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t to Be an Extra RAW novel - Chapter (101)
101화 21. 인생 10회 차는 황성에 간다 (5)
나라를 구하기 위해 되돌아왔던 칸나의 영혼은 여행을 떠났다.
영혼이 떠나고, 육신만 남은 칸나의 입에서 공허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베르크는 망했어.”
이전보다 더 맛이 간 모습에 다른 이들은 고개를 저었다.
“망가졌네.”
“망가졌어.”
“안 망가지면 이상하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각오를 다지고 나간 첫 경기에서 엘프를 만났으니까.
그것도 그냥 엘프가 아니었다.
“어떻게 첫판부터 500년 고인물을 만나냐.”
세상 밖으로 나오는 엘프는 대부분 젊은 편이다.
인간의 나이로는 백 살이 가볍게 넘지만, 엘프 기준으로는 아직 어린 나이.
그렇기에 갑자기 튀어나오는 엘프의 나이는 1~200살 정도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정도면 세상이 버린 수준인데.”
왠지 모르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르윈조차 500년 된 엘프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하, 하하.”
르윈의 한마디에 칸나의 웃음이 더욱 거세졌다.
“도련님!”
“아니, 이건 어쩔 수 없잖아.”
“…….”
데이지조차 어찌하지 못하는 억까의 현장이었다.
이 정도면 세상이 칸나에게 베르크가 망했다고 속삭이는 것은 아닐까.
그만큼 예선 1차전에서 만난 엘프는 자연재해 그 이상의 위엄을 느끼게 만들었다.
나름 분전을 하려고 발악한 칸나였지만, 처참하게 패배하고 말았다.
“괜찮다.”
갑작스러운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이번 작전을 계획한 이, 루테스.
“역시 선배야. 다음 플랜이 준비되어 있었어!”
르윈의 감탄에 칸나의 두 눈에 희망의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존재하는 것인가!
그런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루테스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망할 거, 어중간하게 망하는 것보다는 첫 번째에 망하는 게 낫지.”
그러나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희망의 말이 아니었다.
“…….”
“포기는 빠를수록 좋지 않나?”
어차피 질 거, 괜히 희망을 가지고 개고생을 하다가 지는 것보다는 그냥 빠르고 깔끔하게 지는 게 낫다는 말이었다.
“역시 베르크는 망했어.”
사실 이미 역적들에게 왕실이 넘어간 것은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칸나였다.
“뭐, 이럴 것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었는데.”
그런 칸나를 보며 르윈은 품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었다.
“도련님.”
“왜?”
“그건 뭔가요?”
어쩐지 많이 본 것 같은 종이 한 장에 하인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출전권. 하나 더 받았어.”
중요 아카데미에 뿌리듯, 중요 가문에도 뿌려지는 출전권이 존재했고 르윈은 형에게 부탁해 드라이르프 가문의 출전권 하나를 미리 받아 온 상태였다.
“그거 많다고 출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출전권이 있다고 계속 참가를 할 수 있다면, 결국 가진 자는 계속 도전을 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가장 약했던 왕국에서, 대륙 최고의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기념하는 것이기도 한 건국제 행사에서 그런 행위가 인정될 리 없었고.
“누구에게나 기회는 딱 한 번인 건 아시죠?”
그 규칙은 황족이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고 있다니까.”
르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두 번 나갈 수 있다고 해도 출전권을 칸나에게 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1차전에서 패배한 사람에게 또 줘 봤자지.”
“컥.”
1차전, 패배.
그 두 단어에 칸나의 몸이 한 대 맞은 것처럼 꺾였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데, 저 인간은 이미 마음은 물론 영혼까지 꺾였잖아.”
그런 상대에게 주어 봤자 티켓만 아까운 상황이었다.
“그럼 혹시 저희에게.”
“1차전 탈락자 한 명, 16강 탈락자가 두 명인데?”
“큭.”
1차전, 패배.
