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t to Be an Extra RAW novel - Chapter (289)
289화 47. 태초에 천지가 창조되고… (4)
흔히 근본이라고 불리는 것들을 식물의 뿌리에 빗대고는 한다.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뿌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고 있는 뿌리.
창조의 여신과 파괴의 여신은 각각 인류와 마족의 뿌리였다.
기록도 제대로 남지 않은 고대 시절부터 최고신의 자리에 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인류와 마족의 역사가 기록된 후부터는 늘 최고신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무링교가 유명해지긴 했어도, 창조의 교단의 위세를 넘을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마족을 개종시켰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신앙의 뿌리는 창조의 여신이었으니까.
큰 성과를 얻어 열매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뿌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압도적인 힘으로!”
그러나 파괴의 여신과 마족의 역사는 조금 달랐다.
파괴의 여신이 마족의 뿌리인가.
그렇게 묻는다면 대다수의 마족은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가 되는 파괴의 여신의 가르침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마족은 모두 같은 대답을 내뱉을 것이다.
‘힘.’
파괴의 여신은 힘을 강조했다.
모든 것을 파괴할 힘.
그것은 자신의 근본이기도 했고, 마족의 근본이기도 했다.
마족의 사회가 강자존이 된 것은 마대륙의 환경 탓도, 마족의 성향 탓도 있으나, 뿌리가 되는 파괴의 여신의 영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파괴의 여신은 마족의 최고신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장 강력한 마족이 자신의 사도였고, 가장 강력한 마족인 사천왕들이 자신을 믿었으니까.
“나약한 파괴의 신을 버리고, 강력한 평화의 신을 믿어라!”
그렇기에 그것이 독이 되어 돌아올 줄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자신의 목숨조차 위험하게 만들 극독이.
“파괴의 신께서는 강력하시다!”
“그럼 그런 파괴의 신을 믿는 네놈들은 왜 나를 못 이기는 거지?”
“큭! 그건 내가 나약해서…….”
“너의 나약함이 파괴의 신의 나약함의 증거다!”
“크아악!”
파괴의 신은 늘 말했다.
인류가 나약한 이유는 창조의 여신을 사칭한 거짓된 신을 믿기 때문이라고.
나약한 신을 믿는 인류를 쓰러트리고, 진정한 힘을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고.
“나약한 신을 믿는 나약한 자들아, 지금이라도 개종하고 힘을 얻어라.”
힘을 원하는가.
파괴의 여신이 인류를 유혹할 때 썼던 말을 데르마치가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아니면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든가.”
그럴 수 있다면.
그렇게 비웃는 데르마치에게 수많은 마족이 달려들었으나, 데르마치를 이긴 마족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마신이 자신의 권능을 모조리 쏟아부어 만든 최고의 걸작이자, 10번의 인생을 살아오며 수많은 경력을 쌓은 최강의 마족이 데르마치였다.
아무리 이번 생을 대충 살았다고 하더라도, 몇 번의 대전쟁 이후 약화된 마족이 이겨 낼 수 없었다.
“…….”
그런 지상을 내려다보며 파괴의 여신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고작 몇 개월 사이 자신의 종교가 입은 타격이 말이 안 된다.
자신이 최고신이 된 이후 이런 위기가 있었는가.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최고신이 되기 이전에도 이 정도 타격을 입은 적은 없었을 것이다.
“이 새끼…….”
그 원인인 데르마치를 보며 파괴의 여신은 생각했다.
“저번부터 짠 건가?”
만약 자신의 제단이 남아 있었다면, 사천왕 중 하나에게 그것을 몰아주어 데르마치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데르마치는 강하지만, 그렇다고 전성기였던 아펠리오스 시절과 비교하면 우스운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마신의 제단이 남아 있었다면 막을 수 있었다.
그곳에는 그간 자신에게 쌓인 신앙 일부가 마기의 형태로 남아 있었고.
쓸 만한 전사에게 그것을 부여하여 인류와의 대전쟁을 준비했었으니까.
