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33)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33화
‘슬픈 게 뭐지? 그게 뭔지 모르겠어.’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세르몬이 많이 불쌍하다고 느꼈다.
블라독 공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그를 양육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보편적인 방법은 아닐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세르몬에게 잘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내 가족이니까.
그렇지만 안타깝고 짠한 마음과는 별개로, 지금 내가 화가 나는 것도 진짜였다.
세르몬은 케이크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나한테 적의를 보이지 말렴. 내게 적의를 보인 자들은 모두 먼 곳으로 떠났단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참으로 기묘했다.
나를 향한 호감은 진심인데, 저 살의 또한 진짜였다.
보통 호감을 가진 사람한테 이렇게 진한 살의를 보내기는 어렵지 않나 싶은데.
그렇다고 내가 겁을 먹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오라버니가 그렇게 말해도 전 무섭지 않아요. 전 어차피 오빠보다 빨리 떠나요.”
“떠나는 데에는 순서 없어. 확률적으로 네가 더 빨리 죽기는 하겠지만.”
“유리는 제 시녀이기 전에 친구예요. 값을 받고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냥 뺏는 건 어떻니?”
“그 말이 아니잖아요.”
하아. 가만히 있으니까 가마니로 보이나 보다.
“유리를 내어줄 수 없다는 뜻이에요.”
“그럼 빼앗을 거야.”
“전 빼앗기지 않을 건데요.”
“네게는 힘이 없잖아.”
평온한 얼굴로 케이크를 오물거리는 저 모습이 참 낯설었다.
나를 약 올리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사실만을 조목조목 말할 뿐이었다.
말투는 또 왜 다정한 건지.
나는 유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리. 손수건을 줘.”
“화, 황녀님.”
“어서.”
유리는 쭈뼛대며 내게 다가와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걸 세르몬의 가슴팍에 집어 던졌다.
“서로 원하는 것이 다르다면 결투로 결정하면 되겠지요.”
“너랑 결투 안 해.”
“어째서요?”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되지만 황족은 웬만하면 죽이지 말라고 배웠거든.”
다른 사람은 다 죽여도 된다고?
황족은 ‘웬만하면’ 죽이지 말라고?
도대체 블라독 공작가에서 뭘 배우는 건지.
“제가 직접 싸운다고는 안 했어요.”
“음, 흑기사라면 꽤 괜찮은 방법이네. 합리적인 것 같아.”
세르몬이 포크를 내려놓고서 빙그레 웃었다.
내가 결투를 제안한 것이 매우 합리적인 방법이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때 비아톤 경이 난처한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황녀님. 저는 곤란합니다.”
“알고 있어요. 지금 이 사건의 이해당사자에 가깝잖아요.”
결투에는 몇 가지 법칙이 있다.
그렇지만 사실 지금의 내게 그런 법칙 같은 건 1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는 법칙이랑 상관없이 비아톤 경을 흑기사로 내세우지 않았을 거니까.
“후회하지 마세요, 오라버니.”
나는 아직 애다.
애는 애답게 싸우면 된다.
오빠랑 심하게 다퉜다면 이를 사람이 따로 있는 법이다.
“아빠한테 다 이를 거니깐.”
* * *
비아톤 경이 내 서신을 받아 들었다.
“제가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몇 시간 내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네? 그거밖에 안 걸려요?”
“아직 나르모르에게 보고 못 들으셨군요.”
잘 몰랐는데 나르모르가 열심히 일해주고 있단다.
지르델 베이스캠프와 빌로티안 수도로 이어지는 테이사벨 이동 루트를 만들어 시범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나 뭐라나.
“다녀오겠습니다.”
비아톤 경은 내 오른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고서 순식간에 멀어졌다.
이번 헤프닝에 대해 들었는지 아르미텔 중장님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황녀님. 얘기 들었습니다.”
“소식 빠르네요.”
내가 소문낸 것도 아닌데 지르델 베이스캠프 내에 소문이 쫙 깔리고 있다나 뭐라나.
진짜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말이 사실인가 보다.
“황제 폐하께서 정말로 직접 오실 거라 생각하시는 겁니까?”
“오시면 좋겠어요.”
그럼 아빠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으니까요.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아르미텔 중장님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알아요. 아바마마는 엄청 바쁘다는걸요. 못 오실 가능성이 더 높다는 거 알고 있어요.”
“혹여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제가 흑기사로 나서도 되겠습니까?”
이런 전개까지는 생각 못 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르미텔 중장님이 세르몬보다 더 강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너무 든든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예?”
“적어도 아바마마는 제 서신을 외면하시지 않을 거거든요.”
아빠는 아빠가 직접 못 올 것 같으면, 확실하게 혼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을 대신 보내줄 것이었다.
