과는 달랐다.
많은 교수들의 논문 번역 셔틀을 하며 학교에서 언어천재 김상민은 이미 어느 정도는 공인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나만큼은 아니어도 영어나 중국어, 일어의 원문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인문대 안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케이스이긴 했다.
인문대에 오는 사람들은 대개 수학과 물리 등 이과적 사고에는 젬병이지만, 언어능력만큼은 대단한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래서 이상한 자부심이 모두의 내부에 존재했다.
취업의 기회가 부족한 어문계열 학생이라는 것이 부끄러우면서도 동시에 월등히 높은 인문학적 소양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이다.
문화적 소양이 없는 사람은 대부분 철저히 무시당했다.
로맹 가리라는 이름을 듣고 이라는 책을 떠올릴 수 있어야 어문학과 여학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논문 번역과는 달랐다.
논문 번역이 그저 외국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소설의 번역은 인문대생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문화적 산업의 심장부에서 활약하는 작가의 영역이어서였다.
한국에도 알려진 세계적 대작가 아들의 프랑스어 소설을 ‘돈을 받고’ 번역하는 사람이 자신도 잘 아는 대학 선배라는 사실만으로도 자기 급이 올라가는 느낌일 것이다.
바로 내게 극찬세례가 퍼부어졌다.
내 위상이 더 높이 올라야 자기 가치가 더 올라갈 수 있었다.
“대박. 오빠, 대단하네요. 프랑스어도 할 수 있었어요?”
“어. 책으로 배웠지. 발음이 어렵기도 하고 주위에 대화를 나눌만한 사람도 없어서 회화는 안 되는데, 번역은 다르니까.”
“오빠 저 로맹 가리 소설 너무 좋아하거든요. 아들 작가분 소설 번역하면 저도 보여주세요.”
“저도요.”
여기저기서 자신도 읽고 싶다는 요청이 이어졌다.
어문계열 여학생들 중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아직 출판도 되지 않은 외국 소설의 초고를 먼저 읽는 것은 책의 내용과는 별개로 인문학과 대학생의 허영을 채울 수 있는 매우 좋은 소재였다.
“오빠, 번역하는 것 좀 보여주시면 안 되나요?”
“그걸 뭐······.”
“아니에요. 궁금해서 그래요. 소설도 논문처럼 그렇게 번역하시는 거예요?”
그간 내 작업방식은 인문대 안에서 큰 화제였다.
난 워드 프로세서의 화면을 세로로 2분할해서 한쪽에 띄운 원문을 보며, 그저 타이핑하듯 번역했다.
논문이라는 전문 영역을 번역하면서도 전혀 사전을 찾지 않는 내 번역작업은 꽤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부추김에 못이기는 척 노트북을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일지라도, 생은 사람들로 하여금 눈앞의 일들에 매몰되게 하느니.
항상 우연처럼 시작되는 운명은···」
“와아··· 운명은 우연처럼.”
“선배는 원문이 그냥 한국어처럼 읽혀요?”
후배들 몇이 내가 작업한 번역물을 그대로 따라 읽다가 유려한 내 문장에 감탄했다.
“야. 김상민, 넌 그런데 왜 이딴 걸 할 수 있다는 걸 계속 숨기고 살았냐?”
시비조의 목소리다.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봤더니, 키가 크지만 마른 체형의 안경을 낀 전형적인 인문대 남자처럼 생긴 사람이 서 있었다.
최악이다.
눈가가 절로 찡그려졌다.
신하중이다.
나와는 동기였지만, 거의 대화가 없었던 사람이다.
재수해서 한 살이 많은 것도 껄끄러웠지만, 무슨 생각에선지 자원해서 해병대를 다녀오더니 일생의 자랑이 해병대가 된 특이한 사람이었다.
누구를 보던 첫 질문은 ‘너 그래서 군대는 어디를 나왔냐?’였다.
나 역시 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전방인 포천에서 힘든 군생활을 했다는 내게, 군캉스를 다녀왔구나라며 해병대의 군생활을 늘어놓는 그를 난 꽤 혐오하고 있었다.
‘나와는 절대로 맞지 않은 사람.’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저런 스타일은 무시하면 무시한다고 발광한다.
뭐 신하중이 처음이었지만, 언제든 이런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세미나 이후 여자 후배들의 화제에 오르기 시작하며, 난 트집잡힐 것을 각오하고 있었다.
말은 나올 것이지만 그래봤자 한 줌 밖에 되지 않는 인문대 남학생들.
그냥 주워 넘기면 그만이다.
희택이에게 말한 것처럼, 평소에 외국어를 쓸 기회가 없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뭔 개소리야? 네가 생각해도 네 말이 이상하지 않아? 그렇게 꽃밭에 둘러싸여서 하는 말치고는 변명에 구차하지 않아?”
