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nt to Be an Extra RAW novel - Chapter (73)
73화 16. 인생 10회 차는 맞선을 본다 (3)
철벽이라는 별명을 더욱더 굳혀 가던 어느 날.
“바벨리안?”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르윈의 목소리가 드물게 떨렸다.
가늘고 고운 아미가 찌푸려진 것은 덤이었다.
“그렇습니다, 도련님.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좀…….”
그런 르윈을 보며 알렉스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
이미 수십 번의 맞선을 파투 낸 철벽의 르윈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황족이 여기서 왜 나와?’
순간 떠오른 것은 친한 동아리 선배인 루테스 선배.
물론 루테스 본인은 질색하겠으나, 르윈이 아는 황족은 루테스가 전부였다.
“이상한 건 아닌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드라이르프와 황족의 결합은 이상하지 않았다.
황실 입장에서도 제국 최고 가문과의 사돈 관계는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으니까.
“그렇긴 합니다.”
제국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드라이르프나 라인하르트가 황족과 결혼하는 일은 종종 있어 왔다.
너무 가까운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이가 먼 것보다는 좋은 일이었으니까.
“귀찮은데.”
하지만 이미 거절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잡은 르윈이었다.
황족?
이미 신성불가침 영역의 여신과도 적대 관계를 선포한 르윈이었다.
여신도 까는 마당에, 황족 정도로 겁을 먹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처럼 행동하시면 안 됩니다.”
“그건 그렇겠지.”
초반, 돌려서 말하던 르윈도 맞선의 횟수가 늘어나면서 직설적인 화법으로 바뀌고 말았다.
거절하더라도 못 알아듣는 이들이 간혹 있었고, 알아들었음에도 못 알아듣는 척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족을 상대로 ‘너 마음에 안 드는데?’ 같은 소리를 내뱉는 것은 무례한 일.
“어떻게 돌려 까야 할까?”
“…돌려 깔 생각부터 하시는군요.”
“알렉스.”
대놓고 한숨을 내쉬는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르윈은 진지한 얼굴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럼, 황족하고 약혼할까?”
“…아닙니다.”
르윈의 말에 잠시 황녀와 약혼한 르윈을 떠올린 알렉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죄송합니다.”
알렉스는 데이지에게 들은 르윈의 아카데미 생활을 떠올렸다.
고작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진행한 일들이라고는 생각하기 두려운 것들뿐이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든다거나.
아카데미의 위험한 인물들과 접촉한다든가.
아카데미 지하의 수상한 미궁을 돌아다닌다거나.
그 밖에도 하나하나 흘려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았던가.
그나마 데이지와 아카데미의 몇몇 인원들의 도움으로 손을 쓰기는 했으나,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르윈 디 드라이르프는 폭탄이다.
다행인 점은, 그 폭탄이 터진다고 하더라도 드라이르프라는 이름은 폭발의 뒤처리를 능히 해낼 수 있다는 것.
‘하지만 황실은 다르다.’
드라이르프라는 이름으로도 바벨리안은 어찌할 수 없다.
드라이르프의 이름이라면 한두 번쯤은 무마시킬 수 있겠으나.
‘한 번 터지고 사라지는 폭탄이 아니시니까.’
르윈 디 드라이르프라는 폭탄의 가장 무서운 점은 주변에 있으면 계속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황족과의 약혼?
앞으로 주요 행사에 황족과 함께한다는 이야기였다.
제국의 기념일마다, 황족들의 옆에 르윈 디 드라이르프라는 폭탄이 돌아다닌다니!
‘제명에 못 죽지.’
맞선 명단에 바벨리안이라는 이름이 추가되었다는 소식만으로도 손발이 덜덜 떨렸던 알렉스였다.
그뿐인가?
여태까지 다과를 즐기며 구경하던 데이지와 예리엘, 하인스조차 황족의 이름을 듣고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한순간의 유흥으로 즐기기에는 황족의 이름은 너무 크다.