아빠는 황제고 그 정도 권한과 능력이 충분히 있으니까.
나는 빙그레 웃었다.
“누군가 오기는 올 거예요.”
“……거기까지 내다보신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당연한 얘기였다.
내다봤다고 말하기에는 좀 거창했다.
특별할 게 하나도 없는 건데, 아무래도 아르미텔 중장님이 날 좋게 봐주니까 저렇게 대꾸해 주는 것 같다.
“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아르미텔 중장님은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저런 표정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아바마마가 오시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 * *
지르델 베이스캠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봐, 루카인. 그 소식 들었나?”
“소식?”
“황제 폐하께서 방문하신다던데.”
“이런 미친!”
휴식을 취하던 군인들이 모조리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저기! 잡초 있잖나! 잡초! 잡초 뽑아!”
“치약으로 바닥을 닦으라고!”
“여기 껌 조각은 또 뭐냐! 당장 떼어내!”
베이스캠프 전체가 들썩거렸다.
“아니, 근데 황제 폐하께서 진짜 오신다고? 확실해?”
“황제 폐하만 오시는 게 아냐. 황후마마도 함께 오신대.”
아르미텔 중장은 중장 나름대로 황제와 황후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군 경계 태세를 철저히 유지하고, 외곽 철책을 확실히 살피며 보수하도록.”
이윽고 황제와 황후가 도착했다.
지르델 베이스캠프의 군인들은 무척이나 긴장했다.
혹여 군화에 먼지 한 톨 묻어 있으면 어쩌나 신경 썼다.
그러나 론은 그들의 군화에 먼지가 아니라 똥이 묻어 있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론을 태운 마차는 곧바로 이사벨의 막사로 향했다.
“엄마!”
이사벨은 세르나에게 달려갔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세르나가 더 가까이 있었고, 세르나를 더 오랜만에 봐서 반가웠을 뿐이었다.
세르나는 이사벨의 숏컷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며 이사벨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고, 이사벨은 그 손길을 맘껏 즐겼다.
이내 세르나가 말했다.
“거봐요. 나한테 먼저 안겼어요. 내가 이겼죠?”
“…….”
“내가 이겼으니까 세르몬을 너무 호되게 대하지는 말아줘요. 불쌍한 아이잖아요.”
이사벨은 론에게도 팔을 뻗었다.
론은 마지못해 몸을 낮추어 이사벨과 가볍게 포옹했다.
“그 성의 없는 서신은 무엇이냐?”
“……헤헤.”
론은 엄지와 검지로 이사벨이 보낸 서신을 들어 올렸다.
론은 이사벨의 서신을 받았을 때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첫 문장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사랑하는 아바마마께.]그런데 그다음 내용들이 조금 성의가 없었다.
[세르몬 오라버니가 괴롭혔어요. 유리를 빼앗겠다고 무섭게 협박했어요.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어요. 아바마마께서 혼을 내주시면 좋겠어요.-막내딸, 이사벨 올림.]
“어린아이나 쓸 법한 편지가 아니냐?”
“어린아이인걸요.”
“그건 그렇지.”
“어차피 자세한 내용은 비아톤 선생님이 전해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다고 이 짧은 편지로 황제를 움직이려는 건 지나치게 발칙한 생각이군.”
이사벨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황제 폐하 부른 거 아닌데…….”
“하면?”
“아빠 부른 건데…….”
론의 몸이 움찔했고, 이사벨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발칙하면 싫은가요?”
화가 난 나머지 너무 까불었나 싶었다.
형제싸움에 호기롭게 아빠를 불렀지만, 막상 아빠가 진짜 오니 눈치 보는 막내 신세였다.
“더 발칙하도록.”
론은 이사벨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서 발걸음을 옮겼다.
지르델 베이스캠프 내에서 가장 거대한 제1연무장에 도착했다.
제1연무장에는 세르몬이 이미 도착해 있었고, 수많은 군인이 모여 있었다.
정말 많은 군인이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연무장 가운데서 목검을 들고 있는 론 때문이었다.
이 연무장을 론 한 명이 가득 채운 것 같았다.
진검을 허리에 찬 세르몬이 말했다.
“정말로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바마마.”
늘 그렇듯 은은하게 웃고 있었으나 목소리가 떨리는 걸 완전히 감출 수는 없었다.
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검을 들어라.”
“아바마마와 검을 맞대게 되어 영광입니다.”
“검을 맞대는 자리가 아니다.”
“하면 어떤 자리인지요?”
론의 모습이 사라졌다.
세르몬의 능력으로는 그 움직임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훈육이다.”
이윽고 이어진 것은 매타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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