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0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06화
“누구냐!”
만 칼프가 몸을 돌리며 벌떡 일어섰다.
그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으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국을 위해 수많은 공로를 세웠으나 네게 돌아오는 말은 그저 ‘평민 출신 주제에’였다.”
“정체를 밝혀라.”
“황실의 관리 놈들은, 평민 출신인 네게 준장의 자리를 내어줄 수 없다고 주장했었다. 천박한 피를 가진 자가 어찌 귀족가의 기사들을 통제할 수 있느냐며 목에 핏대를 세웠었지. 당연히 네게 수여될 훈장 같은 건 없었다. 네가 아무리 뛰어난 공로를 세워도 너는 훈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황녀는 황녀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훈장을 받고, 모든 주둔지를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특권까지 얻었다.”
만 칼프의 그림자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와 만 칼프의 몸을 감쌌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가라. 가서 네 명예와 자존심을 짓밟은 황가에 복수해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력이 만 칼프의 몸에 스며들자, 그의 눈동자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복…… 수……!”
“이사벨을 해치는 것만큼 짜릿한 복수는 없을 것이다. 가서, 위대한 만 칼프의 이름을 드높여라.”
바람결에 목소리가 흩어졌다.
“기억하라. 네게 명령한 이의 존귀한 이름은 빌헬름 드마 라크티안이다.”
만 칼프가 검을 쥔 채 걷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야간 순찰을 돌고 있는 병사들과 마주쳤다.
개중에는 루카인 병장도 있었다.
“차렷. 경례.”
만 칼프와 마주친 순찰대원들은 경례를 올렸으나 만 칼프는 본체만체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순찰대원 중 한 명이 물었다.
“얘들아. 좀 이상하지 않냐?”
“지휘관들 이상한 거 하루 이틀입니까?”
“아니, 그래도 뭔가 좀…… 술이라도 마신 건가?”
“눈 마주치지 마십쇼. 또 잡초 뽑으라고 할 게 틀림없습니다.”
루카인 병장은 멀어지는 만 칼프 준장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정확히 뭐라고 표현하기는 애매했지만 뭔가가 이상하기는 했다.
그들은 순찰을 돌다가 오늘, 이 구역의 야간 순찰 책임자인 3황자 카만에게 보고를 올렸다.
“크게 이상한 점은 없습니다만…… 만 칼프 준장님께서 뭔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뭐가 이상하지?”
“술에 취하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걸음걸이도 좀 이상하고. 그리고…….”
루카인은 쭈뼛거리며 머뭇거렸다.
“말을 똑바로 하라.”
“지나친 걱정이라면 걱정이겠지만, 아무래도 황녀님이 계신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 * *
만 칼프는 이사벨 황녀가 머무는 막사 앞에 섰다.
“충성.”
막사 앞에서 보초를 서는 병사 둘이 경례를 올렸다.
“황녀에게 볼일이 있다.”
“지금…… 시간에 말입니까?”
“내가 질문을 하라 했던가?”
병사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차렷했다.
“아닙니다.”
“비켜라.”
“…….”
군인은 위계질서가 곧 생명.
병사들은 만 칼프를 막아설 힘이나 권위가 없었다.
병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만 칼프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지, 누구도 이 안으로 들이지 마라.”
“예, 알겠습니다.”
이 베이스 캠프에서 만 칼프는 2인자다.
심지어 황자인 카만조차도, 이 안에서는 만 칼프보다 낮은 지위였다.
병사들끼리 쑥덕거렸다.
“이거 괜찮은 거냐?”
“안 괜찮으면 어쩔 건데?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그건 그렇지.”
“혹시 모르니까 보고라도 올릴까?”
“그 보고 결국 만 칼프 준장한테 올라가잖아? 무슨 의미가 있어?”
“그, 그건 그래.”
“이럴 땐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최고야. 괜히 나대지 말고 그냥 있자.”
만 칼프는 막사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막사 안은 상당히 넓어서 이사벨의 침실 구역에 닿으려면 꽤 걸어야 했다.
스릉-
맑은 검명이 울려 퍼졌다.
만 칼프 준장의 오른손에는 붉은 검날을 가진 그의 애검 ‘붉은 달’이 들려 있었다.
-죽여라.
누군가가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만 칼프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저벅저벅.
그는 이사벨의 침대를 향해 걸었다.
저만치 멀리, 이불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작은 발바닥 두 개가 보였다.
‘저기군.’
만 칼프는 그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사벨 앞에 서서 검을 들어 올렸다.
만 칼프가 씨익 웃었다.
‘쉽군.’
죽이는 것이 이토록 쉬울 줄이야.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그의 목덜미에 서늘한 예기가 느껴졌다.
귓가에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 다물어. 저 아이가 깨면 동맥을 그어버릴 거니까.”
누군가가 만 칼프의 등 뒤에서 그의 목덜미에 단도를 대고 있었다.
만 칼프의 날카로운 기감에 살벌한 살기가 느껴졌다.
‘여자?’
이 베이스 캠프 내에, 자신의 기감을 완전히 속이고 뒤를 잡을 수 있는 여자는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여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넌 누구지?”
“알 바냐? 검은 내려놓고 두 손 들어.”
뒤를 완전히 잡힌 만 칼프는 그녀의 말에 순순히 복종했다.
“따라 나와.”
그녀는 힘을 주어 만 칼프와 함께 밖으로 걸어나갔다.
병사들의 눈이 커졌다.
“주, 준장님!”
“준장님!”
만 칼프의 목에 단도를 대고 있는 여인, 키르엔이 말했다.
