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t to Be an Extra RAW novel - Chapter (143)
143화 27. 인생 10회 차는 준비한다 (8)
레피스의 시선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단발머리였다.
눈은 머리카락색과 비슷한 갈색이었고, 볼에 주근깨가 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세렐?”
세렐 아밀.
원드 가문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아밀 가문의 차녀이자, 자신의 동갑내기 소꿉친구.
그리고 작년에 자신이 이름 없는 신 연구 동아리의 회장이 되고, 루테스 디 바벨리안이라는 폭탄을 맡게 된 것을 비웃었다가 작년 말, 자신처럼 세계수 씨앗 연구회의 회장이 되었던 친구였다.
그때 실컷 비웃어 주기는 했으나, 지금 보니 천국이기는 했다.
적어도 세계수 씨앗 연구회에는 루테스도 없고, 르윈도 없고, 세계수를 연구한답시고 다른 아카데미와 교류하고 있지도 않았으니까.
‘열받네?’
분명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동아리를 선택할 때만 하더라도 비슷한 처지였다.
아니, 재작년까지만 하더라도 그러했다.
하지만 작년을 시작으로 무언가 어긋나기 시작하더니, 올해가 되니 닿을 수 없는 차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내가 앞선 것이지만.’
누군가가 들으면 자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하더라도 레피스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니까.
아니, 평범에서 조금 아래라고 할 수 있었다.
평균 근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적당한 성적.
꾸미면 더 예쁠 것이라는 말을 듣지만, 그건 평소에 너무 안 꾸미고 다니기에 듣는 말일 뿐.
열심히 꾸며도 딱 평범한 사람이 꾸민 듯한 조금 귀여운 수준의 외모.
거기에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의 장녀였다.
본인 또한 졸업하면 비슷한 또래가 그렇듯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쥐 죽은 듯이 살거나, 그 전에 어차피 안 될 것을 눈치챈 부모님의 손에 의해 어딘가에 시집을 갈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년도 지나지 않아, 레피스의 인생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대충 현 무링신 연구 동아리의 회장이자 창조의 교단이 수여한 다양한 이름과 상장 보유.
세계의 중심이라는 제국의 수도.
그곳의 종교계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신성.
덕분에 평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어색하게 대하고, 평소라면 대화도 나누지 못했던 고위 귀족 가문의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오며.
심지어 학생들에게 잘 관여하지 않는 베르샤 아카데미의 임원들도 가끔 얼굴을 비칠 정도가 되었다.
‘전혀 원하지 않았지만!’
그렇기에 레피스는 알 수 있었다.
올해 너무 바빠서 잘 만나지도 못했던 소꿉친구가 이곳에 온 이유를.
“레, 레피스?”
두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는 친구를 보며 레피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조금 전까지는 자신과 달리 평소와 같은 나날을 보냈을 소꿉친구에 분노했지만.
‘이제는 아니니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르윈에게 잡혀 온 세렐이었다.
그렇기에 레피스는 그녀의 운명을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바닥에 주저앉아 처량하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소꿉친구를 보며, 레피스는 종교인에 걸맞은 인자한 웃음을 지은 채 무릎을 굽히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세렐.”
“레, 레피스.”
울먹이며 간절히 자신을 바라보는 소꿉친구를 진정시키며, 그녀의 귓가에 레피스는 작게 속삭였다.
“너 인생 망했어.”
“…….”
먼저 망한 선배로서 진심으로 내뱉은 한마디였다.
***
“그래서 새로운 신자로 데려온 건가요, 르윈 후배?”
“시, 신자?”
“아, 그런 건 아니고요.”
“아, 아니에요?”
눈물이 고인 눈으로 레피스와 르윈을 번갈아 보는 세렐을 보며, 르윈은 방긋 웃었다.
“그 전에 두 분이 아는 사이일 줄은 몰랐는데.”
“원드 가문과 아밀 가문은 근처에 있어서 예전부터 교류가 많았거든요.”
흔히들 영주라고 하면 으리으리한 저택이나 거대한 성을 생각하나, 귀족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남작, 자작 가문의 영지는 동네 하나를 맡은 수준이었다.
