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53)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53화
아룬은 인간의 삶을 선택하면서부터 다짐했다.
‘내가 김벌꿀이었다는 것을 들키면 안 돼.’
김벌꿀은 죽었다.
죽은 벌꿀오소리가 다시 나타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일이다.
그때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모든 기억이 강제로 지워질 것이다.
‘어머니가 나를 라비나의 아들로 붙여둔 건, 나를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니까 더욱 조심해야 해.’
사실 인간 모습의 아룬 또한 자신이 용이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해야 했다.
아룬은 자신이 모든 과거와 자신의 본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나는 북부 대공 로베나의 아들이다.’
그렇게 다짐하며 생활했다.
검은 고래 기사단의 훈련은 쉽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포기할 정도는 아니었다.
덕분에 고참들로부터 이번 신입이 꽤 괜찮다는 평가도 얻고 있었다.
그의 맞선임인 견습 기사 크리스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고귀한 도련님이라서 금방 포기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녀석이잖아?’
처음에는 다들 철없는 도련님의 치기 어린 도전이라고들 생각했다.
조금 갈구면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갈 거라고 했다.
그렇지만 아룬은 묵묵히 잘 견뎌냈다.
‘먼발치에서나마 이사벨을 볼 수 있다면.’
그거면 되었다.
이게 인간들이 말하는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 사랑을 생각하기에는 나이가 너무 어린 탓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이사벨뿐이었다.
그리고 왕합 회의가 있던 날.
그는 드디어 이사벨을 가까이서 만날 수 있었다.
‘……이사벨.’
멀리서부터 이사벨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존재하지 않는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이사벨을 보면 그냥 반갑다고 뛰어가서 안겼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새로운 기억,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야 해.’
가까이 다가온 이사벨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1년 사이에 부쩍 커서 이제는 어린아이 같지 않았다.
‘어째서 그렇게 큰 거야?’
어쩌면, 이제는 나이를 먹고 싶어진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나이 먹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이 이사벨의 성장을 막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난 1년 사이, 갑자기 커버렸다.
늘 아이이고 싶었던 이사벨이 이제는 어른이 되고 싶어진 것 같아서.
그 이유에 왠지 김벌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괜히 마음이 아파왔다.
그냥 먼발치에서 이사벨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이사벨과 대화하고 싶어.’
그동안 잘 지냈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었는지.
김벌꿀이 죽고 나서 많이 슬퍼했는지.
그랬다면 이제 슬퍼할 필요 없다고, 저 손을 꼭 잡아 위로해 주고 싶었다.
‘제발. 정신 차리자.’
과거의 잔재는 지워야 한다.
새로운 기억과 새로운 추억을 쌓아가야 한다.
김벌꿀이 아닌 아룬으로서, 이사벨과 친해져야 한다.
‘이사벨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했잖아.’
나는 김벌꿀이 아니다.
나는 김벌꿀이 아니다.
나는 김벌꿀이 아니다.
그러니까 검은 고래 기사단의 막내답게, 제국을 위하여 헌신하는 기사답게, 그렇게 치열하게 살다 보면 이사벨과의 접점이 생길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이사벨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런데 왜…….’
정신을 차려보니 아레나궁 앞이었다.
여기 오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마치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았다.
‘돌아가자.’
그런데 저만치 앞에서 이사벨이 걸어오고 있었다.
나르모르와 함께.
* * *
나르모르가 아는 체했다.
“요즘 소문이 자자한 아룬 공자님 아니십니까?”
“……제 소문이 자자합니까?”
“예. 불여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불여우가 무엇인지 모르겠군요.”
나르모르의 태도가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다는 사실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룬은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그리 적극적으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시녀들에게 그렇게 추파를 던지신다고.”
“그런 적 없습니다.”
“다 자길 보며 예쁘게 웃어줬다고 자랑하던데요?”
나르모르는 인상을 찡그렸다.
어제도 유리가 한껏 자랑했다.
아룬 공자님과 자기가 눈이 마주쳤고, 아룬 공자님이 씨익 웃어줬다나 뭐라나.
“제가 말입니까?”
아룬으로서는 금시초문이었다.
애초에 북부 대공의 아들로 설정된 만큼, 그렇게까지 상냥한 성격은 아니었다.
누군가를 보고 웃어준 기억은 전혀 없었다.
웃어준 사람은 없는데, 그 웃음을 본 사람은 가득한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뭐, 그러시겠죠.”
아룬은 저런 시시껄렁한 시비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흘려보내 왔다.
제국의 기사로서 그 자리에 걸맞게 행동해야 하니까.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아닙니다, 황녀님.”
잠자코 대화를 듣던 이사벨은 찔끔 놀랐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아룬 공자.”
“…….”
아룬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사벨에게만큼은 결백을 증명하고 싶었다.
‘벌꿀오소리의 습성이 남아 있는 건가.’
어른(성룡)들이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아가 제대로 확립되기 전, 다른 생명체의 기억을 가지고 있으면 자아가 섞인다.
용으로서의 자아가 완벽해지지 못하고 이상해진다.
‘나는 이사벨에게만 웃어주는, 웃음이 헤프진 않은 벌꿀오소리다. 뭐 이런 느낌인 것 같군.’
그 마음을 이성으로 억눌렀다.
지금은 벌꿀오소리가 아니라 인간이었으니까.
이사벨이 물었다.
“아룬 공자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나르모르가 대답을 가로챘다.