“선배님, 상민 오빠에게 왜 그러세요? 술 취했어요?”
신하중의 개꼬장에 여자 후배들은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게다가 주위에 여자들이 많으면, 변명이 더 특별하게 논리적이기라도 해야한단 말인가? 진짜 개소리를 하는 건 저쪽이었다.
노골적으로 싫다는 혐오의 눈빛을 보냈지만 해병대 지상주의자는 트집을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난 뛰어난 능력에 비해 어느 정도는 무시당하고 있었다.
능력을 보인 내가 혁준 선배처럼 난봉꾼 의자왕 놀이 대신 그저 여태까지처럼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걸 선택하는 걸 보고 ‘똑똑하지만 소심하고 자신감이 없는 찐따 호구’정도로 치부하는 시선이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불쾌한 시선을 새로 산 차와 프랑스어가 바꿨는데.
“이것도 다 사기치는 거 아니야? 네깟게 무슨.”
눈앞에 뻔히 보이는 증거를 무시하고, 여자 후배들이 감싸는 나를 비웃듯 바라보는 신하중은 정말 꼴사나웠다.
지잉.
마침 전화가 와서 받았다.
신하중은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날 선 분위기가 슬슬 불편하던 참이어서 전화가 반가웠다. 누구에게 온 것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그냥 받았다.
“여보세··· 응?”
안젤리나 공주였다.
공주는 뭔가 잔뜩 흥분하고 있었다.
‘오빠, 저예요’로 시작한 통화는 인사할 틈도 없이 할아버지에게 넘겨졌다.
공주는 레몽드와 나 사이의 연락책을 맡고 있었다.
아직까진 공주보다 할아버지가 훨씬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난 할아버지의 핸드폰을 개통하지 않았다.
비용 때문이 아니라, 비밀 유지 때문이었다.
일반 대학생인 내가 여러 개의 전화를 등록해서 쓰는 것도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레몽드와 나의 인연은 내겐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비밀이었다.
그만큼 주의해야 할 일이 많았다.
“날세.”
“네, 무슨 일이세요?”
그 순간, 눈앞에서 날 빤히 바라보는 여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주변에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급히 대화를 정리했다.
“할아버지. 제가 조금 있다가 전화해도 될까요? 지금 혼자 있는 게 아니라서요.”
“아아. 알겠네. 기다리겠네, 엄청나게 기쁜 일이 생겼다네.”
뭐지?
뭔데 저렇게 할아버지가 흥분했을까를 생각하다가, 난 먼저 이 이상한 상황을 또다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말았다.
학교를 때려치울까?
자꾸 좋아하지도 않는 거짓말과 변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몹시 짜증났다.
“오빠, 지금 누구랑 통화하신 거예요?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인데요?”
딱히 떠오르는 변명거리가 없었다.
핸드폰 가게 사장님께 했던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투르크메니스탄에 현지인과 결혼한 고모가 있고, 내가 중고등학교 때 어학연수 겸 그 나라를 다녔다는 말에 정말 여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반응이 생겼다.
그제야 비밀이 풀렸다는 표정들이었다.
신하중이 무어라 말을 이으려 했지만, 난 바로 가방을 정리하고 밖으로 나갔다.
그 이후, 어렸을 때부터 쭉 외국을 다녔다는 난 시골 고등학교에서 그나마 용케 공부를 잘해 대전의 국립대에 진학한 고학생이 아니라, 정체를 숨기고 취미로 대학을 다닐 수 있는 시골 유력가의 아들 같은 존재가 돼 버렸다.
* * *
차를 산 건 베스트 초이스였다.
운전석에 타서 문을 닫은 것만으로 복잡한 시선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차 안은 나만의 공간이었고, 난 비로소 안심하고 할아버지에게 전화할 수 있었다.
역시나 공주 대신 전화를 받은 할아버지는 공주처럼 두서없이 흥분해서 말을 쏟아냈다.
왜 이렇게 할아버지가 흥분한 것인지 할아버지의 말을 모두 듣고 나서 알게 됐다.
그럴만한 일이었다.
레몽드의 마탑은 마나석을 이용해서 전기를 대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진짜요?”
“틀림없네. 이미 모두 확인했어. 자네가 준 그 선풍기도 충전했고, 전화기도 충전에 성공했다네.”
C타입 케이블을 어떻게 연결하는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유선 충전이 아니라 마법진을 이용한 무선 충전 방식이었다.
할아버지는 레몽드가 만든 충전방식을 자랑했다.
“효율이 좋아. 최하급 마나석을 썼는데도 전하의 파워뱅크를 여러 차례 충전할 수 있었네. 충전시간도 20분이면 충분했어.”
더 놀랐다.
원래 파워뱅크의 완충까지는 고속충전 모드로도 6시간이 걸렸다.