“내 재단만 멀쩡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 제단을 다 털어 간 놈이 지금 저기서 자신의 목을 치러 달리고 있는 놈이었다.
그리고 그놈이 자신의 사도다.
“개새끼…….”
윤회를 반복하며 싸움을 계속한다?
불만이 있을 만하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파괴의 여신 또한 억울했다.
그냥 처음 인류와 싸웠을 때, 이 새끼가 방심만 안 했으면 마족이 인류를 이겼을 것이다.
그뿐인가?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마족이 이겼어야 정배였으나, 데르마치의 삽질로 졌다.
백번 양보해서, 그것도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고 인정해도, 지난 생에서 마신의 제단까지 턴 주제에 용사한테 졌다.
그것도 힘으로 진 게 아니었다.
졸아서 졌다.
협상이고 뭐가 그냥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싸웠다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겨야 정상인 싸움을 무승부로 끝낸 것이다.
“지가 잘못했으면서!”
인류 측 용사가 저 지랄을 한다면 모를까, 데르마치는 반 이상이 자신의 잘못이었다.
그런데 그걸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며, 자신의 신도를 강탈하다니.
이게 말이 되는 일인가!
“…그런데 내가 뭘 할 수 있지.”
그러나 신은 무력했다.
고대 이후 신들이 지상에 끼칠 수 있는 영향력은 강력해졌지만, 직접적으로 지상에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고대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바로 지상으로 내려가 망할 사도 놈의 멱살을 잡고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따지고 싶으나, 최고신이라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없었다.
“강신이라도 해?”
최후의 수단으로 지상의 육체를 빌려 내려가는 법이 있으나, 곧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강신한 상태로 처맞으면, 내 신앙은 끝장이야.”
지금의 데르마치는 미쳤다.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
강신한 자신을 보자마자 달려들어 때려눕히고, 마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두들겨 패며 ‘보아라. 이게 나약한 파괴의 여신이다!’라고 소리칠 놈이었다.
지상에 강림한 신을 팬다.
상상도 안 되는 일이었으나, 마족의 땅에서 파괴의 여신을 나약한 신이라 외치며 불만 있는 마족들을 모조리 두들겨 대는 데르마치의 모습 또한 상상이 안 되던 일이었다.
“진짜… 진짜 해야 하나?”
남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생의 위기라고 하더라도, 그 녀석에게 부탁을 해야 한다니.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가!
그러나 하나둘 점령되는 자신의 신전들과 쓰러지는 여신상을 보며 파괴의 여신은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
“까하하하하하!”
파괴의 여신은 자신을 비웃는 라헬의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이딴 새끼랑 협력을 하기 위해 찾아오다니.
아무리 신생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하더라도 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네 녀석도 위험할 텐데?”
그러나 되돌아가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렇기에 파괴의 여신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을 지으며 라헬을 노려봤으나.
“웃기고 있네. 내 신앙이 네년의 신앙과 같은 줄 알아?”
라헬은 코웃음을 치며, 너와 나의 신앙은 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그저 부수는 것밖에 못하는 신이랑 나는 격이 다르잖아?”
“부수는 것도 못하는 무능한 년이…….”
“억울하면 신명 선점 잘하든가. 내 본질이 무엇이든, 지상의 믿음이 중요한 거라고.”
이를 가는 파괴의 여신을 보며, 라헬은 진심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사기꾼? 맞다. 자신은 엄밀히 말하면 창조의 여신이 아니었으니까.
탄생의 여신.
아주 먼 고대 시절부터, 자식을 무사히 낳을 수 있기를 원하던 이들의 믿음으로 살아남았고.
기회를 잡았을 때, 어떤 의미로 비슷한 개념인 창조라는 개념을 내세워 지금의 자리를 유지했다.
‘내가 잘한 거지.’
신의 이름이 기록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그것이 왜곡되었을 때, 자신의 근본 또한 왜곡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자신의 개념만을 내세우는 것이 보통이었다.
불을 다스리는 불의 신.