“보나마나 시녀들과 농담 따먹기라도 하려고 왔겠죠.”
“아! 아룬 공자는 시녀들과 격의 없이 잘 지내는 분인가 봐요.”
아룬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런 적 없다고 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아룬은 정말로 억울했다.
시녀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예, 뭐, 그런 걸로 하죠.”
“그런 걸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적이 없습니다, 나르모르 대표.”
이사벨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저는 그렇게 격의 없이 친하게 지내는 거 좋아해요. 아룬 공자님은 좋은 사람인가 봐요. 어쩐지, 유리도 아룬 공자님에 대해서 엄청 칭찬하더라.”
“…….”
“앞으로도 그렇게 지내줘요. 아, 모르시겠지만 유리는 제 시녀이자 소중한 친구랍니다. 혹시 만나게 된다면 다정하게 대해주면 좋겠어요.”
아룬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시녀들과 친하게 지낸 적 없다.
이건 정말이었다.
‘기분이 정말 별로군.’
이건 역시, 벌꿀오소리로서의 자아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벌꿀은 이사벨 외의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마음을 안 줬다.
이사벨바라기였다.
그런데 이사벨이 자꾸 다른 사람을 다정하게 대해주라고 말을 하는 것이 싫었다.
‘내가 다정하게 대하고 싶은 사람은 이사벨, 너뿐이야.’
그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약간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생각했다.
‘음, 아무리 봐도 거동이 수상해. 왜 화가 났지? 그리고 왜 아레나궁에서 서성이고 있는 거람?’
그녀는 아룬이 몹시 수상했다.
원작 남주가 왜 황궁에 왔으며, 황궁 안을 구석구석 돌아다니고 있단 말인가.
‘혹시 우리 가족에게 위해가 될 거라면 미리 파악해 놓는 것이 좋겠어.’
그래서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잠시 얘기 좀 할래요?”
“예, 아, 닙니다.”
이상했다.
방금 분명 ‘예!’라고 말하려는 걸 간신히 참은 느낌인데.
“죄송합니다. 지금 순찰 임무 중이어서요.”
“저랑 티타임을 갖는 것이 싫어서 그래요?”
“아닙니다. 제게는 영광이지요. 그러나 임무 중이어서 어쩔 수 없습니다.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겠습니다.”
결국 이사벨의 제안을 거절하고 숙소로 돌아온 아룬은 깊게 심호흡했다.
‘위험했어.’
하마터면 좋다고 말할 뻔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이사벨을 꽉 껴안을 뻔했다.
(몸집이 작았던 김벌꿀은 늘 이사벨에게 안겼으나, 김벌꿀은 자기가 넓은 품으로 이사벨을 안아주었다고 생각했다.)
‘이사벨을 어떻게 대해야 하지?’
이제 갓 아룬이 된 김벌꿀은 모든 것이 어색하고 서툴렀다.
이사벨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이사벨을 만나면 그저 기쁘기만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사벨의 눈빛이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때와 지금의 간극 때문에 마음이 무척 어렵고 심란했다.
‘이사벨과 다시 친해지고 싶은데.’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 * *
특별 왕합 회의 후, 며칠 뒤.
나는 나르모르와 함께 수도의 빈민가로 향했다.
“참 뿌듯해.”
“네? 뭐가요?”
속마음이 나도 모르게 나왔나 보다.
“천재적인 재능을 썩히면서 빈민가에서 뒹굴거리던 소년이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됐잖아.”
“저는 그냥 사용인일 뿐인데요?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호는 황녀님이죠.”
“……아, 맞다. 그런 걸로 하기로 했지?”
“그런 걸로 하기로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겁니다, 황녀님.”
어쨌든 나르모르는 이 빈민가의 사람들을 위해 새집을 지어주고 학교와 보육원을 설립해 주는 봉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최근 건립한 세이벨 보육원에 도착했다.
사실 이것도 ‘이사벨 보육원’으로 하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세이벨’로 바꿨다.
나르모르는 뭐든지 내 이름을 넣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어서, 말리느라 힘들다.
나는 저만치 멀리, 하얀색 앞치마를 입고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카린 선생님!”
이곳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버려진 아이들이 무척 많았다.
카린 경은 이곳에 종종 나와 아이들을 보살피곤 했다.
이곳에서 봉사하며 카린 경의 표정도 꽤 밝아졌다.
어린 날의 상처를 봉사하며 씻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요즘은 거의 여기서 살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황녀님, 오늘도 오셨군요.”
“그럼요. 보육원을 지어주고 땡이면 안 되잖아요. 저는 또 다른 어린 카린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거든요.”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카린이 또 나타나게 될 테니까.
“어? 선생님, 웃었다. 방금 웃었죠?”
방금 분명히 희미하게 웃었는데.
웃음을 들킨 것이 창피한지 카린의 귓불이 조금 붉어졌다.
이런저런 봉사를 하다 보니 벌써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문득 감회가 새로웠다.
‘예전에는 도움을 받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어엿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많은 아이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아서 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카린과 함께 길을 걸었다.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예전보다 훨씬 길이 넓고 쾌적해졌다.
더 이상 지저분한 빈민가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골목길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카린! 너는 카린이 아니냐?”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는데 몰골이 초췌했다.
여기저기 찢어진 넝마를 입고 있었고 체취가 고약했다.
꽤 오래 굶었는지 갈비뼈가 앙상했다.
카린의 눈이 커졌다.
“당신은 설마……!”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