진짜 가난한 영지는 잘사는 마을 이장과 비슷한 수준?
물론 하급 귀족의 수가 워낙 많기에 평균적으로 말했을 때의 일이었다.
개중에는 진짜 성을 보유하고, 영향력이 약한 백작가보다도 더 영향력이 있는 하급 귀족이 있는가 하면.
영지조차 얻지 못한, 진짜 이름뿐인 하급 귀족도 많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윈드 가문과 아밀 가문은 딱 남작가 평균 수준.
그렇기에 영지가 매우 작았고, 덕분에 마차를 타고 놀러 가는 느낌으로 교류할 수 있었다.
“이런 우연히!”
르윈의 말처럼 우연은 우연이었다.
보통 그런 가문에서 태어나, 제국 수도권에 있는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
그 기적을 이루면 보통 제국 공무원을 노리며 입신양명을 꿈꿀 만도 했는데, 둘 다 공부도 대충, 동아리 활동도 대충 하고 있는 게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난 아니지만.’
남들은 간절히 원했지만, 자신은 원하지 않았던 입신양명의 꿈.
그것을 이루어 버렸다.
그것도 제국 공무원이 아닌 종교인의 모습으로.
“서로 분야는 다르지만,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하시다니.”
“네……?”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그 말에 세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
그에 비해 레피스는 담담히 그 말을 받아들였다.
‘나를 역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의 종교인으로 만들려는구나.’
속으로는 눈물이 주룩주룩 나오는 느낌이었지만, 수많은 고위 종교인과 귀족들을 만나며 단련된 안면 근육은 그것을 티 내지 않게 만들어 주었다.
“역사에 이름을 남겨요?”
“세계수 씨앗 연구회의 회장이시잖아요.”
“어…….”
아닌데요.
세렐은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다.
세계수의 씨앗을 연구하는 연구회.
이름만 들으면 거창한 곳이지만, 사실 세계수의 씨앗은 생각보다 많았다.
제국은 물론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아카데미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을 정도로 많았다.
대충 세렐이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다.
사실 더 많다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마, 맞긴 한데.”
하지만 일단 세계수 씨앗 연구회의 회장은 맞았다.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
레피스가 내뱉은 말이었다면 무슨 개소리냐고 했겠으나, 상대는 레피스가 아니라 감히 쳐다보기도 힘든 드라이르프의 막내 도련님이셨다.
아무리 자신이 한참 선배라고 하더라도,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그렇게 대단한 동아리는 아닌데요.”
간혹 어느 아카데미의 동아리는 엘프가 함께 참여해서 세계수의 씨앗을 연구하는 곳도 있다고 하나.
베르샤 아카데미의 세계수 씨앗 연구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귀가부였다.
이름만 있는 동아리.
그냥 아카데미 끝나고 쉬려고 입부하는 곳.
그곳의 회장이 된 세렐조차 ‘왜 이 동아리는 안 망하지?’, ‘학생회 일 안 하나?’ 같은 생각을 먼저 떠올리게 만든, 진짜 아무것도 안 하는 동아리!
그런 동아리에서 역사에 이름을 남길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세렐.”
그렇게 생각하는 듯한 소꿉친구를 보며, 레피스는 인자한 웃음으로 작게 속삭였다.
“으, 응?”
“이름 없는 신 동아리는 엄청난 것을 하던 동아리여서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어?”
“…….”
그 말에 세렐은 레피스를 바라보았다.
예전과 변함없는 모습이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가 버린 친구였다.
처음 소문을 들었을 때만 해도 소문을 말한 친구를 비웃었고.
두 번째로 소문을 접했을 때도 믿지 않았으나.
세 번, 네 번이 되자 그 녀석이 미쳐 버린 것인가? 싶었는데.
‘아니었구나…….’
이 상황이 되니 알 수 있었다.
레피스는 변함이 없었다.
변한 것은 그녀의 주변일 뿐.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이 누군지는 세렐도 알 수 있었다.
당사자가 되었기에!
“수많은 세계수를 연구하는 곳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수의 씨를 발아시킨 곳이 될 테니까요!”
감격스럽게 말하는 르윈의 모습에 세렐은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씨? 발? 아……?”