“너네도 다 입 다물어.”
이사벨과의 거리도 멀어졌겠다 키르엔이 기세를 방출했다.
키르엔 정도 되는 무인이 마음먹고 내뿜는 기세에 병사들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 중 한 명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그분이 누군지 아십니까?”
“예비 살인자 X끼.”
간단명료하게 만 칼프를 정리한 키르엔이 말했다.
“이자는 황족을 시해하려 했다. 나는 이자를 현행범으로 체포했으니 황실로 연행하겠다.”
“오해다.”
“오해?”
“그래, 오해. 내게 황녀님을 시해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
만 칼프는 상당히 침착했다. 그러자 병사들도 동요했다.
“그, 그렇지. 오해일 겁니다.”
“만 칼프 준장께서 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인단 말입니까?”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
어느덧 주변에 병사들과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만 칼프보다는 키르엔이 더 괴상해 보였다.
베이스 캠프 내에서, 베이스 캠프의 2인자의 목에 검을 겨누고 협박하는 모양새였으니까.
“일단 그 칼을 내려두고 얘기합시다.”
“현행범으로 체포했다니까.”
만 칼프가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증거가 있나?”
“네가 막사 안에 떨어뜨리고 온 네 검이 증거지.”
“그 검의 이름은 붉은 달. 내가 아끼는 검이다. 황녀께서 검을 배운다는 소식을 듣고, 내 검을 선물하기 위해 막사를 찾았을 뿐이다.”
“이 야심한 시간에, 비공식적으로?”
“요란한 행사를 벌이면서 검을 드리면 순수한 선물이라는 내 의도가 희석되고, 정치적으로만 해석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나의 애검을 황녀께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다.”
키르엔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손에 쥔 단도를 휘두르고 싶었으나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내 성질머리대로 일단 패고 봤어야 했는데.’
역시 사람은 생긴 대로 살아야 했다.
괜히 이사벨이 신경 쓰여서, 너무 난폭한 모습은 안 보여주려고, 이성적이고 어른답게 풀어가려다가 난관에 봉착한 느낌이었다.
“이봐요! 지금 실수하는 겁니다. 어서 준장님을 풀어주십시오.”
“그래, 실수했지. 냅다 팼어야 했는데.”
그런데 그때,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직책은 제국 수석 보좌관.
황제 직속의 부관으로서, 황제 다음가는 권세를 지닌 인물인 비아톤이었다.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자, 만 칼프 준장.”
“오, 비아톤 경. 오해를 풀어주실 분이 나타나셨군.”
만 칼프는 고개를 돌려 키르엔의 얼굴을 확인했다.
키르엔의 얼굴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본 만 칼프는 기세등등해졌다.
“상관 폭행으로 쫓겨났다던 그 미친 여자가 너였군. 그런 정신머리로 어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느냐? 비아톤 경, 오해를 좀 풀어주시지요.”
키르엔은 굳은 표정으로 비아톤을 바라보았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옛날이지만 키르엔은 비아톤의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그래서 키르엔은 비아톤의 저 화사한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비아톤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청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건 비아톤이 정말로 화가 났을 때 짓는 표정이었다.
“오해? 좋지요.”
비아톤은 키르엔에게 가까이 다가와 손바닥을 내보였다.
“키르엔 경. 단도를 내게 넘겨요.”
“……싫다면요?”
“싫어도 줘야 할 겁니다.”
비아톤의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키르엔이 알고 있는 전직 검귀, 그 자체였다.
“…….”
비아톤이 빙긋 웃었다.
키르엔은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은 거야?’
비아톤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걱정 마, 지금 죽이지는 않을 거야’라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결국 비아톤은 키르엔으로부터 단도를 건네받았다.
만 칼프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하하하! 드디어 오해가 풀리는 모양이군요!”
그런데 비아톤이 단도를 휘둘렀다.
키르엔을 제외하고서, 그의 몸놀림을 읽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아톤의 검술은 신묘하기까지 했다.
차갑고 예리한 검날이 허공에 기이한 궤적을 그렸고, 그와 동시에 만 칼프의 상의가 갈가리 찢겨져 나가 바람결에 나부꼈다.
“뭐, 뭐 하는 짓입니까, 비아톤 경!”
비아톤의 시선이 만 칼프의 어깨에 닿았다.
어깨의 기이한 문양을 발견한 비아톤이 씨익 웃고서 말했다.
“야.”
“……설마 나를 호명한 겁니까?”
“빌헬름 개새X 해봐.”
만 칼프는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사이, 비아톤은 만 칼프의 어깨에 새겨진 해골 같은 모양의 문양을 유심히 살폈다.
‘외눈박이 거인 때와 같군.’
어쩐지 그때와 묘하게 비슷한 냄새가 나더라니.
만 칼프는 아마도 빌헬름의 어떤 수작에 걸려든 것 같았다.
비아톤이 허리를 숙여 만 칼프의 귓가에 속삭였다.
“빌헬름. 너는 내가 반드시 찾아내 줄게.”
만 칼프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만 칼프 너머, 만 칼프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빌헬름을 향한 경고였다.
만 칼프의 등 뒤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있어요?”
잠옷을 입은 이사벨이 한쪽 눈을 비비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벌꿀 오소리를 인형처럼 꼭 껴안은 채로.
“언니? 비아톤 경?”
그리고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만 칼프 준장의 몸이 그림자처럼 주욱- 늘어나는가 싶더니 이사벨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악령 같았다.
키르엔이 비명을 질렀다.
“황녀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