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03)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03화
슬프게도 예감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우렁찬 선창.
“군가 제목, 멋있는 황녀님!”
그보다 더 우렁찬 후창.
“멋있는 황녀님!”
루카인 병장은 자부심 가득한 얼굴로 외쳤다.
“군가 시작! 하낫, 두이, 섯, 넷!”
“멋있는! 황녀님!”
이어지는 군가 제창에 나는 몹시 큰 부끄러움을 경험해야만 했다.
내용은 변하지 않았다.
멋있는 사나이라느니, 황녀님을 위한 사나이라느니, 싸움에는 천하무적이고 헌신은 뜨겁게 하며 황녀님을 찬양하라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내가 아는 노래 중 최악이었다.
‘하아…….’
베이스캠프 안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고용인과 병사들, 그리고 몇몇 기사가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에 반해 군가를 선보인 루카인 병장은 몹시 뿌듯해 보였다.
“황녀님,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얘기를 들어보니 루카인 병장은 이곳으로 재배치되었다나 뭐라나. 월급도 많이 올랐고 대우도 좋아졌다나 뭐라나.
“앞으로 그 군가는 금지예요.”
“……예?”
“금지! 내 말 알아들었죠?”
“예, 알겠습니다.”
루카인 병장은 이를 꽉 깨물었다.
몹시 분해 보였다.
“그러게, 더 훌륭한 작곡가님께 의뢰했어야 했는데.”
“…….”
심지어 의뢰해서 만든 거였어?
그것만으로도 어이없을 무인데, 뒤쪽에서 병사들이 거들었다.
“거 보십쇼. 지나치게 세련된 것이 문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예?
“군가치고 너무 고급스럽다니까요?”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이 있는 걸까. 세련과 고급의 개념이 새로 생겨난 걸까.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보다 우렁차고 투박한 군가로 보답하겠습니다, 황녀님.”
……더 투박하면 큰일 날 것 같은데.
나는 그냥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루카인 병장. 부탁이 있어요.”
척!
차렷 자세를 취했다.
“부탁이라니요. 명령만 하십시오!”
“나를 카만 오라버니의 막사로 데려가 줘.”
“명 받들겠습니다.”
나는 무사히-그렇게나 세련된 군가를 들은 이상 정말 무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카만 오빠의 막사에 도착할 수 있었다.
* * *
이사벨을 카만의 막사에 데려다준 루카인 병장은 소대원들 앞에서 콧대가 높아졌다.
“봤냐, 얘들아? 황녀님이 내 이름을 기억해 주셨다.”
“봤습니다. 황녀님과 친하다는 것이 정말이었군요.”
소대원들은 루카인 병장을 부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들도 분명히 보았다. 황녀가 루카인의 이름을 기억해 주고 이름을 부른 것을 말이다.
루카인은 한껏 허세를 부리다가 이내 한숨을 내쉬고 진실을 알렸다.
“사실 그게 황녀님이시다. 내가 잘나서 날 기억해 주시는 게 아니야.”
황족이 이름을 기억해 준다는 것은 지극히 영광인 일이었다.
가끔 ‘이름을 기억해 주겠다’라는 말을 칭찬으로 사용하는 자들도 있기는 했으나, 그걸 정말로 지켜주는 고위 귀족은 많지 않았다.
그런데 황녀 이사벨은 정말로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병사들에게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매사 모든 만물에 정성 어린 시선을 보내신다. 그것이 그분의 성품이지. 우리 같은 잔챙이들이 이동 관문을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시고, 라헬라 왕국에서의 활약상은 두말하면 입이 아프지. 게다가 봐라, 내 이름도 기억해 주시면서 내게 간간이 존대까지 해주시잖냐?”
“병장님, 그 정도면 찬양 아닙니까?”
“그분은 찬양받기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사벨이 들으면 뒷목 잡을 대화가 오고 갔다.
“그런데 왜 우리의 ‘멋있는 황녀님’을 좋게 듣지 않으셨는지를 생각해 보자.”
“너무 세련됐다니까요?”
“군가는 좀 더 투박한 맛이 있어야 합니다.”
“과연 그것이 문제였을까? 그 너머의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깊이 있게 고민을 이어갔다.
한참 동안 생각하던 루카인 병장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알겠다!”
“오! 뭡니까?”
“이사벨 황녀님의 이름이 안 들어가서 그런 것 같다. 가사에 이사벨이 하나도 안 들어가.”
생각해 보니 간단한 문제였다.
“나 같은 조무래기도 이름을 불리고 기억되면 기쁘고 영광스러운데, 하물며 고귀한 황녀님이시라면……!”
“아……!”
“당연히 이름이 들어가야 하는 거였군요.”
그제야 그들은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 군가에는 꼭 ‘이사벨’이라는 존귀한 이름이 들어가야겠군요!”
“그걸 놓치고 있었군.”
“루카인 병장님, 예리했습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군요.”
“존귀와 찬양이라는 단어를 꼭 넣으면 좋겠네요.”
이들의 아이디어 뱅크, 루카인이 뛰어난 아이디어를 하나 더 냈다.
“다음 군가 제목은 [이사벨 찬가>가 어떠냐?”
루카인은 뛰어난 아이디어 덕택에 소대원들의 박수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 * *
카만은 간만의 휴식을 방해받았다.