자신이 이해한 것이 맞는가.
한마디를 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렐을 보며, 르윈은 진심을 담아 충고했다.
“선배님, 누가 보면 욕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조심하세요.”
“죄송합니다!”
***
세계수.
인간의 역사에서 고대라고 불리는 시절에 해당하는 르윈의 인생 1회 차에도 존재했던 나무였다.
엘프의 신, 엘프의 어머니, 엘프의 수호자 등등.
그 당시에도 수많은 별명이 있었고, 신앙이 있었으며, 그렇기에 엘프와 여러 종교가 마찰이 있었던 원인.
하지만 세계수에 대한 엘프의 믿음은 굳건했고, 그렇기에 종교는 방향을 틀어 엘프를 포섭하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자연의 신, 대지의 신 등 세계수와 연관이 있을 만한 신들이 엘프에게 선물로 내려 준 것이 세계수라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며 세계수는 신의 사도와 같은 것이고, 너희는 그 사제를 믿는다는 개소리를 하는 곳이 많았다.
그리고 그게 반 정도는 먹혔다.
‘귀찮았으니까.’
엘프는 강하다.
아니, 강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오래 살면서 약하면, 그게 말이 안 되었으니까.
하지만 세상을 창조한 신은 균형을 잘 맞출 줄 알았다.
만약 엘프가 인간처럼 번식에 미친 종족이었으면 이미 세상은 엘프가 지배했을 것이지만.
엘프는 번식을 안 하는 것에 미친 종족처럼 그 숫자가 늘지 않았고.
그렇기에 세상은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라헬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지.’
자칭 창조의 여신.
그러나 그게 굳혀져서 타칭 창조의 여신까지 된 라헬로서는 도저히 맞출 수 없는 균형이었다.
“씨를 발아시킨다고요? 세계수의 씨앗인데?”
그렇게 라헬을 부정하는 르윈으로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딱 하나 있었다.
라헬은 신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이것 또한 확신할 수 있었다.
과거 엘프의 믿음이 어찌 되었든, 세계수는 신이 아니라고.
“네. 세계수의 씨앗이 우리 아카데미에 있는 이유는 아시죠?”
“그, 그건 들었는데요.”
아무리 이름뿐인 동아리였고, 이름뿐인 동아리 활동이라고 하지만, 세계수의 씨앗이 베르샤 아카데미에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한때 엘프의 신처럼 모셔졌고, 지금도 엘프에게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지는 세계수.
그런 세계수의 씨앗이 베르샤 아카데미에 있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비상용이잖아요.”
“그렇죠.”
세계수는 신이 아니다.
르윈이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
세계수에는 육신이 있었다.
비록 나무의 형태라고 하지만,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세계수는 불에 약하니까요.”
아무리 신성한 나무라고 하더라도, 나무는 결국 나무.
그 한계는 존재했고, 그렇기에 불에 약했다.
물론 평범한 나무처럼 불이 붙는다고 바로 타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신은 아니라고 하나, 자아를 가진 영물인 존재였으니까.
기본적으로 자신을 보호할 수 있고, 또 불에 타도록 엘프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어떤 변수가 존재할지 몰랐고.
그렇기에 정말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세계수의 씨앗은 여러 곳에 퍼져 있었다.
인간은 물론 엘프들조차 알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제국을 포함한 여러 왕국의 수도, 가문, 아카데미 등에까지.
그리고 베르샤 아카데미 또한 그중 하나였다.
“정말 만약의 사태 때, 세계수를 부활시키기 위한 장치.”
그렇기에 세계수의 씨앗이 발아한 적은 없다.
아직 세계수가 불탄 적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계수가 존재함에도 그것을 발아시킬 수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세계수가 두 그루가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세계수의 의지는 공유되는 것일까.
아니면 이어지는 것일까.
르윈으로서도 참으로 흥미로운 주제였고, 그걸 해결해 줄 사람이 바로 눈앞의 존재!
“그것을 세렐 선배가 이루어 내는 겁니다.”
“제가요?”
그것이 바로 눈앞에서 눈을 끔뻑이는 세렐 아밀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