그 단어가 누구를 뜻하는 것인지를 알기에, 칸나만큼은 아니지만 데이지 또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도 아카데미 예선이잖아. 여기는 본선이라고.”
최소 베르샤 아카데미에서 4강엔 오른 이들이 참가하는 것이 본선이다.
황실 아카데미나 드라이르프라 출전권을 남에게 양도할 티켓이 남아 있는 거지, 베르샤 아카데미의 총학생회장이 출전권을 사적으로 누군가에게 넘긴다면 바로 탄핵이 진행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아카데미 출전도, 대회 출전으로 인정되고.”
그렇기에 칸나는 물론, 세 명의 시종들 역시 출전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설마…….”
데이지와 예리엘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반쯤 영혼이 나가 있던 칸나의 눈빛 역시 살아났다.
“뭐, 왜? 안 해!”
그리고 그 시선을 받은 루테스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릴 때.
“선배님 보낼 생각 아닌데?”
“네? 그럼 누가 나가요?”
“나.”
그에 루테스에게 모였던 시선이 다시 르윈에게로 향하였다.
“도련님이요?”
예상치 못한 르윈의 출전 선언에 데이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 억까당하는 동료로서, 이번 한 번만 도와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주변의 경악을 무시한 채, 르윈은 칸나를 보며 웃을 뿐이었다.
***
르윈 디 드라이르프는 강한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데이지는 쉽게 할 수 있었다.
“강하죠.”
적어도 데이지나 예리엘, 하인스가 평가할 수 없는 강자는 맞는다.
“우승은?”
“그건 모릅니다.”
하지만 우승을 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확신은 할 수 없었다.
데이지를 포함한 셋의 실력이 대륙 최고인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랬다면 지금쯤 아카데미에서 대회를 치르고 있을 테니까.’
본인들의 실력은 냉정하게 평가해서 나쁘지 않다, 괜찮은 편이다, 정도의 수준이었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이 많고, 그들 중에는 르윈보다도 강한 이가 있을 수 있었다.
“거기에 이곳은 아카데미보다 변수가 많으니까요.”
아무리 연령 제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대륙 전역에서 사람이 모이는 대회였다.
“기초 교육 과정을 밟는 나이임에도 뚜렷한 검기를 내뿜는 괴물들도 있다고 들었으니까요.”
칸나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기에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렇죠.”
애초에 칸나 본인조차 자신 있게 나갔다가 인생 500년 차 고인물에게 당하지 않았던가!
“시작한다.”
경기가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등장한 드라이르프의 이름에 관객들이 놀란다.
“여기까지는 베르크 왕세자랑 비슷한 시나리오인데.”
다행인 점은 나이 제한이 있는 대회였기에 500년 고인물 엘프 같은 것이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점이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일이죠.”
세계는 넓고, 기인은 많다.
간혹 옛 용사의 유산을 얻었다는 자가 나타나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는 일이 한두 번이었던가!
“다행히 평범한 사람이네요.”
“저 가문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텐데.”
상대는 나름 제국에서 인지도가 있는 무가 출신이었다.
“이곳에 있는 사람 중 유명하지 않은 가문이 많을까요?”
“그건 그렇지.”
“오히려 유명하지 않거나, 존재 자체를 모르던 사람이 더 위험합니다.”
그러나 적당히 유명한 가문의, 적당히 유명한 사람은 위험 요소가 아니다.
“그리고 드라이르프보다 이름값이 높은 곳은 없으니까요.”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었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무력을 증명하는 자리에서는 라인하르트도 드라이르프의 상대는 되지 못했으니까.
“그러니 1차전에서 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확실해? 저 녀석이면 일부러 질 수 있는데.”
“그랬다면 애초에 시작조차 안 했을 겁니다.”
“누나, 시작한다.”
하인스의 말에 대화를 나누던 데이지와 루테스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경기장을 지켜보았다.
“응?”
“어.”
그리고 시작하자 보이는 것은, 영롱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형상.
일그러지지 않고, 규칙적인 형상을 유지하는 그것은 분명한 검기였고.
