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2)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2화
남자가 웃었다.
“흐흐흐.”
나이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지만 겉모습 자체는 별로 의미 없었다.
마나가 풍부한 사람은 잘 노화하지 않으니까.
제법 선한 인상의 남자였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웃고 있었다.
이사벨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누구세여?”
“너를 입양할지 말지 고민하는 사람.”
“저눈 아빠 있는데여.”
“그렇구나. 그게 누구니?”
“황제 폐하예여.”
“뭐?”
그는 이사벨이 황녀일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하지 못했다.
분명 깜찍하고 귀엽기는 했으나 황녀답지 못한 모양새였기 때문이다.
꽃밭에서 흙투성이로 놀고 있는 빌로티안의 황녀라니.
“으하하하핫! 되바라진 아이구나.”
혹시 몰라 주변을 살펴보았다.
이상하리만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납치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었다.
“가만, 생각해 보니 진짜 황녀일 수도 있겠군.”
빌로티안의 황녀.
황가 입장에서도 골칫덩이일 것이다.
검술을 익히지 못하는 검술 제국의 황족은 빌로티안의 수치일 테니까.
오죽하면 마법을 경시하는 황제가, 그나마 마법이라도 가르쳐 보겠다고 카린을 섭외했을까.
“황녀가 맞다면 오히려 더 슬픈 얘기인걸.”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죽 필요 없는 아이면 지켜주는 이가 하나도 없을꼬.”
“있눈데…….”
그가 피식 웃었다.
“고귀하신 황녀님. 나를 따라오렴.”
“아저씨, 유괴범이야? 나 잡아가여?”
“훌륭한 마법사로 만들어줄 테니 무서워는 말거라.”
이사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저씨눈 똑똑한 사람인 주 알았눈데.”
“나를 아니?”
“빌헬름.”
황궁에 들어와서 제멋대로 거닐 수 있다는 건 곧 초대받은 사절단이라는 소리다.
그와 동시에 루루카를 손짓 한 번으로 사라지게 만들 수 있는 뛰어난 마법사.
마법 재능이 출중한 아이를 보며 눈을 음흉하게 빛내고 있는 남자.
그 아이가 황녀여도 상관없다며 납치를 계획 중인 대담한 남자.
이 모든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 소설의 독자로서 대충 생각해 봐도 빌헬름이고, 열심히 생각해 봐도 빌헬름이었다.
“오, 나도 빌헬름 경의 위대한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 나를 그분과 착각해 주시니 고맙구나.”
“시치미 떼도 상관 없기눈 한데. 아저씨가 그리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게써.”
“무슨 말을 하는 거니?”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말이다, 친구야.”
육두문자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이사벨이 들을까 봐 ‘친구’로 순화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남자의 가슴을 관통했다.
비아톤이었다.
비아톤은 그의 그림자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루루카를 끄집어냈다.
“황녀님!”
루루카는 황급히 황녀를 꽉 끌어안아 시야를 가려주었다.
비아톤은 혹여 이사벨이 들을까 언어를 극적으로 순화했다.
“흙으로 전신 마사지를 해주마.”
파묻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비아톤은 아공간에서 또 다른 검 한 자루를 꺼내 남자의 그림자에 꽂았다.
그는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마검사.
검에는 각종 마법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곳에서 희미한 연녹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바닥에 꽂힌 검이 남자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아직도 모르겠니, 친구야?”
“…….”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를 드러냈다가는 정체가 탄로 날 것이 두려운 듯했다.
“경비 병력들이 왜 없겠어? 어깨 위에 그건 장식일까?”
경비 병력이 많을 필요 없었다.
한 명이면 충분하기 때문이었다.
비아톤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가만, 이거 마법 형상이잖아?”
놈은 철두철미했다.
이 몸은 가짜였다. 피도 나지 않았다.
프스스-
남자의 몸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비아톤이 씨익 웃었다.
그의 눈에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납치 미수범 친구야.”
“…….”
“증거가 남지 않는다고 안심하지 말아주라.”
남자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다.
“나, 증거 엄청 잘 찾거든.”
비아톤은 남자의 가슴팍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혀로 핥았다.
할짝-
검날이 달빛에 반사되어 빛났다.
그의 흉흉한 눈동자가 사라져 가는 마법 형상을 응시했다.
“그리고 나도 증거 안 남겨.”
마법 형상의 하체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 상체밖에 안 남았다.
찾아서 죽여줄게.
그렇게 말하려 했지만, 이사벨이 옆에 있는 바람에 또 순화했다.
“찾아서 친하게 지내줄게. 깊이 교류해 보자.”
비아톤이 검을 휘둘렀다.
마법 형상의 목 부근을 베어버렸고, 마법 형상은 바람결에 흩어져 사라져 버렸다.
한편, 이사벨은 비아톤이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덤덤할 수 있었다.
그런데 비아톤 경은 조금 오해했다.
“황녀님, 또 담담해하신다.”
황녀는 시한부다. 그래서 매사에 담담하고 무덤덤했다.
비아톤은 그게 슬펐다.
“뭐가여?”
“안 무서우셨어요? 나쁜 아저씨였잖아요.”
“션생님이 있는데 뭐가 무서워여?”
“제가 늦게 나타났잖아요.”
“구거야 나쁜 아저씨의 목표랑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려구 그런 거 자나여. 그리구 나는 비아톤 경을 믿었는걸.”
