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t to Be an Extra RAW novel - Chapter (12)
12화 3. 인생 10회 차는 변하지 않는다 (3)
추운 겨울이었다.
창밖에는 소복이 쌓인 눈이 가득했고, 방 안의 난로에서는 따뜻한 공기가 계속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음…….”
평범한 겨울의 한 장면, 그곳에서 봄을 준비하는 인물이 있었다.
“허…….”
베르샤 아카데미의 마법 교수, 데르프.
아직 차가운 겨울이지만, 그는 봄과 함께 베르샤 아카데미에 올 신입생들의 서류를 확인하고 있었다.
“왜 그러시나요?”
연이어 이어지는 데르프의 한숨에 구석에서 조용히 서류를 정리하던 여인이 고개를 빼꼼 들었다.
“벨리.”
그녀의 이름은 벨리.
직업은 노예, 아니 데르프 교수의 조교였다.
“네, 교수님.”
“휴식이 필요한 것 같네요.”
그 말에 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기쁨의 함성을 꾹 참아 내었다.
‘아직이야. 이건 교수 놈의 함정일 수도 있어!’
책상 아래에 꽉 움켜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벌써 며칠째인가?
남들은 방학이라고 다 집으로 돌아갈 때, 자신은 기숙사 방에도 돌아가기 힘들었다.
“왜 그러시나요?”
친구들이 말릴 때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을 멈췄어야 했는데.
자신이 벌인 과거의 만행에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는 데르프에게 질문했고.
“여기.”
데르프는 조용히 자신이 보고 있던 서류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도대체 왜?”
데르프가 건네준 서류, 베르샤 아카데미의 입학 원서를 받아 든 그녀가 생각한 원초적인 질문이었다.
베르샤 아카데미.
비록 수도 외곽이라고 하지만 제국 수도에 포함된 아카데미였다.
현재 바벨리안 제국의 수도는 세계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그렇기에 제국 수도에 속해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아카데미의 급이 갈리는 것이 현실.
그렇기에 제국 수도에 속한 베르샤 아카데미는 제국, 아니 대륙에서 손에 꼽힐 만한 아카데미였고.
‘그렇기에 내가 더럽고 치사하지만 노예 생활을 하는 건 맞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툭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왜 여길 지원한 거지?”
그만큼 서류에 적혀 있는 이름들이 심상치 않았다.
르윈 디 드라이르프.
라일라 라인하르트.
제국의 기둥이라고 불리는 두 가문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예, 예비겠지?”
베르샤 아카데미는 분명 좋은 배움의 터였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입학을 신청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리 베르샤 아카데미가 좋은 곳이라 하더라도 황실 아카데미와의 차이는 명확했기 때문이다.
“예비겠죠?”
“…….”
그녀는 간절한 목소리로 데르프를 쳐다보며 물었지만, 데르프는 늘 그렇듯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왜?’
바벨리안 황실 아카데미.
이름 그대로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고, 더 나아가 대대로 황족들이 아카데미를 다니는 경우도 흔했다.
그렇기에 황실과의 연줄을 원하는 귀족들은 황실 아카데미에 자신들의 자식을 보내는 것을 절실히 원했다.
그뿐인가?
황실 아카데미에서 황족의 눈에 띄어 인생을 역전한 평민의 이야기는 너무나도 흔한 것이었다.
로맨스 소설처럼 황태자의 눈에 띄어 인생을 역전하는 일은 없었지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주고 황태자의 가신이 된 이들은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황실 아카데미 입학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인생 역전의 기회!
그렇기에 수많은 인재가 이 시기만 되면 황실 아카데미의 문을 두들겼다.
“…….”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교수 놈을 바라봤지만, 교수 놈은 대답이 없었다.
여태까지 버텼던 피로가 한 번에 터진 듯한 얼굴로 그저 눈가를 꾹꾹 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교수의 손에 한 달을 밤샘하던 논문이 찢겨 나갈 때도 유지하던 포커페이스조차 무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황실 아카데미를 제외하더라도, 수도에 베르샤 아카데미보다 역사와 전통이 깊은 곳은 많았다.
그렇기에 베르샤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이들은 대부분 그런 곳에서 떨어진 이들이거나 자신의 능력을 떨치고 싶은 평민들.
백작 가문만 되어도 아카데미의 권력 최상위 포식자요, 간혹 들어오는 후작 가문의 자제는 절대자 취급이었다.
“교수님…….”
그런데 공작가가 둘이라니.
그녀는 얼마 안 된 과거를 떠올리며 위가 쓰려 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겠죠?”
그때의 악몽을 떠올리면서도 벨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드라이르프, 그리고 라인하르트.
그 이름은 황족도 다니고 있는 황실 아카데미에서도 눈에 띄는 이름이었다.
