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52)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52화
“많은 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어려서부터 이사벨 황녀님과 선의의 경쟁을 해왔답니다. 아마도 저희의 인연이 처음 시작되었던 것은 올림피아드 경시대회 때였던 것 같아요. 당시 황녀님은 수석을 차지하셨죠.”
레이나는 그를 시작으로 자신과 황녀의 깊은 친분을 과시했다.
“비교적 최근에는 지르델 왕국에서 만나 오랜 사담을 나누었답니다.”
나르모르는 레이나의 의도를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레이나는 이사벨과의 친분을 드러내며 다른 후계자들의 우위를 점하려는 것 같았다.
나르모르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래도 나이를 조금 먹었다고 머리를 쓰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던 레이나는 여기 없었다.
적어도 겉으로는 황녀와 아주 잘 지내는 공작가의 여식을 연기할 모양이었다.
‘이제 슬슬 사교계에 입문할 나이가 되기도 했고.’
레이두가 열한 살이던가, 열두 살이던가?
잘은 모르겠지만 곧 사교계에 공식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 같기는 했다.
지금은 그 예행연습인 것 같았다.
레이나는 속마음을 감추고 입으로는 달콤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저는 황녀님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요. 그간 약간의 오해가 있던 탓에 사소한 성장통이 있기는 했었지만 저는 그래도 황녀님을 친우로서 경애하고 있어요.”
나르모르의 눈에는 레이나의 수작이 훤히 보였다.
‘저러면서 황녀님한테 손을 내밀면 된다고 생각하겠지? 황녀님은 심성이 무척 고우시니까.’
그래서 저런 식으로 다가가도 괜찮다고 생각할 거다.
친한 척 조금 하면 이사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친해질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을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든 레이두에게 개망신을 주려고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황녀님이 호구로 보이느냐, 레이두여?’
이사벨은 분명 착하다.
늘 누군가를 돕고자 했고, 세상이 자신을 선한 사람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것을 위해 매일매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단호할 때는 얼마나 단호하신 분인지. 레이두, 너는 그 사실을 모르지.’
심지어 레이나는, 이사벨의 둘도 없는 친구인 유리에게 누명을 씌워 핍박하기까지 했었다.
이사벨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레이나 영애가 저를 그렇게까지 생각해 주는지 몰랐어요. 제 소중한 친구를 돈에 팔라고 윽박지르던 모습이 뇌리에 너무 강하게 남았나 봐요.”
“…….”
이사벨을 쉽게 보았던 레이나는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이렇게 먼저 손을 내밀면, 황궁의 봄이자 햇살인 이사벨이 마냥 좋다고 손을 잡아줄 줄 알았다.
“약간의 오해라고 일축하기에는 레이나 영애에게 가진 감정이 그리 좋지만은 못하지만요.”
“그, 그건……!”
“그렇지만 레이나 영애가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레이나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저는 황녀님께 얼마든지 사과할 준비가 되어 있답니다.”
“저한테 말고요.”
“그러면……?”
“유리한테요.”
“유리요?”
레이나는 유리라는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로스일드 가문이 후원했던 수많은 아이 중 하나였을 뿐, 레이나에게는 별로 의미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설마 그렇게 심한 짓을 해놓고 기억 못 하는 건 아니죠?”
항상 화사하게 웃던 이사벨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창문이 모두 닫힌 회의장 안에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인공적인 마력풍이었다.
“그 일로 인해서 유리는 어머니를 잃을 뻔했는데, 누군가에게는 기억도 못 할 만큼 사소한 일이었나 봐요, 로스일드 공작가의 레이나 영애.”
* * *
특별 왕합 회의가 파하고, 성왕 라헬라와 아저씨 왕 발키오는 같은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봤어요? 그 마력풍?”
“봤지. 이사벨이 마법을 익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의지에 반응해 마법이 발현되는 수준이라니. 깝놀이었다, 깝놀.”
“깝놀이 뭐죠?”
“깜짝 놀라다의 준말, 내가 만들었어.”
“그럼 깜놀 아니에요?”
“…….”
발키오는 순간 당황했으나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냥 그렇게 만들어 봤지. 내가 또 드렌트 세터 아니겠는가?”
“트렌드 세터를 말하고 싶은 거죠?”
“그래, 드렌드 세터. 아무튼 그때 네가 나한테 귀띔해 주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어. 오늘 똑똑히 확인했다.”
몇 년 전, 라헬라가 가르쳐 줬었다.
이사벨은 빌로티안 제국의 제1정치적 전략자산이라고.
“그러니까요. 특별 왕합 회의가 어째서 열린 것인지, 정확하게 보여줬어요.”
특별 왕합 회의.
이 회의에는 말 그대로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빌로티안 황실이 그간 로스일드에게 나누어주고 있었던 ‘금력’을 회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목적.
“나도 분명히 봤다. 로스일드를 완전히 찍어누르더군. 세상에, 자기 시녀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하라고 할 줄이야. 설마 설마 했는데 이사벨이 그렇게 잔혹한 사람일 줄은 몰랐어.”
