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suck at the gate alone RAW novel - Chapter 91
91화. 레몽드랜드
펠리페 2세와 안토니 왕자는 희택이를 따뜻하게 맞았다.
점심시간이 이미 지나서, 차를 함께 마시며 서로에게 서로를 소개했다.
“기다리고 있었네. 상민이의 친구라지?”
“네. 전하.”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군.”
“네?”
펠리페 2세는 전혀 생각해보지 않은 말을 꺼냈다.
“사실, 난 좀 의아해하고 있었다네. 자넨 우리 레몽드와 말리의 은인이자 친구가 아닌가.”
“맞습니다.”
“그런데, 왜 자넨 혼자일까 늘 고민이었어. 물론 자네 부친은 엄청 좋은 분이지만, 뭔가 우리 레몽드가 미덥지 못한가 싶었다네.”
“맞습니다. 형에게 한국이라는 나라가 바늘도 꽂히지 않을 만큼 빈틈없는 나라라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혹시 우리 레몽드가 부족하여 온전히 안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부모님을 동참시켰다는 점에서 난 확실한 믿음을 줬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국가 단위에서 일을 진행하는 말리와 레몽드에 비해서 삼각축 중 하나인 내가,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이라는 것은 역시 많이 이상하긴 했다.
레몽드 입장에서 보면, 언제든 발을 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어떻게 사과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희택이와 눈이 마주쳤다.
사과해야할 대상은 레몽드뿐만이 아니었다.
그간, 희택이도 종종 내 결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비밀을 유지하는 것은 내 생각과는 다르게 모두를 서운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처음엔 당황했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 안전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난 희택이와 펠리페 2세 앞에서 그간 있었던 일들과 그에 따른 내 마음을 최대한 솔직하고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8개월 전 마법사 할아버지가 처음 제 방에 오시고, 과자와 금을 바꾸는 거래를 시작했을 땐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갑자기 큰 행운이 생겼고, 그걸 최대한 잘 활용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군. 생각해보니 겨우 8개월 전이야. 몇 년이 지난 것 같군.”
“하지만 정말 많은 일이 있었죠. 상민이 형 덕에 우리 레몽드는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트롬을 팔아 각종 필요한 물품들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전 서로 도움이 되는 거래를 잘하자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번역 반지로 제 삶이 변했습니다.”
난 번역 반지로 외국어 천재에 천재 번역가가 돼 버린 후, 내 안에 생긴 비겁한 마음을 고백했다.
“제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번역 일로 돈을 벌어서 레몽드를 돕고 있다는 마음 속의 도피처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꿈꾸던 작가가 된 게 너무 좋아서 저도 모르게 마음 속에 방파제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창피함을 무릅쓰고 한 고백이어서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레몽드 사람들과 희택이가 받아들이는 반응이 달랐다.
레몽드 사람들은 ‘뭘 그런 걸 가지고’ 하며 이해하지 못했지만, 희택이는 달랐다.
희택이는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희택 군. 자네는 지금 상민이 말이 이해가 가는 모양이군.”
“네. 상민이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전 상민이 일을 도우면서, 제 나이로는 말도 되지 않는 월급을 받고 있습니다. 저 역시 제 능력이 그만한 돈을 받을 정도로 뛰어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도 상민이를 진짜 제 친구이자 가족이라고 여기는 것으로 제 몫을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허허. 신기한 일이군. 역시. 친구라 그런가. 두 사람 모두 엄청나게 솔직하군. 그러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희택이의 공감을 끌어낸 후에는 그 후의 일을 설명하는 게 좀 더 쉬워졌다.
난 국정에 최선을 다하는 펠리페 2세도, 우직한 의지로 고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안토니 왕자도 더는 남이 아닌 가족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우리도 그렇다네. 나도 자넬 큰아들처럼 여기고 있다네.”
“그럼 희택이도 작은 아들로 끼워주십시오. 제가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희택이를 레몽드로 데려온 건 레몽드와 제가 만들어 나갈 아름다운 세상에서 희택이와 평생 함께하고 싶어서니까요.”
“그렇게 하겠네. 희택 군. 자네도 나를 삼촌이나 큰아비로 여기게.”
희택이는 다음엔 자기 여자친구인 미정이를 데려오겠다는 말과 함께 일어섰다.
그때, 안토니 왕자의 눈빛이 빛나는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빠서 나란 황녀와의 연애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듣지 못했다.
모두가 짝이 있다.
문득 안젤리나 공주가 떠올랐다.