르윈 디 드라이르프의 형제들도, 라일라 라인하르트의 형제들도 모두 황실 아카데미에서 그 명성을 마음껏 뽐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 그러니까.”
그저, 예비일 뿐이다.
성적도 봐라.
라일라 라인하르트.
1차 시험에서 그녀의 성적은 만점이었다.
입학만 한다면 수석 확정.
그리고.
“응?”
르윈 디 드라이르프.
아슬아슬하게 합격점.
“응?”
아슬아슬하게, 턱걸이로 합격.
“응……?”
베르샤 아카데미의 시험은 제법 어려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황실 아카데미를 노리는 이들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어…….”
이번 시험이 좀 어려웠나?
그렇다고 하기에는 라일라 라인하르트는 만점이었다.
“교수님…….”
그녀는 울먹이는 얼굴로 자신의 교수를 바라보았다.
“…….”
하지만 이미 교수 놈은 책상에 얼굴을 들이박은 채 악마 소환을 하는 흑마법사와 같은 소리를 내뱉고 있었다.
“하…….”
그렇기에 그녀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베르샤 아카데미에 생태계 파괴종이 또 들어온다는 현실을.
‘진짜 그만둘까.’
진지하게 때려치우고 싶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이미 오래전에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
“도련님, 라일라 아가씨가 근신 처분을 받아서 올 수 없다고 합니다.”
데이지의 말에 르윈이 이불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밀었다.
“왜?”
“…….”
그 한마디에 데이지의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겨울만 되면 더 나태해져.’
한 해가 끝나 가는 시기.
저택에 새롭게 찾아올 새해를 준비하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지만, 눈앞의 도련님은 아니었다.
이불이 곧 나고, 내가 곧 이불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처럼 이불과 하나가 되어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있었다.
“왜 근신인데?”
“라일라 아가씨가 매우 안타깝게도 황실 아카데미 시험에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저런.”
영혼이 하나도 없는 말이었다.
데이지 역시 르윈의 반응을 예상하였다.
“매우, 매우 안타깝게도, 정답을 밀려 썼다고 하더군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수석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더 정확하게는, 나쁜 사람의 꼬임에 넘어가지만 않았으면이겠지만요.”
뼈가 담긴 어조에 르윈은 이불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나쁜 사람한테 속다니. 라일라가 얼마나 똑똑한데.”
“그런가요?”
“그렇지. 참 안타깝게 되었네. 답을 밀려 쓰다니.”
“그렇기에 라인하르트 가문에서는 내년에 다시 시험을 보겠다는 말도 나온 것 같았습니다.”
아예 못했다면 모를까, 그저 답을 밀려 쓴 것이라면 다시 한번 기회를 노리는 것이 맞다.
“다만, 라일라 아가씨께서 결사반대했기에 라인하르트 가문에서 큰 소란이 있었다고…….”
평소에 존재감이 없을 뿐, 말 잘 듣고 착한 라일라였다.
그런 그녀의 인생 첫 반항에 라인하르트 공작 부부가 큰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데이지는 세세히 르윈에게 전해 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슬슬 사춘기가 올 시기가 되기는 했지?”
절대 나랑은 상관없다는 태도에 데이지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라일라 아가씨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응?”
또 할 말이 있다는 건가.
다시 이불 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민 르윈을 데이지가 무표정하게 내려다보았다.
“도련님, 1차 시험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합격이지?”
“네. 딱 턱걸이로 합격하셨더군요.”
더 할 말이 없냐는 듯한 데이지의 시선에 르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합격이잖아?”
“그러니 문제가 없으시다고요.”
“응.”
데이지는 자신도 모르게 끄덕이는 고개를 확 꺾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하고 말았다.
“아, 거기 시험이 좀 어렵더라.”
“…….”
“그날 컨디션이 좀 안 좋았고.”
“…….”
“라일라도 답을 밀려 쓰기도 했잖아? 그럴 수 있는 거지.”
“…….”
“어, 또…….”
“변명은 이제 더 없으십니까?”
“응.”
해맑게 웃는 르윈을 보며 데이지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도련님, 아무리 그래도 가문의 명예가 있습니다.”
“해가 되는 일은 안 할 거야.”
데이지가 르윈 디 드라이르프라는 인간과 만난 지도 벌써 3년.
매일 르윈을 보는 삶이었기에, 이제 대충 르윈이 어떤 생각으로 행동하는지 어렴풋이 이해한 데이지였다.
“도련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드라이르프 공작 가문에서 낙제점 근처에서 머무는 것은 오히려 더 눈에 띕니다.”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그렇긴 하다.
공작 가문의 막내아들이 아카데미의 낙제생!
“와.”
사교계에서 열심히 물고 뜯고 맛보기 좋은 문장이었다.