“괴물은 쟤였네?”
그것을 뿜어내는 르윈의 모습에 루테스의 입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승자, 르윈 디 드라이르프!”
심판의 목소리와 함께 관중의 환호성이 흘러나왔다.
대충 역시 드라이르프다, 제국의 미래는 밝다, 같은 소리였다.
“애들한테 미안하네.”
칸나가 500년 산 고인물에게 억까를 당했다면, 이쪽은 인생 10회 차 고인물에게 억까를 당했다.
세상 억울하겠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선배님이 의욕을 가지고 짠 계획이 시작부터 망했는데.
사건의 주동자이지만, 여태까지 방관만 한 책임이 있으니 이 정도는 해 주어도 괜찮을 것이다.
“선배하고 대충 약속이 된 것도 있기도 하고.”
루테스가 협조만 해 준다면 나중의 일에 도움이 될 일이다.
그렇기에 예정에도 없던 활약을 펼친 르윈은 검을 집어넣고 대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2차전, 3차전처럼 기권해 주면 모두가 편한데.”
남은 것은 5차전.
그것을 통과하면 오늘 하루에 펼쳐지는 대회는 끝이 난다.
“땅덩어리가 크니, 경기 일정이 너무 빡빡해.”
본래 검술 대회는 하루 한 경기가 보통이다.
체력은 물론 마력, 정신력까지 모두 소모하기에 비슷한 실력자를 만나면 하루 한 경기만으로 모든 힘이 소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국제 축제 기간에 최대한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야 하기에 특정 기간에 몰아서 진행을 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하여 대진 변수로 우승 후보가 탈락하는 일도 종종 벌어질 정도였다.
물론, 르윈에게 변수가 생길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귀찮은 건 귀찮은 거였다.
“옛날에는 이런 거 많이 했는데.”
용사 시절, 한 사람의 인재가 급했기에 이런 대회를 돌아다니면서 쓸 만하다 싶은 사람들을 모으고 다녔다.
“그때는 재미있었는데.”
나름 사람을 가르치는 것에 재미가 들려, 나중에 선생이나 교수 같은 직업을 가져도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 꿈이 이루어진 적은 없었지만.
“진짜 잘 가르칠 자신 있는데.”
아쉽게도 이번 생에서는 기회가 없을 수 있겠으나, 만약 모든 일이 끝나고, 마왕 새끼가 마족들을 데리고 쳐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런 직업들을 선택할지도 몰랐다.
“그런데 다 어디 갔나?”
대기실 쪽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전부 화장실에 갔을 리는 없으니, 경기가 다 끝났다고 착각하고 밖에서 기다리는 것일까.
“아직 한 경기 남았는데.”
데이지가 착각한 것일까.
평소라면 그러지 않겠으나, 하루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러니 이런 실수를 할 수도 있을 터였다.
“진짜 그럴까?”
주변을 둘러보는 르윈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그런 실수를 할까.
당연히 할 수 있다.
또래 애들보다 성숙할 뿐, 데이지 또한 이제 10대의 소녀일 뿐이다.
그녀 역시 많은 실수를 했고, 그것을 고쳐 나가는 중이었다.
“데이지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도 몰랐다?”
그럴 수 있다.
데이지 혼자만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테니까.
다른 사람들도 정신이 없기에 착각하고 떠났을 수 있다.
“그럴 리가, 없지.”
가늘어진 르윈의 눈이 주변을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빠르게 사람이 지나간 흔적들이 더러 보이고, 다수의 발자국이 미세하지만 존재했다.
“누군가에게 쫓긴다?”
베르크 왕국의 추격자가 따라붙은 것인가.
그도 아니라면.
“그냥 나 버리고 간 건 아니겠지?”
아마 높은 확률로 누군가에게 쫓겨 도망친 것이 맞으리라.
하지만 후자의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었다.
“진짜 아니겠지?”
혼잣말로 중얼거려 보았지만, 르윈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동안의 업보를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