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23)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23화
이사벨은 삐거덕거리는 침대에 걸터앉아 아셀리아를 바라보았다.
가슴이 콕콕 찔려왔다.
다시 봐도, 정말로 과거의 자신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렇게 힘든데 괜찮을 리 없잖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황녀님과 신나게 떠든 덕분에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아셀리아는 누구에게나 늘 그렇게 말을 해왔다.
괜찮다고.
어려서부터 아픈 건 너무나 당연한 거여서 늘 담담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여전히 ‘아픔 냄새’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많이 아픈데, 덤덤한 척하고 있는 것이 틀리없었다.
“그렇게 덤덤할 필요 없어.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맘껏 투정 부려도 돼. 그래도 돼.”
사실 이사벨도 그러고 싶었다.
그렇지만 미움받을까 봐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무도 아셀리아를 미워하지 않아.”
아주 어렸을 적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그녀는 또 버려질까 봐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그녀는 늘 착하고 불쌍한 아이여야 했다.
덤덤하면 더 좋았고.
‘난 정말로 덤덤했던 적은 없어.’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덤덤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이사벨은 사람이 덤덤해지는 순간을 알고 있었다.
안 괜찮아도 괜찮을 때는 딱 한 순간이었다.
삶에 더 이상 미련이 없을 때.
그냥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을 때.
그때에는 오히려 모든 것이 차분해졌다.
‘내 눈에는 너도 그래 보여.’
사실 이사벨은 아셀리아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을 때 조금 아득했었다.
아셀리아로부터 삶의 의지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셀리아는 지나치게 덤덤했고, 눈에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아셀리아는 오래전에 삶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단 하나. 아셀리아가 여전히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마 아르미텔 중장이었겠지.’
내 옆의 소중한 딱 한 사람.
그 한 명이 하나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한국의 이사벨과 소설 속 아셀리아의 차이점은 그거였다.
정말 소중한 한 사람이 나를 떠나지 않고, 내 옆을 지켜주고 있느냐.
한참 묵묵히 이사벨의 말을 듣던 아셀리아가 결국 입을 열었다.
“황녀님. 저요, 있잖아요.”
“…….”
아셀리아는 또 입을 다물었고, 이사벨은 가만히 앉아 따뜻한 눈으로 아셀리아를 바라보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많은 용기가 필요한 말을 꺼낼 것 같아서, 그 용기를 기다려주기로 했다.
아셀리아는 이불 속에 숨긴 작은 주먹을 꼭 말아쥐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특히 언니 앞에서 한 번도 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서 꿈틀거렸다.
“저는…….”
언니가 자신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민폐인 아이여서 결코 할 수 없었던 말이 하나 있었다.
마음의 빗장을 열고서, 아주 깊숙이 숨겨놓았던 욕심을 꺼내보았다.
“……저도, 저도 살고 싶어요.”
* * *
‘살고 싶어요’라는 말에는 참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어쩌면 아프고 싶지 않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쩌면 괴롭지 않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다.
어쩌면 소중한 언니와 함께 여행을 가보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어쩌면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것들을 잔뜩 먹어보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마음속에 꼭꼭 숨겨놓았던 아주 많은 말을 하나로 합쳐서 ‘살고 싶어요’였다.
턱!
바깥에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와 함께 장을 봐왔던 아르미텔도 듣고 말았다.
그녀는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장바구니도 내팽개친 채 방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평민 출신으로, 고작 20대의 나이에 중장의 자리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 아르미텔은 이미 울고 있었다.
“아셀리아.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듣고 싶었다.
동생이 분명 살고 싶다고 얘기했다.
그 말은, 아르미텔이 줄곧 듣고 싶었던 얘기였다.
간절히 원했으나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말을 들었다.
“방금 뭐라고 했냐니까?”
“어, 언니. 그건…….”
“왜 말을 하다 말아? 뭐라고 했어?”
찔끔 놀란 아셀리아는 이불 속에 숨었다.
괜스레 혼이 나는 것만 같았다.
이사벨이 약간 흥분한 아르미텔의 손을 슬쩍 잡고서 고개를 살살 흔들었다.
그리고 침대 옆을 톡톡 두드렸다.
아르미텔은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이사벨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이사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셀리아. 아르미텔 중장님은 기뻐서 그런 거야. 너무너무 기뻐하고 있어. 화낸 거 아니야.”