그리고 르윈 디 드라이르프라는 폭탄은 더욱 크다.
“잘 거절하시길 바랍니다.”
황족과 계속 함께하는 것보다는 그냥 한 번 차는 게 낫다.
어차피 정략결혼을 진행하는 것도 아니었다.
마음에 안 맞아 거절하는 게 잘못은 아닐 터.
황족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안 좋은 일이지만, 최악의 결과보다는 차악을 선택해야 했다.
그때까지는, 분명 그렇게 생각한 알렉스였다.
***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철혈의 공작의 아들, 철벽의 공자가 사교계에 점차 이름을 알리기 시작할 무렵.
“끝이 보이네.”
수많은 맞선을 모두 해치우고, 이제 단 하나가 남았다.
“덤벼라, 황녀.”
“아니, 싸우시면 안 됩니다.”
이것만 하면 이제 쉴 수 있다!
‘내년부터는 방학 때 아카데미에 있어야지.’
데이지가 너무나도 간절한 모습이었기에 허락을 했지만, 앞으로는 안 된다.
마음 같아서는 올해 겨울 방학에도 돌아오기 싫었지만.
‘그래도 동생은 봐야지.’
그맘때쯤 태어날 동생을 보기 위해 한 번쯤은 시간을 내기로 했다.
“시간은 얼마나 남았어?”
“여유롭게 2시간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
알렉스의 말에 르윈은 상의 단추 몇 개를 풀었다.
“진짜 이번이 마지막이지?”
“네. 슬슬 아카데미 복귀를 준비하셔야 하니까요.”
“그렇네. 숙제 거의 안 했는데.”
“라일라 영애님이나 데이지의 숙제를 베낄 생각은 하지 마시죠.”
“…원래 방학 숙제는 다 한 사람 거 베끼는 게 정답인데.”
“그런 정답은 없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고작해야 기초 교육 1학년이다.
그 정도 수준은 쉽게 해결이 가능했기에 르윈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
“네, 도련님.”
“사람은 왜 맞선을 보는 걸까.”
“배부른 소리입니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정략결혼으로 짝이 정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긴, 우리 반에는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가 있는 애도 있더라.”
태어날 때부터 약혼이라니.
역시 귀족 사회는 무서운 곳이다.
그렇게 생각한 르윈의 머릿속엔 어서 빨리 아카데미로 도망갈 생각만 가득했다.
“슬슬 준비하시죠.”
“으으! 이제 진짜 끝이다.”
풀었던 단추를 다시 채운 르윈은 웃는 얼굴로 상대를 기다렸다.
‘뭐, 별일 있겠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르윈은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황족이라고 하더라도 동갑이라고 했으니까.’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황족 사회에서 어설픈 자들은 살아남지 못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열 살이다.
나이가 한 살 더 많은 루테스의 모습을 떠올리며, 황족이라고 해 봤자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자신은 인생 10회 차.
거기에 맞선은 이번 생에 거의 몰아서 경험했다고 하지만, 이미 수십 번의 경험이 축적된 상태였다.
“도련님, 오셨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알렉스의 말에도 르윈은 긴장하지 않았다.
그저 황족이라고 하니, 상대를 대하는 것에 조금 더 주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뭐야?’
처음 마주하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과는 다른 기운을.
수많은 사선을 넘어, 극한으로 발달한 오감이 말하고 있었다.
눈앞의 존재는 절대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고.
‘저걸 어떻게?’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르윈이 이렇게까지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런 기운을 풍기는 사람은 한 시대에도 몇십 명은 존재하는 법.
고작 열 살짜리 아이가 풍기는 기운치고는 대단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숨쉬기 운동을 안다고?’
르윈이 놀란 부분은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
르윈이 만들어 낸 비기이자, 직접 마력의 흐름을 조절해 주지 않는 한 익히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호흡법을 황녀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누가 유출했다고?’
분명 가르칠 때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아니, 그 이전에 저걸 가르친다고 배울 수 있느냐 하면 또 아니지만.