전원 문제가 해결된다면 정말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공주에게 한글과 워드 프로세서를 가르치며 공주가 특히 신기해했던 물건들이 먼저 떠올랐다.
세탁기와 냉장고, 에어컨과 형광등 같은 물건들이었다.
역시 그중에서 제일 먼저 설치할 수 있는 건 형광등이었다.
전기가 해결됐다고 해도, 상하수도 시설이 필요한 세탁기는 설치할 수 없다.
실외기가 필요한 에어컨도 마찬가지다.
형광등의 설치는 레몽드의 밤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할아버지는 형광등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이었다.
“밤이 밝으면 좋으나, 당장은 설치할 수 있는 곳이 없네.”
“네? 그것이 무슨 소리십니까?”
“아직 왕국은 시간이 필요하네. 제국의 허락 없이 판게모니아의 밤을 밝히는 것은 무리일세. 아마 몽땅 빼앗길 걸세.”
“아······.”
할아버지의 말에 공감했다.
비밀의 유지는 너무 중요했다.
나 역시 포션의 뛰어난 성능에도 불과하고, 아직 판로를 찾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서 났느냐?’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해서였다.
할아버지도 내 고충에 공감했다.
“자네도 그런 사정이 있었군. 그렇지 않아도 다들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네. 왜 포션을 가져다줬는데 반응이 없을까 하고 말이야.”
“묻지 그러셨어요?”
“레몽드의 앞날이 모두 자네에게 달려 있네. 그리고 양심이 있지, 어떻게 지금껏 그 어떤 것도 속이지 않는 자네에게 왜 포션을 팔지 못하냐고 추궁하듯 따져 물을 수 있겠나?”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같은 처지에 처한 나와 할아버지는 비밀을 어떻게 유지할까라는 같은 고민을 하는 서로를 깊게 이해했다.
대책이 없을 땐,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해야 한다.
난 할아버지에게 그 마법진을 내 방에도 하나 설치해 주길 부탁했다.
“자네의 방에 말인가?”
“네. 일단 마법진으로 가동 가능한 물건들이 어떤 것들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확실히 그렇겠군. 자금의 한계가 있는데, 확인도 하지 않고 사들일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 외에도 할아버지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먼저, 내 예상과 다르게 레몽드에 번역 외주를 맡기는 일은 큰돈이 되지 못했다.
컴퓨터 작업에 익숙해진 공주가 있어서 번역작업을 진행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애초에 내가 너무 많은 작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일을 해내는 것도 의혹의 대상이 되는 길이다.
1억 5천을 넘었던 자금도 조금씩 줄기 시작했다.
차를 사고, 번역작업을 위해 다수의 파워뱅크와 노트북을 구매해서였다.
더구나 점점 레몽드 왕실에 들어가는 물품의 양과 종류가 늘어가고 있었다.
화장지나 비누, 샴푸나 수건 같은 것은 한번 써보면, 계속 사용해야 하는 물건들이다.
처음엔 왕의 직계가족들만 사용했던 현대의 물품들은 시간이 갈수록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쇼핑몰에 익숙해진 공주 때문에, 물건들이 내가 말했던 것처럼 비싸거나 구매가 어렵지 않다는 것이 알려졌다.
공주도 더는 미안해하지 않았다.
번역 아르바이트 비라는 ‘자기 돈’ 때문이었다.
공주는 그동안 비싸서 사지 못했다는 차를 산 내 경제력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버는 돈보다 나가는 돈이 훨씬 커졌다.
물론 왕실은 철없는 공주가 아니다.
레몽드 왕실에서는 내가 좋은 사람이지만, 공주가 말하는 것처럼 무엇이든 사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를 통해 지금 사정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왕실 역시 화장지나 치킨, 빙수를 포기하지도 못했다.
왕실도, 나도 전보다 사정이 훨씬 나아졌지만, 사정이 좋아질수록 더욱 많은 돈이 필요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나는 우려하는 할아버지를 다독였다.
“조금 더 기다려 보시죠. 그래도 일단 레몽드에서 마법진을 만든 것도, 제가 조금씩 번역가로 이름을 얻고 있는 것도 너무나 좋은 일이긴 하니까요.”
“그렇긴 하네. 아! 종이를 만들었다네. 자네의 세상에서 가져오는 종이와 비교하면 품질이 형편없이 떨어지지만,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의 종이를 만들 수 있어서 모두 기뻐하고 있네.”
아황산수소칼슘이 없어도 종이를 만드는 것은 가능했다.
다행이다.
할아버지와 난 좀 더 시간의 여유를 가지며, 여러 일들을 도모해 보기로 했고.
지금 상황에서 가장 도움이 될 물품을 선별해냈다.
우리가 종이 다음에 시작한 것은, 콩 농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