첫 만남은 어리고 철없게만 보였던 공주다. 너무 어린 안젤리나 공주를 여자로 보긴 어려웠지만, 어느 순간부터 계속 신경이 쓰였다.
마음이 울렁거렸다.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희택이는 미정이를 데려오겠다고 했다.
미정이를 데리러 희택이가 방을 나서고, 난 바로 안젤리나 공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어쩐 일?”
“넌 어딘데?”
“나. 식당. 하누아나 오빠랑 아줌마 일 도와주고 있어.”
“잠깐 올래?”
“왜요?”
“희택이랑 레몽드 왕실에 다녀왔어.”
“대박. 진짜요?”
“응. 미정이에게도 말하려고 하는데, 너도 있으면 좋잖아. 그리고 소풍 갈 준비도 해야 하고.”
“소풍이요?”
“어. 모두 함께 동물원에 가자. 약속했잖아.”
“3분만 기다려요. 나 바로 갈게요.”
뛸 듯이 기뻐하는 안젤리나 공주가 귀여웠다.
* * *
소풍의 멤버는 꽤 많았다.
나와 안젤리나 공주, 희택이와 미정이 말고도 하누아나와 우리 부모님이 함께 가기로 하셨다.
거기에 안젤리나 공주와 부쩍 친해진 짜냥이가 합류했다.
말리에서 무역회사의 지원을 위해 입국한 도곤족 출신 외교부 공무원도 함께 가기로 해서 차를 2대나 가져가야 했다.
희택이 차에 나와 안젤리나 공주, 미정이가 탔고, 하누아나의 차에 우리 부모님과 말리 외교부 직원이 탔다.
아버지와 엄마도 통역을 위한 목걸이를 착용하고 계셔서 대화에 큰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거의 매일 식당에 와서 도움을 주는 하누아나는 우리 부모님껜 아들이나 조카처럼 친숙했다.
즐거운 하루였다.
대전에서 용인까지는 2시간 정도가 걸릴 정도로 멀었지만, 희택이와 내가 번갈아가며 운전해서 그다지 피곤하지는 않았다.
주차장에서 짜냥이를 기다렸다가 만났는데, 짜냥이는 촬영팀을 대동하고 왔다.
“촬영팀은 왜요?”
“저도 그냥 오고 싶었는데요. 촬영 요청이 많아서요.”
“네?”
“안젤리나가 입국하면서 동물원에 가보고 싶어했잖아요. 안젤리나가 동물원을 구경하는 걸 보고 싶은 사람이 많아요.”
“그래요? 그래도 그건 다음에 해요.”
“네?”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다음에 찍으면 돼요. 오늘은 그냥 구경하고 놀아요. PD님도요.”
난 머뭇거리는 촬영진들에게 각자 자유이용권을 끊어주며 등을 떠밀었다.
오늘은 간만에 휴식을 취하는 날, 아무리 자유롭게 있으라해도 촬영 등으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오빠, 이거 봐바요!”
“어머 여보. 새가 참 예뻐요.”
동물원이라니.
어린아이가 없는 대부대가 구경하기에는 좀 이상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동물원은 꽤 흥미로운 장소였다.
사파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갇혀 있는 것이 답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각 동물의 서식환경에 맞게 잘 꾸며진 공간은 아기자기하고 귀여웠다.
하누아나는 말리엔 사자와 기린, 코키리가 뛰어노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바마코 동물원이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프레리독의 귀여움에 정신을 빼앗긴 여자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했다.
“안젤리나야. 내가 네 덕에 이런 구경을 다 하네.”
동물원 구경을 가장 좋아한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추가금을 내고 새에게 먹이를 주는 체험을 2번이나 반복하기도 하셨다. 이런 걸 좋아하시는 줄 몰랐는데, 앞으로 종종 모시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원은 즐거웠지만, 전반적으로 비쌌다.
대부대가 이동하다보니 간식을 하나씩 사먹는데도 꽤 큰 비용이 들었다.
우리 일행 중에선 먹방 너튜버인 짜냥이가 있었고, 하누아나도 먹는 걸로는 누구에게 져 본 적이 없다며 승부욕을 부리는 바람에 5천 원도 넘는 닭꼬치를 30만 원어치도 더 사먹어야 했다.
“상민아.”
“어?”
“동물원 돌아다니다가 생각을 좀 했는데, 제국에 이런 거 하나 여는 건 어떠냐?”
“어?”
“네 목적이 그런 거잖아. 제국을 흥청망청한 그런 분위기로 몰아가는 거.”
“동물원을 내자고?”