‘뭐지?’
긴 백발을 휘날리며 무표정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의 시선을 느끼며 르윈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안녕하세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황녀 또한 르윈의 시선을 느낀 건지 작게 고개를 갸웃거리며 붉은 눈동자로 르윈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쎄요!”
혀를 씹었다.
얼핏 귀엽게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르윈은 그것이 의도된 행동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만만치 않다.
방긋 미소를 짓지만, 찰나의 순간 르윈은 볼 수 있었다.
‘어디서 수작질이야?’
붉은 눈을 번쩍이며 그렇게 말하는 듯한 상대의 눈빛을.
“반갑습니다, 쩐하!”
그렇기에 상대에 맞추어, 르윈 역시 혀 짧은 소리를 내며 상대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
“쩐하라니요! 그보다는 이름으로 불러 주세요!”
“그, 그건 아직!”
“…….”
“…….”
“…….”
“…….”
멀리서 남의 맞선을 구경하던 네 사람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쟤 뭐 해?”
마치 석화 마법에 걸린 사람처럼, 차를 마시던 상태 그대로 굳어 있던 라일라가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두 눈을 비비며 말했다.
“모르겠습니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표정의 데이지의 말이었다.
“도련님이 미치셨어.”
“황녀 전하에게 반하신 건가?”
르윈의 입장에서는 숨 막히는 신경전이 벌어지는 상황이었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네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르윈의 언어 능력이 퇴화했어.”
“하는 행동도 그렇습니다.”
“누가 보면 다섯 살 정도 되는 것 같은데?”
“도련님은 그 정도 나이에 노예 시장에 노예 사러 다니셨잖아?”
“그게 다섯 살이야?”
“그보다는 조금 더 많았죠.”
혀 짧은 소리로 황녀와 대화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네 사람은 각자의 결론을 내렸다.
“요즘 일을 너무 많이 해서 맛이 간 것 같아.”
“그보다는 무슨 수작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지막 맞선이라고 조금 더 신경을 쓰는 걸 수도 있죠.”
“진짜 반한 거 아닐까?”
처음 보는 르윈의 모습에 네 사람의 시선은 더욱더 집중이 되었다.
오늘따라 다과로 준비된 팝콘에 더욱더 손이 갔다.
“지금 들었어? 부끄럽대! 르윈이 부끄럽대!”
“그렇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던 분이!”
“도련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이야.”
“진짜 내일 세상이 멸망할지도.”
볼을 발그레 물들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는 르윈의 모습에 네 사람은 혼란스러웠고.
그 반응에 또다시 부끄러워하는 황녀의 모습에 팝콘에 손을 가져가는 네 사람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흥미진진한데?”
“도대체 무슨 일을 벌이려고 저러고 있는 건지.”
“도련님이 꽃을 꺾으셨는데요?”
“드디어 미치신 건가?”
라일라는 그렇다 치고, 다른 세 사람은 시종으로서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짧지 않은 시간을 르윈과 함께했으나 저런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을.
“앗! 저기 나무 때문에 시야가 가려지는데?”
“한창 재미있는…….”
“언니, 본심이 나오고 있어!”
“무슨 문제가 생겼나? 아티팩트의 소리도 안 들리는데?”
툭, 툭.
라일라가 몰래 입수해 온 도청 아티팩트에서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자 하인스가 아티팩트를 두들겨 보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아티팩트가 고쳐질 리가 없었다.
“타이밍이 너무 딱 맞는데.”
“일부러 몸을 숨겼다는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황녀 전하께서 계시는데.”
“우연이겠죠.”
예리엘과 하인스의 말에 라일라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서 무슨 말을 하고 있을까?”
시야도 가려지고, 아티팩트도 고장 나고 말았다.
과연 저기서 두 사람은 어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을까.
“몰래 보고 올게!”
궁금증을 참지 못한 라일라는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하여 기척을 죽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