일곱 명의 왕과 그 후계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
황녀에게 사과하는 것도 아니고, 시녀에게 고개를 숙이라고 말한 것은 그야말로 완전한 복종을 뜻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잔혹하다고 표현할 건 아닌 것 같아요. 그 방식은 분명 우아하고 품격 있었어요. 이사벨 황녀는 우아하게 레이나를 상대했고, 레이나는 완벽히 패배했죠. 결국 얼굴이 새빨개져서 그 제안을 거부했고요.”
“그게 참 그래. 레이나가 만약 받아들였다면, 황실은 로스일드 공작가의 복종을 받아낼 수 있어서 좋고. 거부했다면, 로스일드와 척을 질 구실을 만들 수 있으니 좋고. 계산이 실로 치밀하고 무섭구나.”
잠시 침묵하던 발키오가 턱을 매만졌다.
“이봐, 라헬라. 내가 지금 아들을 낳으면 너무 늦겠지?”
“뭐가요?”
“이사벨을 며느리로 삼는 거 말이야. 이히이이이잉!”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말은 이히이이잉! 하고 울…….”
발키오는 슬쩍 눈치를 살폈다.
더 했다가는 라헬라가 크게 화낼 것 같아서 슬쩍 본론으로 넘어갔다.
“다가올 세상에 그보다 든든한 보증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아니, 아주 훌륭한 아들을 낳는다고 쳐요. 그다음은요?”
“결혼시켜야지. 요즘 10살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지르델에서는 몇 살부터 결혼이 가능한데요?”
“14살부터 가능하지. 그러니까 14세가 되면 곧바로 딱 결혼을 시키는 거야.”
라헬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이사벨은 세상에 없어요.”
“…….”
“잊었어요?”
발키오는 충격을 받은 듯 한참 동안 멍하니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이에게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너무 맑고 깨끗하고 순수해서, 잠깐 잊고 말았군.”
* * *
왕합 회의가 끝났다.
나는 나르모르와 함께 아레나 궁으로 향했다.
“머리도 식힐 겸, 같이 산책할래?”
“좋지요.”
나르모르는 내가 산책하자는 제안에 싱글벙글 웃었다.
“원래 걷는 거 귀찮다고 싫어하잖아. 괜찮아?”
“오늘은 안 귀찮습니다.”
“괜히 나 때문에 귀찮은 거 안 귀찮다고 말하는 거 아냐?”
“저 그렇게까지 배려 넘치는 녀석은 아닌 거 잘 아실 텐데요.”
“그건 그래.”
우리는 밤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걸었다.
나는 조금 불만이었다.
“사과 한 번 하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유리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면, 나는 레이나와 친하게 지낼 용의도 있었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거고 레이나는 많이 어렸으니까.
심지어 지금도 어린 나이였다.
그래서 사과하면 친구가 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는 친구가 되기는 틀려먹은 것 같았다.
“가끔 자존심이 목숨보다 중요한 머저리들이 있지요.”
“자기가 잘못한 걸 사과하는 거랑 자존심이랑 무슨 상관이 있어?”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알아도 사과 못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특히 지위가 높고 힘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그런 경향이 있어요.”
“우리 엄마 아빠도 나한테 잘못하면 곧바로 사과하는데?”
엄마 아빠는 무려 황후와 황제다.
만인지상의 사람들인데도 잘못한 것에 대해서는 순순히 사과한다.
“북부 대공 로베나 경도, 수석보좌관 비아톤 경도, 차석보좌관 아르미텔 경도, 수비대장 키르엔 경도, 데일사 시종장님도, 아주 존귀한 신분의 사람들인데 자기가 잘못한 건 솔직히 다 인정하잖아. 사과해야 할 땐 잘하는 사람들이라구.”
나르모르는 빙그레 웃었다.
이사벨이 투덜대는 것이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투정부리는 막냇동생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그건 강한 사람들이라서 그래요. 정말 강한 사람들만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 알거든요. 그리고 그 사람들도 황녀님 앞에서만 단단해지고 강해져요.”
“무슨 말이야?”
“일단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와는 거의 뵌 적이 없어서 모르겠고요. 비아톤 경이 황녀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사과하는 건 본 적이 없어요.”
“그, 그래?”
“키르엔 경도 황녀님 앞에서만 그렇게 온순하고요. 데일사 시종장님도 마찬가지고.”
대화의 첫 시작과는 별개로 대화의 흐름은 나르모르의 주접으로 흘러갔다.
“황녀님은 주변 사람들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아기 천사 같아요.”
“…….”
이사벨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기 천사라니.
그녀는 그녀 스스로를, ‘칭찬을 무척 좋아하는 관종’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저 정도는 좀 힘들었다.
‘응?’
그런데 저만치 멀리, 아레나 궁 앞에 누군가가 서성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르모르도 그자를 발견하고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잘생김에 본능적으로 기분이 좀 나빠졌다.
‘아룬인지 아몬든지. 저자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최근 시녀들 사이에서 아주 유명해진 견습 기사.
그가 아레나궁 앞에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