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04)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04화
키르엔의 부관이자 어릴 적부터 친구인 멜린이 물었다.
“대장님, 웬일로 휴가를 다 써?”
“그냥. 귀여운 애 좀 만나려고.”
“남자친구 생겼습니까?”
“그랬으면 좋겠다.”
“남자친구 아닌데 왜 그렇게 설레지?”
“내가 설레고 있다고?”
“딱 봐도 엄청 설레고 있는데?”
멜린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건 아주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귀여운 애면, 연하입니까? 외모는? 성격은? 이 언니한테 다 말해 봐요.”
“그런 거 아니야.”
키르엔은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덟 살 어린 여자애는 뭘 좋아할까?”
“아, 대장님도 그 유명한 조카 바보야?”
“뭐 대충 그런 셈이지.”
평생을 검을 쥐고 무인으로 살아온 두 여인은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여자애니까 역시 경량 갑옷이 좋겠지?”
“아닙니다. 그거 받으면 자존심 상할걸?”
“자존심 상한다고? 왜?”
“기억 안 나? 내가 열 살 생일에 경량 갑옷 받고 엄청 울었잖아.”
“아, 맞다, 기억난다. 그때 왜 운 건데?”
“무거운 거 못 입어서 받은 거 같잖아. 자존심 상해서 울었지.”
“아……!”
키르엔은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그럴 수 있겠네.”
“우리 어릴 때를 잘 돌이켜 봐. 제일 기분 좋은 선물이 뭐였죠?”
둘이 눈을 마주쳤다.
평생을 함께해 온 친구이자 전우이기에, 한 번에 마음이 통했다.
둘이 동시에 외쳤다.
“열한 살 생일에 받았던 참마도!”
“열한 살 생일에 받았던 거대 참마도!”
그 참마도는 사실 열한 살이 다루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무거워서 실용성 같은 건 없었지만 아무튼 기분은 최고였었다.
“참마도는 멋과 뽐이 있는 선물이었어. 위압감이 있었지.”
“그래. 그걸로 해야겠다. 마침 여덟 살치고 발육이 엄청 좋아서 우리 열한 살 때랑 별 차이 없을 거야.”
두 여인은 완벽한 결론이라며 서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 * *
참마도를 선물 받은 이사벨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저, 저렇게 거대한 칼을 준단 말이야?’
생긴 게 무척이나 흉악스러워서 차마 만져보기도 싫었다.
심지어 이름마저 참마도(斬馬刀)라니.
‘그래도 날 생각해서 이렇게 선물을 가져왔는데…….’
사람들의 시선에 민감한 이사벨은, 키르엔의 눈빛을 읽어낼 수 있었다.
키르엔의 눈에 담긴 것은 온전한 호의였다.
‘기쁜 척해야겠다.’
선물이 중요하다기보다는, 그 선물을 준비해 준 사람의 마음을 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진정되고 기쁨이 밀려들었다.
“고마워요, 언니. 날 생각해서 이렇게 멋진 선물을 준비해 주다니요!”
이사벨의 반응을 보며 키르엔은 뿌듯해졌다.
역시 이게 선물을 해주는 사람의 특권이지.
역시 참마도는 멋과 뽐이 있는 선물이 틀림없었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말이다.
‘다음에는 특대 사이즈의 할버드(*도끼창)를 선물해야겠어.’
성공적으로 선물 수여식(?)을 마친 키르엔은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좀 낯선 조합이네요?”
“오라버니가 언니랑 밥을 같이 먹고 싶다고 해서요.”
키르엔은 의아한 듯한 표정으로 3황자 카만 쪽을 바라보았다.
카만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3황자님은 딱히 그런 적이 없다는 것 같은데요?”
“표정만 저렇게 사나운 거지 사실 마음은 따뜻해요.”
“……그래요?”
“네. 언니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카만은 여전히 기분이 나쁜 듯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무리 봐도 호감 있는 사람의 얼굴로는 보이지 않았다.
키르엔은 저 표정을 읽어냈다.
‘십오 세 병을 심하게 앓고 있는 건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이였다.
예전에도 차가웠는데 오늘은 유독 더 차가운 것 같았다.
“그래도 오랜만에 뵈니 반갑군요, 황자님.”
끄덕.
3황자 카만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만은 늘 저런 식이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았다.
“키르엔 언니가 오라버니의 검술 스승이었다지요?”
“그건 너무 거창하고요. 그냥 몇 달 정도 검술 지도를 해준 적은 있어요.”
‘대단해요! 진짜 너무너무 대단해요! 최고예요!’라는 눈빛을 보내오는 이사벨을 바라보며 키르엔은 굉장한 흡족감과 만족감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아무리 봐도 참마도의 힘이었다.
‘역시 참마도를 선물하길 잘했어.’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그건 아마 오라버니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을 거예요.”
“……내 최고의 순간을 네 멋대로 정의하지 마라.”
이사벨은 카만의 쌀쌀맞은 태도에 굴하지 않았다.
“우리 같이 저녁 먹어요!”
“내가 왜?”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키르엔은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카만이 제일 싫어하는 말이 가족이라든가 정이라든가 뭐 그런 건데…….’