“오라버니. 이사벨이에요.”
“…….”
카만은 이사벨이 성가셨다.
그는 이사벨을 만나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것들이 떠올라 버리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왜지?”
“이곳은 제국에서도 굉장히 신경 쓰는 베이스캠프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정예 중의 정예인 검은 고래 예하 부대가 파견된 거고, 모든 황자가 이 베이스캠프를 경험했다고 알고 있어요.”
미하엘도 몇 달 뒤, 이곳으로 파견될 예정이었다.
“이렇게 중요한 곳이니 황녀로서 당연히 견학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카만은 침대에 누운 채 몸을 돌렸다.
“알아서 하도록.”
“하지만 이곳은 너무 넓고 길이 복잡한걸요. 여기까지 찾아오는 데도 무지 힘들었어요.”
“…….”
카만은 그냥 눈을 감았다.
이사벨과 대화하는 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사벨은 옆에서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세상에 그런 군가는 처음 들어봤어요. 진짜 창피해서 숨고 싶었어요.”
“…….”
“그래서 여기로 숨었어요.”
“…….”
겉으로 보기에 카만은 이사벨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벨은 그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저 모습이 되기까지 많은 상처를 입었을 어린아이가 보였다.
‘다독여주자.’
어느덧 그녀는 8살이 되었고 이제 13년의 삶이 남았다.
남은 13년을 조금 더 의미 있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나 한 명쯤은 다독여줘도 되잖아?’
외톨이였을 때 손을 내밀어주는 게 정말 고마운 거다.
이사벨은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사벨은 카만의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오라버니. 우리 땡땡이칠래요?”
“…….”
“엄격한 규율과 정해진 루틴에서 벗어나 보는 게 어때요?”
“…….”
카만은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이사벨이 거슬렸다.
‘짜증 나는군.’
그래도 별다른 대응은 하지 않았다.
“저는 오라버니랑 친해지고 싶어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그 말을 듣던 카만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가족 같은 소…….”
“아악!”
꽈당!
그에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있던 이사벨이 뒤로 넘어졌다.
카만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중심도 제어하지 못하는 것이냐!’
“아야…….”
이사벨은 뒤통수를 매만지며 일어섰다. 뒤로 넘어진 와중에도 기분이 꽤 좋았다.
“너는 왜 웃고 있는 거냐?”
“뒤통수가 부딪쳤는데 멀쩡해서요.”
“그게 왜 웃을 일이지?”
“감사하잖아요, 이렇게 튼튼한 몸이라는 게. 일반적인 몸이었다면 꽤 크게 다쳤을지도 몰라요.”
그게 튼튼한 몸이라고?
카만 입장에서는 정말 황당한 말이었다.
저 정도 중심도 제대로 제어 못 하는 머저리 같은 몸뚱이가 뭐가 그리 마음에 든다고.
“저 걱정해 주신 거예요?”
“경멸한 것이다.”
“겨, 경멸까지 했단 말이에요?”
이사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똘망똘망한 호박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이 깜빡거리며 카만을 바라본다.
“…….”
“상처받았어요.”
“내 알 바 아니지.”
“그래도 이제 대답은 해주네요? 우리 조금은 친해진 거죠?”
“…….”
카만은 이사벨에게 휘둘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 나서 기분이 영 좋지 못했다.
“안 되겠다. 비장의 수를 써야겠어요.”
“…….”
카만은 또다시 귀찮다는 듯 베개에 머리를 대고 돌아누워 버렸다.
이사벨은 다시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저 비장의 수를 쓴다니까요?”
여러 차례 귀찮게 해도 카만은 더 이상 세차게 일어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조심하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사벨은 카만을 또 파악하고 말았다.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까.’
이사벨이 입술을 오므렸다.
“저 진짜 비장의 수를 꺼내 들 거예요. 말리지 마요.”
“…….”
“진짜예요. 말려도 소용없어요.”
“…….”
“말려 봤자예요. 진짜진짜 진짜예요.”
“말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오라버니가 그렇게까지 말린다면 참아줄 수도 있고요.”
“…….”
카만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슬쩍 돌려 이사벨을 한 번 보고 말았다.
이사벨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는데 카만은 저 미소가 어쩐지 맑다는 느낌을 받았다.
“귀찮으니 꺼져.”
“저는 촛불이 아닌데요?”
“…….”
“죄송해요. 반가운 사람을 만나서 너무 들떴나 봐요. 그렇지만 하나뿐인 여동생한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사납잖아요. 저 상처받아서 결국 비장의 수를 꺼내 들기로 했어요.”
“…….”
그쯤 되니 카만도 저 ‘비장의 수’라는 게 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사벨에게는 궁금하지 않은 것조차 궁금하게 만드는 기묘한 재주가 있었다.
“저는 오라버니가 좋아하는 사람을 알아요.”
누구에게나 한 명쯤은 있는, 어린 시절 첫사랑 혹은 풋사랑.
카만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저는 그 사람이랑 엄청 친해요. 제 부탁으로 여기 오고 있어요.”
돌아누운 카만의 등에 리듬을 타며 노크했다.
똑또도, 똑! 똑!
“두유 워너, 아니, 같이 밥 먹을래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