손을 잡은 순간 느껴졌다.
아르미텔의 마력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간절한 기쁨이어서 이사벨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내게도 저런 사람이 한 명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를 이렇게 사랑해 주는 사람이 한 명만 있었다면, 더 잘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그니까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 말에 반응한 사람은 아르미텔이었다.
“예? 민폐라니요?”
“아셀리아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을 거예요.”
그것만큼 비참한 게 없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무가치한 느낌.
“결국 내가 살아 있으면 언니가 더 괴로울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래서 살고 싶다고, 아프고 싶지 않다고 차마 투정부리지 못했어요. 사랑하는 언니한테 민폐가 될까 봐. 나만 없었으면, 나만 아니었으면, 어쩌면 언니가 훨씬 더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그런 마음이 앞섰어요.”
“…….”
아르미텔과 맞잡은 손을 통하여 그녀의 감정이 시시각각 전해졌다.
그것은 무어라 정의하기 어려울 만큼 아주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이제 중장님이 말해줘요.”
지금 전해지고 있는 그 마음.
그 마음을 정리해서 말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
“말해주지 않으면 몰라요.”
“…….”
아르미텔을 잡은 손을 통해 답답함이 밀려들어 왔다.
아르미텔 본인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사벨은 아르미텔을 조금 도와주기로 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그냥 표현만 하면 돼요.”
“…….”
그 말이 아르미텔의 머릿속을 깨끗하게 정리해 주었다.
아르미텔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 쪽으로 향했다.
무릎을 꿇고 앉아 아셀리아를 덮은 이불을 슬며시 내리려고 했지만, 아셀리아가 이불을 꼭 쥐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아셀리아. 나는 정말 너무 기뻤어. 살고 싶다고 말해줘서 고마워. 내가 제일 듣고 싶어 했던 말이야.”
“…….”
이사벨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을 군인으로 살아와서 그런가, 속마음을 내보이는 데에는 그리 능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중장님은 아셀리아가 무언가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나요? 청소를 해놓는다거나, 설거지를 해놓는다거나, 어디서 돈을 벌어온다거나.”
“그럴 필요 없어요.”
“도움이 되지 않으면 무가치한 아이인가요?”
“아니요. 전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요? 중장님이 아셀리아에게 바라는 것은 뭐예요?”
아르미텔은 잠시 생각했다.
내가 동생에게 바라는 게 무엇이 있을까.
동생이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생각해 봤는데 동생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없어요.”
내게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랐다.
아르미텔이 원하는 건 그거 하나였다.
“왜 없을까요?”
“그건…….”
아르미텔은 여전히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사벨이 그 마음을 정리해 주었다.
“그건 중장님이 아셀리아를 엄청엄청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
아르미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아르미텔 옆, 그러니까 아셀리아의 머리맡으로 갔다.
아직도 이불 속에 숨은 아셀리아의 가슴팍을 토닥여주었다.
“아셀리아. 가끔은 존재만으로도 빛나는 사람들이 있어.”
이사벨도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이사벨에게는 이 세계가 선물이었다.
아무런 대가도 없이 이 세계를 선물받았으니, 이 선물을 나눠주고 싶었다.
과거의 자신과 너무나 닮은 이 아이에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저 존재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해.”
어쩌면 이것은 이사벨 자신이 듣고 싶어 했던 말이기도 했다.
이불 속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사벨이 이불을 천천히 걷었다.
자물쇠가 걸려 있던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그 자물쇠가 스르르 풀려버렸다.
아르미텔이 동생을 살짝 일으켜 안아주었다.
“민폐 아니야. 나는 그냥.”
“…….”
“나는 그냥 네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나는 그냥 네가 살고 싶다고 말해준 게, 그게 너무 고마워. 정말 고마워.”
아르미텔이 내비친 진심에 아셀리아는 후에에엥!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8살 어린아이였다.
아르미텔도 아셀리아를 껴안고 눈물을 줄줄 흘렸고, 그건 이사벨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부둥켜안은 세 사람 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의 목소리였다.
“약속을 지키려고 해요.”
이사벨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바라보았다.
유리가 쟁반을 들고 있었고, 그 쟁반에는 투명한 유리잔 네 잔이 놓여 있었다.
유리잔 안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세상에서 제일 달콤한 레몬티랍니다.”
그런데 이사벨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유리? 왜 그래?”
유리가 들고 있는 쟁반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