보아하니 이사벨은 카만과 무척 친해지고 싶어 노력 중인 것 같았다.
그러나 키르엔이 보기에 방법이 너무 틀렸다.
카만은 가족의 정같이 추상적인 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래도 한 번은 겪어야 할 성장통이니까.’
빌로티안 황가는 일반적인 가문과 많이 다르다.
가족의 사랑이라든가 우애라든가. 그런 걸 기대하기에는 지나치게 냉혹하고 차가운 핏줄이었으니까.
‘이사벨이 너무 상처받지 않으면 좋겠는데…….’
키르엔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사벨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유리가 훌륭한 저녁 식사를 준비 중이에요.”
“…….”
“옴총 맛있을걸요?”
“…….”
“아마 안 먹으면 무지 후회할걸요?”
이사벨은 카만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맛없으면 더 이상 오빠를 귀찮게 안 할게요. 약속할게요.”
“…….”
카만은 별로 기뻐하지 않는 모양새였지만 딱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식사는 해야 하니까.’
카만의 눈에 조막만 한 손으로 자신의 손목을 꽉 붙잡고 씩씩하게 걷는 이사벨의 뒤통수가 보였다.
제 딴에는 꽉 쥐고 있다지만 그래봤자 아주 연약했다.
‘너무 연약해서 뿌리치기조차 민망하군.’
아까 뒤로 발라당 넘어졌을 때를 떠올리며 몸에 힘을 풀었다.
그걸 느낀 이사벨의 발걸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헤헤, 신난당.”
카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뭐가 저 꼬마를 저토록 설레게 하는가.
‘저렇게나 먹을 것에 진심인가?’
* * *
이사벨이 자신만만해했던 대로 유리가 준비한 식사는 훌륭했다.
이 정도면 황실 주방장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사벨이 그토록 설렜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카만이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으며 말했다.
“꽤 괜찮군.”
특히 식후에 나온 디저트들은 대단했다.
디저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카만조차도 다시 생각날 정도의 달콤함이었다.
이사벨은 자신의 배를 문지르며 활짝 웃었다.
“아, 배부르다!”
“용건이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겠다.”
카만은 이사벨에게 휘둘리는 듯한 이 느낌이 별로였다. 속마음을 도둑질당하는 기분이었다.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키르엔 언니가 검술을 그렇게 잘 가르쳐 줬어요?”
“…….”
카만이 키르엔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민망한 건 키르엔 쪽이었다.
“황녀님. 저는 그저 잠시 스쳐 지나갔…….”
“키르엔은 훌륭한 무인이었다.”
가르치는 것에도 소질이 있었다. 상관을 구타하기 전까지, 그녀는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럼 저도 검술을 배울 수 있어요?”
빌로티안 검식을 수련할 수 없는 만큼, 보통의 황족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질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검을 못 쥐는 병에 걸린 건 아니었다.
검을 쥐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발키오 국왕 폐하가 오는 데 3일 걸린대요. 딱 그동안만 언니가 스승이 되어줄 수 있어요?”
이사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카만의 눈치를 살폈다.
이사벨에게 있어서 카만은 물고기였다.
‘어서 낚여라!’
카만에게는 행복한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나마 좋았던 기억을 몇 개 떠올려 보면 어린 시절, 어머니와 피크닉을 갔던 것. 그리고 키르엔에게 검술을 사사하던 그 몇 달.
그게 카만에게 있어서 유일한 추억이었다.
이사벨이 건드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영역이었다.
“제가 감히 황녀님을 가르쳐도 될지…… 일단 황녀님을 전담하는 비아톤 놈…… 아니, 비아톤 경의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이미 키르엔은 조카(?)와 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키르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가 원만한 대화와 합의를 통해 허락을 받아오도록 할게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원만한 대화와 합의라는데 눈에 왜 살기가 깃드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사벨은 그 살기를 조용히 모른 체하기로 했다.
몇 분 뒤에 돌아온 키르엔은 원활하게 허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사벨과 놀 수 있어 행복해진 키르엔은 열정을 불태웠다.
“밥도 먹었겠다, 그럼 한 번 수련을 해볼까요?”
“쪼아요!”
이사벨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신이 난 채 말했다.
아까까지는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재미있어졌다.
어린 육체는 모든 경험이 새로웠고 즐거웠다. 이사벨은 진심으로 즐거워하며 말했다.
“오라버니도 같이 가요!”
“내가 왜?”
“왜냐하면요, 제가 처음으로 검을 쥐고 배워보는 순간인걸요.”
“그게 뭐?”
“최초의 순간에 함께해 주는 사람이 가족이면 좋잖아요.”
“선물 같은 추억이 될 거예요!”
카만은 인상을 찡그렸다.
자꾸 보채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찮았지만 아기 참새처럼 보이기도 했다.
“함께 해주시면 안 돼요? 응? 응?”
어쩌면 아기 고양이 같기도.
저 모습은 불타 없어진 그의 일기장 속, 지금은 사라져 버리고 없는 그의 옛 모습이기도 했다.
카만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