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20)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20화
“저는 어린애 취급을 싫어하지 않아요.”
아이에게는 아이의 시간이 있다.
내가 스무 살 먹고서 인형 놀이에 진심이면 조금 이상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는 진심일 수 있다.
귀염 뽀짝한 뿌까머리도 맘껏 해볼 수 있고 레이스가 주렁주렁 달린 형형색색의 드레스도 입어볼 수 있다.
심지어는 어리광을 부리거나 콧물을 줄줄 흘려도 귀엽다고 봐준다.
아이에게는, 아이 때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어린애 취급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네.”
왠지는 모르겠지만 발키오 국왕님은 내 말에 약간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내 선물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는가?”
“아, 리벨이요?”
나는 품속에 고이 간직한 리벨을 꺼냈다.
참고로 리벨은 ‘유리+이사벨’에서 따왔다.
“리벨?”
“이름을 붙여줬어요.”
“이, 이름을 붙여줬다고? 황녀가? 인형한테?”
이상하네.
이름을 붙여줬다는 게 그렇게 당황스러운 일인가?
“네. 이름 예쁘죠?”
“그, 그런 것 같군.”
저 아저씨 눈알이 왜 저렇게 또르르 굴러가는지 모르겠다.
굉장히 혼란스러운 모양새였다.
“아무튼 저한테 그렇게 죄송하다면 사과는 받을게요.”
“고, 고맙구나. 내가 정말로 미안했다.”
“맨입으로는 안 돼요.”
사실 지금도 뭐가 저렇게 죄송한 건지는 모르겠다.
저 마부 아저씨가 깜짝 놀라기는 했지만, 마차 안에 있던 나는 급정거하는 느낌도 못 받았다.
애초에 이 마차라는 게 급정거가 가능하지도 않았고.
“여, 역시 그렇지? 내가 성의를 표시할 수 있게 해주면 좋겠군.”
진짜 이상하네.
왜 오히려 마음이 더 편해 보일까? 원래 이러면 더 불편해져야 하는 거 아냐?
아까까지는 엄청 혼란스러워하더니 갑자기 눈빛이 맑아졌다.
원래 퍼주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인가?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인상인데 저 인상이 진짜인가 보다.
“마부를 용서해 줘요.”
“……응?”
내 말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발키오 아저씨의 눈이 커졌다.
“용서하라니?”
“지금 얼굴이 푸르죽죽해졌잖아요.”
아마도 아까 ‘미쳤어?’라고 소리친 것 때문일 것이다.
놀라서 소리치기는 했는데 그 대상이 하필이면 지르델의 국왕이었으니 많이 두려울 것이다.
“자네. 자네가 소리친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어. 그러니 겁먹을 거 없네. 내가 용서할 문제도 아니지만, 황녀가 용서하라고 얘기를 하니 용서하지.”
“가, 감사합니다.”
마부 아저씨는 즉각 바닥에 엎드려서 다시 한번 용서를 구했는데, 발키오 아저씨가 직접 다가가 몸을 일으켜 주었다.
저 모습을 보니 진짜 맘씨 좋은 아저씨가 맞는 것 같았다.
“이거면 되는 건가?”
근데 또 이상하다.
왜 또 혼란스러워하는 거 같지?
뭔가 거창한 걸 요구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좋은 아저씨가 맞기는 한데 희안하기는 했다.
“하나 더 있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또 눈빛이 맑아졌다.
“그래그래, 어서 말해봐.”
이왕 이렇게 된 거 잘됐다 싶었다.
나는 옆에 서 있는 아르미텔 중장님을 힐끗 쳐다보았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발키오 국왕 전하와 함께 협력하는 방안도 모색할 수 있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퍼주는 걸 무척 좋아하는 아저씨니까 일단 제안은 해보기로 했다.
“지르델 베이스캠프의 시설을 개선하려고 해요. 도와줄 수 있나요?”
* * *
발키오는 왕성으로 돌아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수석보좌관 가브리쟁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 과한 걸 요구하지는 않더군.”
“뭘 요구합니까?”
“베이스캠프에 시설 공사를 좀 도우면 될 것 같아. 행정적인 처리도 해주고 인력도 보충해 주고, 예산도 편성하면 될 것 같군.”
“예산까지요?”
“자신과의 거래로 인한 이익금 일부를 제국에 헌납하라는 의미겠지.”
아직 완전히 체결된 것은 아니지만 황녀와 ‘이동 관문 협약’을 맺게 될 것이다.
부록으로 다이아몬드 계약도 체결하게 될 것이고.
거기서 발생하는 이익금 일부를 제국을 위해 쓰라는 얘기였다.
“지극히 정치적인 계산이군요.”
“그런데 말이야.”
발키오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다시 한번 황녀를 만나보니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그 아이가 정말 그렇게 정치적 전략자산이 맞을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그냥 너무 사랑스러운 아이 같아서 말이야. 이히이이이잉!”
‘말이야’를 끝에 붙였기 때문에 말소리를 흉내 낸 것이었다.
물론 해탈한 수석보좌관 가브리쟁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국왕 전하가 그런 느낌을 받는 건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상황을 보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상황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니, 내가 준 선물도 사실 엄청 마음에 들었다던데? 이름도 붙여줬어. 리벨이라고.”