“점수 좀 올려야겠네.”
“자백하셨군요?”
“노력해서 올린다는 건데?”
“그러시겠죠.”
기대도 안 했다는 데이지의 모습에 르윈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근데 알렉스는? 요즘 자주자주 사라지던데.”
연말이라 바쁘다고는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더불어 예리엘과 하인스도 자주 데리고 다니는 느낌.
“데이지.”
“네, 도련님.”
“혹시 이거…….”
“네. 도련님이 사고 치시지 않게, 제가 붙잡고 있는 겁니다.”
르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어쩐지 요즘은 이불도 안 뺏더라.”
“괜히 도망치시는 것보다는 방 안에서 얌전히 있는 게 편하니까요.”
“아카데미 가기 전까지 봐준다는 이야기지?”
“그 전까지 저희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죠.”
전혀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한 데이지의 말에 르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열심히 해 봐.”
“네, 도련님.”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을 무시하며 르윈은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
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그사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라일라가 베르샤 아카데미에 가는 것을 허락받았고, 베르샤 아카데미의 2차 시험 또한 모두가 통과했으며, 르윈의 생일이 지나갔다.
한 해 또한 지나갔다.
“이제 곧이네?”
르윈 디 드라이르프, 나이 10세.
눈이 녹고 봄이 찾아올 때쯤.
“파릇파릇한 새내기가 되는 날이!”
베르샤 아카데미, 기초 교육 과정의 신입생이 되는 인생 10회 차 고인물이었다.
“후.”
그 말에 하인스가 결의를 다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의 시작이죠.”
그의 말에 데이지와 예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은 무슨. 내가 다 알아서 잘한다니까? 나보다는 자기 자신을 더 걱정하라고.”
“도련님은 언제나 잘하셨죠.”
“문제는 그 기준이 세상과 맞지 않았을 뿐.”
“그렇죠, 그렇죠.”
르윈의 한마디에 세 사람이 영혼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짠데.”
그에 르윈은 조금 억울했다.
아카데미 입학.
그것은 자신의 인생 계획에서 참 중요한 과정이었다.
‘일단 이 험난한 세상에 휩쓸리지 않을 정도로 몸을 키우고, 묻어 둔 물건을 찾아야 하니까.’
용사로서 대륙의 온갖 재보들을 모았던 르윈이었다.
물론 자신의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한 행동이자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었지만.
‘퇴직금은 챙겨야 하니까.’
용사를 때려치운 지금은 욕망에 충실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단기간에 성장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
제아무리 인생 10회 차라고 하더라도 모든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아홉 번의 인생을 통해 축적된 방식이기에 르윈이 성장하는 방식은 그 누구보다도 체계적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번에 강해져야 하니까.’
드라이르프 공작가는 제국의 무력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대륙에서 손꼽히는 인물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
괜히 이상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 매우 귀찮아지기에 르윈은 성장하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약이랑 연금술 재료들이 망가졌을 수도 있지만.’
그럴 때를 대비해서 싱싱한 맨드레이크 하나도 박아 두었다.
다른 약들이 다 망가졌다고 하더라도, 맨드레이크는 생물.
잘 자랄 수 있게 주변에 마력석 등을 이용해 온갖 장치를 해 두었기에 누가 가져가지만 않았으면 확실하게 힘을 키울 수 있었다.
“진짜 바쁘겠네.”
기초 교육 방학 기간.
그때가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최대한 빠르게 강해져야 자신의 힘을 숨길 수 있다.
“음.”
그 이후, 중등 교육에서 라일라를 내세워 그 계획을 실행하고.
고등 교육 과정쯤 되면 있는 듯 없는 듯한 아카데미 생활을 보내며.
모든 교육 과정을 끝내고, 인생을 즐긴다!
“완벽해.”
변수는 단둘.
하나는 또 마왕 같은 새끼들이 설치기 시작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양심 없는 여신이 또 르윈을 용사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거에 대한 준비도 하긴 했지만.’
르윈이 나태한 것처럼 보인 이유는 다 미래를 위한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는 안전한 이불 안에서 미래에 대한 계획을 수백, 수천 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이렇게 하고, 아니면 저렇게 해서.”
다만 늘 혼자 머릿속에서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도련님 또 저러신다.”
“내버려 둬.”
“도련님 말이 맞아. 우리는 일단 우리부터 신경 써야 해.”
“역시 텃세가 있을까요?”
“아니. 우리가 시종이라고 하더라도, 미치지 않고는 드라이르프 가문의 사람을 건드리지 않겠지. 우리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역시…….”
“그렇겠죠.”
세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떠올렸다.
“…….”
“…….”
“…….”
검은색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은 기분 탓일까?
암울한 미래가 떠오르는 것을 애써 지우며, 세 사람은 굳은 의지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