“크흑, 황녀님……!”
크게 감동받은 비아톤은 이사벨을 와락 끌어안았다.
비아톤의 품에 안긴 이사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원작에서도 이렇게 쉽게 감동했나?’
그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약간의 의문점을 뒤로하고서 물었다.
“빌헬름이 맞아여?”
“글쎄요.”
“제가 잘 알아보겠습니다. 제가 친구 사귀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비아톤은 싱그럽게 웃었다.
가을철의 산들바람처럼 상쾌한 그 미소는 이사벨의 마음을 청량하게 만들었다.
비아톤은 상냥한 표정으로 이사벨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이사벨이 맑은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여 비아톤 경.”
“네에, 황녀님.”
“그렇게 사납게 칼을 휘두르면서 말만 예뿌게 하면 무슨 의미가 이써여?”
비아톤은 아차 싶었다.
혹시라도 황녀가 자신을 무서워할 것이 두려웠다.
“사, 사납다고요? 그것참 처음 듣는 소리군요. 전 아주 부드럽고 상냥한 선생님이거든요.”
“거짓말.”
세상을 다 잃은 것만 같았다.
“그래도 멋있었어여. 채고.”
비아톤의 세상이 다시 돌아왔다.
* * *
“잠깐만여.”
나는 감사의 선물로 비아톤에게 노란 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루루카에게 준 것과 똑같은 꽃.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비아톤 경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크, 크흑! 감동입니다.”
“줄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떠여. 나중에 어른 되면 좋은 거 줄게여.”
“약속입니다.”
비아톤 경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꼭 어른 되어서 좋은 거 주셔야 합니다.”
“약속!”
“그럼 오늘 일기장에 적어놓겠습니다. 25년 후 오늘. 저한테 귀한 선물 주시는 겁니다.”
“음, 25년 후면 나눈 세상에 없…….”
비아톤 경이 말을 잘랐다.
“그럼 특별히 20년으로 해드리죠.”
그래도 24세다.
나는 21세까지밖에 살지 못한다.
“약속 안 지키는 어린이는 나쁜 어린이입니다. 아시겠지요?”
“알았어요.”
“약속. 꼭 지켜야 합니다. 저는 이 약속을 평생 기억할 겁니다. 아시겠지요?”
“웅.”
“안 지키면 저 숨어서 잉잉 울 겁니다?”
“아라떠요.”
비아톤 경의 마음을 이해한 나는 싱긋 웃었다.
저 마음이 정말 고마웠다.
“후후후, 저는 그럼 순찰을 좀 돌아보겠습니다. 제가 기사들을 호출해 놨으니 이곳은 안전할 겁니다.”
비아톤 경이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몇 걸음 움직인 거 같지도 않은데 그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나는 빌헬름과 만났던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아기의 몸이라는 건 정말 편리했다.
당장 눈앞의 흙 놀이가 재미있으면 다른 일은 금세 까먹었다.
“다 대따!”
“그게 무엇인가요?”
유모가 눈을 반짝거렸다.
입을 옴짝달싹하는 것이 칭찬을 이미 장전한 것 같았다.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꽃반지!”
“어머나, 정말 예쁜 꽃반지예요. 이렇게 예쁜 반지는 처음 봤어요. 어쩜 이렇게 손재주가 좋으세요?”
유모는 늘 그렇듯 칭찬 세례를 쏟아냈고, 또 늘 그렇듯 나는 그 칭찬이 기뻤다.
예전처럼 엉덩이가 덩실덩실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미소를 숨기지는 못했다.
“황녀님의 미소가 절 숨 쉬게 해요.”
“웅?”
방금, 뭔가 되게 주접스러운 대사를 들은 것 같은데.
유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아니에요. 그나저나 이제 그만 들어가실 시간이 되었답니다.”
곧 3일 차 황궁 연회가 끝날 시간이다.
황궁 안이 번잡해질 것이다.
“오늘 때가 되어써.”
“네?”
“이 반지는 아빠한테 줄 고야.”
“폐, 폐하께요?”
아빠는 대연회장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다.
연회라고는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치였고 외교였다.
나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걱정 마. 오늘은 원래 선물을 주는 날이고든여.”
그 행사가 한창 무르익었을 시간이다.
빌헬름이라 추정되는 괴한 때문에 좀 늦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유는 있었다.
“꼬고!”
나는 꽃반지를 들고 대연회장 쪽으로 향했다.
유모가 당황한 듯 나를 몇 번 만류했다.
“갠차나, 유모.”
나는 4살이다.
이제 17년 남았다.
“아바마마 선물 주는 거, 열일곱 번밖에 안 남았단 마리야.”
“……황녀님.”
“한 번, 한 번이 넘나 소듕한 기회인걸.”
“…….”
유모는 결국 나를 안아주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내 겨드랑이와 등 쪽을 매만졌다.
“이상하네, 날개가 안 만져져.”
“웅?”
“네?”
“아니야, 유모가 뭐라고 한 것 같아써.”
“제가요?”
유모가 분명 혼잣말을 한 것 같은데,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요새 유모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곧 대연회장에 도착한답니다, 천사, 아니, 황녀님.”
대연회장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들이 유모를 가로막았다.
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내가 위엄있게 말했다.
“무옴하다! 비쿄거라! 나눈 이샤벨이다.”
“…….”
좋아, 카리스마 있었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