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1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16화
“그러니 너는 그저 부탁하면 된다. 나는 네 오라비이고, 네가 부탁하는 모든 것을 거절하지 않을 테니.”
제발 그래 주면 좋겠다.
좀 더 생각해 보니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하나였다.
이사벨이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사벨이 기우뚱 넘어지는 순간, 모든 것이 기울어졌고, 아주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아라.”
이사벨이 무척 위태로워 보였다.
검술이 좋다고, 힘든 게 즐겁다고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괜찮아요, 즐거워요, 엄청 행복해요.
다 괜찮은 척 안 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위태로이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걸 사무치게 경험했던 카만이기에, 이사벨만큼은 자신의 어린 날과는 달랐으면 좋겠다.
“내가 네게 좋은 가족이 되어줄 테니 내게 기대라. 부디 마음을 열고 솔직해져.”
“…….”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다.”
카만은 아주 조심스레 이사벨을 내려주었다.
혹시라도 깨질까 싶어 전전긍긍하는 손길이 느껴졌다.
‘누가 보면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줄 알겠어.’
저 모습을 보아하니 일부러 넘어진 것이 조금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만큼이나 저를 걱정한 건가요?”
“그래.”
이사벨이 빙그레 웃었다.
“그것 봐요. 다정하게 말할 수 있잖아.”
“…….”
카만의 몸이 얼어붙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이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떠든 거지?’
카만은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들을 본능적으로 아무렇게나 내뱉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멍한 느낌이 들고, 왠지 모르게 푹신푹신한 느낌이 들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기이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고마워요, 오빠.”
“…….”
그에게도 가족이 생겼다.
* * *
이성을 되찾은 김벌꿀은 조심스레 이사벨 근처로 다가갔다.
[김벌꿀, 반성해.]그리고 스스로 벽 쪽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팔을 들었다.
자기 때문에 이사벨이 다칠 뻔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김벌꿀, 나빠.] [못된 성질머리, 김벌꿀.] [이제 안 그럴게.]이사벨은 한숨을 내쉬고 김벌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김벌꿀의 언어는 마력을 인간의 언어로 형상화한 것이고, 그래서 마력에 담긴 절절한 미안함이 이사벨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김벌꿀의 마음을 느끼고 나니 김벌꿀에게도 조금 미안해졌다.
지르델 베이스캠프에 와서 김벌꿀에게 소홀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러고 보면, 며칠 내내 벌꿀이는 얌전하게 날 바라보기만 했는걸.’
드문드문 기억이 났다.
언제 관심을 줄까, 언제 나와 눈을 맞춰줄까, 언제 나랑 시간을 보내줄까 하고, 벌꿀이는 하염없이 이사벨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라도 한 번 마주쳤을 때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팔락거리다가 이내 시무룩해지곤 했었다.
‘바쁘다는 이유로 좀 무심하긴 했네.’
그래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무관심했던 건 아니야,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사과할게. 대신 오늘은 나랑 같이 산책도 하고 다과를 먹고, 그렇게 하자. 알겠지?”
[김벌꿀, 자격 없는데.]“네게 무슨 자격이 필요하겠어?”
이사벨은 김벌꿀을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려 주었다.
“너는 김벌꿀인걸.”
[김벌꿀, 감동.] [김벌꿀, 말 잘 들을게.] [김벌꿀, 사고 안 쳐.]이사벨은 아래턱을 윗입술까지 잔뜩 끌어 올려 눈물을 꾹 참았다.
그 모습을 본 카만은 그 스스로도 모르게 은은하게 웃었다.
‘그래. 결국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저거구나.’
자신은 구구절절 떠들었다.
정확히 뭐라고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사실 지금도 머릿속이 어지러워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을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이사벨은 그저 한두 마디로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네게 무슨 자격이 필요하겠어? 너는 김벌꿀인걸.”
네게 무슨 자격이 필요하겠어?
카만은 여러 차례 그 말을 입 안에 담고서 곱씹었다.
한편, 온순해진 김벌꿀은 이사벨 손 위에 초대장을 올려놓았다.
[이거. 돌려줄게.]이사벨은 초대장을 받아 들고서 겉면을 살펴보았다.
‘발신자가 지르델 베이스캠프를 총괄하는 총책임자라고 했지?’
계급이 중장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정체는 비밀이었다.
지르델 베이스캠프를 총괄하는 지휘자는 그 자체로 전략자산이므로 대외비에 속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사벨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름을 알아내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으나 구태여 알려 하진 않았었다.
그런데 초대장에 이름이 버젓이 적혀져 있었다.
[중장, 아르미텔.]‘응? 잠깐만. 아르미텔? 아르미텔이라고?’
아르미텔? 이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이 시점에 지르델 베이스캠프의 총책임자였어?’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원작 여주와 관련된 인물이 등장했다.