물을 다스리는 물의 신.
죽음을 다스리는 죽음의 신.
파괴를 다스리는 파괴의 신.
그러나 창조의 여신 라헬은 이름까지 공개된 몇 안 되는 신 중 하나였고.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신의 신명을 왜곡시켰기에 그 신앙을 온전히 흡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질을 노출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끝까지 살아남아서 이런 모습도 볼 수 있잖아?’
그 제 잘난 맛에 사는 파괴의 여신이 머리를 숙이고 찾아왔다.
겉으로는 기세등등한 모습이나, 속으로는 얼마나 자존심이 개박살 나고 있는지 다 보이는 라헬이었다.
‘역시 내 사도야.’
마족을 개종시킨 것도 모자라 파괴의 여신의 목을 조르는 수준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개종하는 마족의 숫자도 심상치 않으니, 잘하면 마족들의 최고신이 파괴의 신에서 무링신이 될 판이었다.
‘그런데 평화의 신은 죽었잖아.’
드래곤으로도 남아 있다면 다시 신성을 구축해서 천상에 올라올 수도 있었겠으나, 이미 죽은 신의 자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고대부터 살아남은 라헬조차 이러한 경험은 처음이었기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보다 중요한 것은 파괴의 여신이 최고신의 자리에서 방을 빼게 된다는 것이었다.
‘신입 최고신 정도는 쉽지.’
강적인 파괴의 신도 결국은 몰락하게 되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신앙은 굳건하니, 몇만 년의 시간이 더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니, 흔들리기는커녕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평화의 신 정도는 하위 신으로 복속시키고.
마족들의 신앙마저 흡수하여 유일신이라는 칭호를 얻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상으로 떨어져, 네가 나를 올려다보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지 몰라? 네년의 사도야.”
“맞아. 우리 사도가 참 일을 잘해.”
“미친년. 그 녀석 목표는 내가 아니야. 나는 과정일 뿐이지. 진짜 목표는 네년이라고!”
악에 받쳐 소리치는 파괴의 여신을 보면서도, 라헬은 그저 비웃을 뿐이었다.
자신이 키우던 개에게 물린 비참한 꼴이라니.
한때 저런 것을 숙적이라 생각하며 싸웠던 자신이 부끄러워질 정도였다.
“꺼져. 패배자.”
그렇게 파괴의 신을 비웃은 라헬은 손을 저으며 그녀의 퇴장을 요청했고.
“X년. 나중에 찾아오기만 해 봐.”
파괴의 여신은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는 욕설을 내뱉으며 떠났다.
“꺄하하하!”
그런 파괴의 여신을 보며 라헬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웃었다.
세상에, 이런 날이 오다니!
“역시 내 선택이 맞았어.”
빌고 애원해서 겨우 르윈을 잡은 보람을 이제야 느끼는 라헬이었다.
헛짓할 것 같을 때마다 신성력을 쏟아부어 성녀의 몸에 강림하지 않았더라면, 르윈은 진작에 용사 일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용사를 양산해 달라는 미친 요구를 듣지 않았다면, 파괴의 여신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러 오는 일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뭐가 어찌 되었든, 이기면 그만이니까.”
이대로 무링교를 밀어주고, 개종한 마족들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럼 점차 파괴의 여신은 힘을 잃을 것이고, 신앙도 잃을 것이다.
무식하게 힘으로만 신앙을 모으던 파괴의 여신이었으니까.
압도적인 강자가 다른 신을 지지하면 어차피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사도가 아닌 마족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그 마족을 개종시킨 것이 자신의 사도이니, 모든 게 다 자신의 업적이지 않겠는가!
“아아, 나의 아이들아.”
그렇기에 기분이 좋아진 라헬은 신성력을 마구 사용하여 신탁을 계속 뿌리기 시작했다.
자고로 이런 일은 기세를 잡았을 때 밀어붙여야 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업보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추락한 파괴의 여신을 떠올리며 라헬은 열심히 신성력을 낭비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