“전하의 면을 살려준 거겠죠. 아직도 그렇게 파악이 안 되십니까?”
원래 정치란 웃는 낯으로 칼을 꽂는 것이다.
미소 속에 감춰진 칼날을 파악하지 못하면 찔려 죽는다.
“결국 황실은 황실 나름의 명분과 실리를 모두 챙기지 않았습니까? 대규모 계약을 체결하면서도, 힘의 우위를 보여줄 수 있는 계약이 될 것입니다. 거기다 병사들을 위한다는 대의명분까지 챙겼습니다. 이런데도 정치적 전략자산이 아니라고 얘기하실 셈입니까?”
“아니. 그게 맞기는 맞는데…….”
“맞으면 맞는 거지, 맞기는 맞는데는 또 뭡니까?”
“내가 사람 하나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게 잘 본단 말이지. 팽!”
‘코가 막힌다’라고 말한 발키오는 코를 팽! 푸는 시늉을 했는데, 가브리쟁은 그 또한 무시했다.
“아무튼, 일단 풀키오에 갔다 온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우리도 계약 세부 사항들을 조정하고 있자고. 실무자인 나르모르와 얘기하고 있으면 될 것 같아.”
풀키오 아니고 칼포아요!
가브리쟁은 말을 참았다.
* * *
마부는 감동했다.
‘알페아의 봄이라 불리신다더니…….’
그는 소식지를 단 한 줄도 읽을 수 없는 까막눈이었지만 황녀 이사벨에 대해서는 얼추 들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하여 저 작은 몸을 아끼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실 그는 어제도 라면을 먹었다.
테이사벨 이동 관문은 몰라도, 라면은 알았다.
라면을 먹어본 사람 중에 이사벨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저렇게 따뜻한 분이실 줄이야.’
이사벨이 신경 써주지 않았다면 며칠 내내 불안에 시달렸을 것이다.
병사들이 집으로 찾아와 ‘네 이놈! 네가 네 죄를 알렷다!’라면서 들이닥칠지도 모르니까.
‘정말 맑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분이셔.’
‘무해’라는 단어가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다.
이사벨을 떠올린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평범한 마부인 그가 가브리쟁보다 이사벨을 더 정확히 보았다.
‘최대한 안락하게 모셔야겠어.’
그는 조심스레 마차를 몰기 시작했다.
* * *
마차 안.
유리는 계속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리!”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
유리는 화들짝 놀랐다.
“네, 네. 황녀님. 죄송해요. 잠시 다른 생각을 좀 하고 있느라…….”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고 있어? 몇 번을 불렀는지 몰라.”
“죄송해요.”
유리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사벨은 활짝 웃었다.
“아니야. 괜찮아. 그냥 나는 유리랑 대화를 좀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가만히 앉아 있던 아르미텔이 끼어들었다.
“곧 휴식할 수 있는 들판이 나올 겁니다. 마침 날씨도 좋으니 앉아서 좀 쉬죠. 말들도 좀 쉬어야 할 겁니다.”
“좋아요.”
들판에 도착했다.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넓고 푸른 들판이었는데, 하얀 나비들이 날아다녔다.
“저는 마차 안에서 쉬겠습니다.”
아르미텔은 이사벨이 유리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을 눈치채고서 일부러 빠져주었다.
근처에 냇가가 있어서 말들은 목을 축였고, 이사벨은 신발과 양말을 벗고서 발을 담갔다.
“유리, 유리도 같이 발 담그자.”
날씨가 무척 좋았다.
냇가의 물은 너무 차갑지 않고 적당히 시원했다.
“얼른.”
이사벨이 유리의 팔을 잡아당겼다.
유리는 멋쩍어하다가 이내 발을 담갔다.
“시원하고 좋지?”
“……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왔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 이제 말해봐.”
“네?”
“지금 유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말이야.”
“제 마음이라니요?”
“출발하기 전부터 계속 뭔가를 생각하고 있잖아. 얼굴에 근심 걱정이 가득해.”
“아니에요.”
유리는 세차게 손사래를 쳤다.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나머지 넘어질 뻔했다.
이사벨이 배시시 웃었다.
“아니기는. 딱 봐도 무슨 일 있는 것 같은데. 괜찮아. 괜찮으니까 솔직히 말해봐.”
“솔직히 아무 일도 없어요.”
유리는 괜스레 고개를 푹 숙였다.
넘실넘실 흐르는 냇가에 자신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물이 어찌나 맑은지 물 안에 돌멩이들이 또렷하게 보였다.
“아무 일도 없지 않잖아. 나한테만 속닥거려봐. 속닥속닥.”
이사벨이 유리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자신의 귀에 손나팔을 만들어 댄 뒤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채근했다.
“얼른, 속닥속닥.”
“…….”
유리는 한동안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정말, 정말 아무 일도 없어요.”
이사벨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유리를 아주 무섭게 혼내줘야겠어.”
라면서 짐짓 위엄있게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물론 표정은 활짝 웃고 있었다.
“……응?”
그런데 이사벨은 더 이상 장난을 치지 못했다.
유리가 울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