“아니. 게임센터를 내자고.”
희택이는 제국에 도박장을 내자고 했다.
“도박장?”
“도박장이지만, 아이들도 찾을 수 있는 곳이지. 왜 지역 축제 같은데 보면 야시장 있잖아. 농구 골대에 공 집어넣거나, 사격으로 인형 떨어뜨리고 하는 것들.”
“그걸 해서 뭘 하게?”
“엄청나게 흥행할 거야. 장기가 보급됐으니까, 기원처럼 한쪽엔 귀족 성인들을 대상으로 장기기원을 만들고, 다른 쪽은 캔깡통 쓰러트리기나 볼링 같은 승부욕을 자극하면서도 재밌는 것들로 구성한 다음에 거기서 치킨이랑 감자튀김을 파는 거야. 엄청나게 비싼 값에.”
“그러니까 그걸 왜 하냐고?”
“돈을 버는 것도 버는 것이지만, 게임은 고급문화야. 레몽드를 문화선진국으로 이미지메이킹 하는 거지.”
문화선진국이라. 흥미가 돋았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희택이가 말한 것들은 포장하기가 좋다.
담배나 술에 쩌들어 골패를 쥐는 도박장의 이미지가 아니고, 다시 없을 만큼 즐거운 한때를 보낼 수 있는 곳에 레몽드의 이름을 다는 것이다.
물론.
제국의 돈을 빨아먹는 도박장의 본질은 그대로겠지만.
“좋네.”
“그렇지?”
“둘 다 해야겠다.”
“응?”
“제국에도 만들고, 레몽드에도 만들어야겠어. 제국엔 비싼 값을 내고 즐겨야 하는 캐시카우 사업장을, 레몽드엔 어떤 목표를 달성하면 나라에서 선물로 주는 무료 놀이공원을 만들어야겠어.”
* * *
레몽드랜드는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설득을 위해 희택이와 내가 준비해 간 게임은 캔깡통을 피라미드 모양으로 쌓아놓은 뒤, 공을 던져 쓰러뜨리는 게임과 농구, 동전 쌓기와 장난감 활로 인형을 맞추는 게임이었다.
일부러 약간 허술하게 만든 활과 무게중심이 엉망인 공을 준비해, 단순히 보고 덤볐다간 실패하도록 했는데.
펠리페 2세는 물론 중신들은 모두 우리가 가져간 게임들에 푹 빠져들었다.
승부욕과 허세는 어디나 다 있는 남자들의 특성이었다.
“즐겁구나. 이런 단순한 것이 이렇게 재미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레몽드랜드에서 팔게 될 음식들도 준비해 놓으라 했으니, 맛을 보시지요.”
호떡이나 붕어빵, 핫바와 핫도그 같은 처음 선 보이는 길거리 간식들 역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맛있구나.”
“괜찮지요? 전하. 왕궁과 떨어진 곳에 대규모 놀이시설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왕궁과 떨어진 곳?”
“네. 제국의 레몽드랜드에서는 즐길 수 없는 좀 더 다양한 놀이시설과 고급음식을 즐길 수 있으면서, 도박성이 매우 높은 기계들을 설치하는 놀이시설을 빙자한 도박장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하.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맛배기로 제국 귀족들을 홀린 다음, 레몽드로 불러들여서 껍질을 홀라당 벗겨먹자는 것이 아니냐?”
다음날 난 안토니 왕자와 함께 제국의 황궁을 찾았다. 닭의 공출이 있는 날도 아닌데,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황제는 매우 반갑게 맞아들였다.
“오늘은 어이하여 온 것이냐?”
“맛있는 음식이 개발됐사옵니다. 폐하께도 맛을 선보이고 싶고, 제안드릴 것도 있어서 찾아왔사옵니다.”
“그래? 무엇이냐?”
황제는 감자튀김과 케첩의 콜라보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황금빛 바삭하고 고소한 감자 튀김 위에 짜고 시큼한 케첩이 황제의 혀를 무참하게 농락했다.
“훌륭하다. 감자를 채 썰어 튀긴 것만으로 이런 맛이 나다니. 그리고 이 소스는 무엇이냐? 굉장한 맛이다.”
“신개발품이옵니다.”
“역시 훌륭하다. 그래, 사이먼. 제안할 것이 있다더니 무엇이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나와 안토니 왕자가 준비해 간 놀이를 하나씩 풀어놓을 때마다 황제는 직접 몸을 움직여서 즐긴 뒤, 단순하지만 절묘한 재미에 감탄했다.
레몽드랜드의 신화는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