* * *
이사벨을 습격했었던 ‘만 칼프’는 평민 출신으로 대단한 성과를 일구고 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실력만 놓고 보자면 그는 분명 뛰어난 군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주목받지 못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났기 때문인 탓도 컸다.
‘하필이면 만 칼프 준장이 살아온 시대에 아르미텔 중장이 있었으니까…….’
아르미텔은 모든 평민의 우상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평민 출신 최연소’ 업적을 아르미텔이 쓸어 담았을 정도였다.
아르미텔은 겨우 여덟 살에 군에 입대하여 수많은 공로와 뛰어난 전적을 세운 뒤 장군(중장)이 되었다.
세상은 늘 1등만 기억하게 마련이었고, 그래서 만 칼프는 그녀의 후광에 늘 가려져 있었다.
‘지금 시점에서는 20대 중반쯤 되었을 텐데…….’
보통 중장들의 평균 나이가 45세 전후라는 것을 감안하면, 20대에 중장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소설 소재로 사용하면 현실성과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르미텔은 실제로 해냈다.
‘아르미텔은…… 여주의 언니라는 설정이지?’
여주는 원래 용이니까 아마 진짜 친언니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소설 내에서 그와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다루지는 않았다. 아르미텔은 여주를 친동생으로, 여주는 아르미텔을 친언니로 생각한다.
‘사이가 아주 애틋하고.’
여주는 아르미텔의 막둥이 동생이었다.
여주가 나랑 동갑이니까 18살 정도 차이 난다.
아르미텔은 자기가 너무 바빠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것에 미안함이 컸고, 여주에게 늘 애틋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훗날 아룬과 여주 편에 서서 빌로티안을 배신하게 돼.’
훌륭한 명검은 내 손에 쥐어져 있을 때나 명검이지, 남의 손에 쥐어지면 무시무시한 흉기가 된다.
‘아르미텔이 빌로티안을 배신하지 못하게 해야 해.’
떠날 때 떠나더라도, 가족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고 떠날 거니까.
이미 작품 내용을 많이 바꾸어 놓았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했다.
어쩌면 이번 만남은 기회기도 했다.
이사벨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남주와 여주가 만나는 건 이 소설의 절대적인 설정이니까 어쩔 수 없다 치고…….’
소설의 내용이나 설정은 바뀌게 마련이다. 사소한 설정일수록, 작가가 구체적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일수록 더 유연하게 바뀐다.
그러나 절대적인 설정값들은 바뀌기 어렵다.
‘이를테면 내 예견된 죽음 같은 거…….’
나르비달의 낙인은 작가가 못 박은 절대적인 설정값.
그러니까 이사벨 자신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21년을 채우면 죽는다.
그렇게 생각했을 때, 남주와 여주의 사랑은 [시한부 악녀가 죽고 나면>의 가장 절대적인 설정값이었다.
‘나는 아룬을 괴롭히지도 않을 거니까, 그들이 빌로티안을 공격하는 일은 아마 없겠지……?’
또 모른다.
그녀가 예상하지 못한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결국 원작대로 흘러갈 수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어쨌든 ‘아르미텔’이라는 인물은 훗날 빌로티안을 배신한다는 설정이다.
꽤 주요한 설정이었으므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미리 해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녀 자신이 떠나고 이 땅에 남게 될 우리 가족을 위해서.
* * *
“저를 초대해 주실 줄 몰랐어요, 아르미텔 중장님.”
“이사벨 황녀님을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여기 앉으시지요.”
이사벨은 두 눈을 끔뻑거렸다.
‘우와, 예뻐.’
전체적으로 키르엔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키르엔보다 키는 더 작았으나 인상이 더 날카로워 다가가기 더 어려웠다.
‘나 숏컷 좋아했네.’
아르미텔의 볼에는 커다란 검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저런 상처는 그녀의 미모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아르미텔은 직접 차를 따라주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만 칼프 건은 제 불찰이었습니다. 제가 조금 더 수하 관리에 신경을 썼어야 했는데. 마침 그때 자리를 비운 바람에 큰일이 벌어졌습니다. 관련 사항에 대하여서는 이곳의 총책임자로서 책임을 반드시 책임지고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어떤 의미로 보면 만 칼프 준장도 피해자였는걸요.”
이사벨도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빌헬름과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마도 흑마법이나 정신계열 마법에 걸렸을 확률이 높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네. 정말로 빌헬름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만 칼프 준장도 저항하기 어려웠을 거예요.”
만 칼프는 능력이 뛰어난 군인이기는 했지만 능력이란 건 늘 상대적인 거니까.
빌헬름은 무려 마법 연방의 창성 마법사 아니던가.
“정말 속이 깊으시군요.”
약간의 티타임을 가진 뒤, 이사벨이 물었다.
“저를 왜 이 티타임에 초대해 주신 건가요?”
“그건…….”
그때 아르미텔의 설정값과 여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이사벨에게 의외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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