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5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56화
아빠는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대답했다.
“오해다.”
“흐트러짐이 없다고 해서 괴롭힌 것이 안 괴롭힌 것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오해야.”
“……정말요?”
“아룬 공자한테 물어보거라.”
내가 아룬에게 시선을 옮겼다.
아룬 공자가 나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와…….’
나는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아룬을 바라볼 뻔했다.
이거 주인공 보정이지?
이건 정말 차원이 다른 미모인데.
미모로만 치면 아빠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느낌이 조금 달랐다.
혈육의 미모를 접할 때와 낯선 이의 미모를 접할 때의 체감 차이란 어마어마했다.
또래여서 더욱 그런 것 같았다.
‘정신 차려!’
진짜 위험했다.
소설 속 인물들이 아룬의 미모에 감탄하기 바빴다는데 그게 거짓이 아니었다.
‘검은색 머리에 검은색 머리카락.’
그 때문인지 어찌 보면 아빠랑 닮은 구석도 있었다.
사실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는 질리도록 봐왔었다.
한국 사람들은 대부분 검은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 세상에 흑발 흑안은 오로지 두 명밖에 없는 느낌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 아닐 거다.
저 두 사람의 미모를 접하는 순간, 세상 모든 사람의 얼굴은 기억에서 지워지게 마련이니까.
나는 최대한 정신을 붙잡으며 다시 말했다.
“아룬 공자, 대답을 해줘요.”
“황제 폐하께서 견습 기사인 저를 이곳에 불러 세워놓았다는 것만으로는 크게 핍박받았다 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핍박받았네.”
이를테면 대기업 인턴이 회장님 만난 기분?
그것보다 압박감은 300배 정도 심할 거 같다.
아, 물론 여기서 300배는 관용적인 표현일 뿐 실제 수학적인 수치는 아니다.
나는 감성이 충만한, 문이과 짬뽕형 인재지만 유리 앞에서 이런 말 하면 피곤해질 거다.
아룬이 다시 말했다.
“저를 힘 있는 눈동자로 노려보시긴 했으나 물리적 핍박은 없었습니다.”
“괴롭혔네.”
나는 아빠를 바라보았다.
아빠는 아룬을 노려보다가 갑자기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 티 났다.
“그러므로 황녀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묘하게…….”
“예?”
잘은 모르겠는데, 묘하게 비아톤 경과 비슷한 느낌이 났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자리를 비워주…… 아니, 아니다. 같이 얘기하면 좋을 것 같아요. 마침 아룬 공자는 대공님의 아드님이시기도 하니까.”
하늘섬에 가고 싶다는 얘기를 나눴다.
* * *
저번에는 토론회 때문에 간 거여서 제대로 구경을 못 했다.
아름다운 곳이 많다는데 여행을 가보고 싶다.
……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바로 내일 출발하지.”
“네?”
이사벨은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아룬이 대신 해석해 주었다.
“아마도 황제 폐하께서 함께하실 예정인가 봅니다.”
“아빠가, 아니, 아바마마가요?”
“사석에서는 아빠라 불러도 좋다.”
“아빠는 바쁘잖아요.”
24시간 중 거의 20시간을 검술 수련에 쏟아붓는 사람이라는 걸 안다.
그게 검술 제국 황제의 본업이기도 했고.
그런데 이런 한가로운 여행에 함께해 준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비아톤도 여러모로 바빠서 장기간 출장은 어려운 상황이고, 그렇다면 내가 같이 가야 하는 것 아니겠느냐?”
옆에서 아룬이 다시 해석해 주었다.
“황녀님의 호위로는 정말 믿을 수 있고 실력이 출중한 사람이 붙어야만 합니다. 황제 폐하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비아톤 경밖에 없는데, 황제 폐하께서는 비아톤 경을 바쁘게 만들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바쁘게 만들다니요?”
“안 바쁜 사람도 바쁘게 만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반대로 말하면 바쁜 사람도 안 바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론은 비아톤을 바쁘게 만들 예정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황제 폐하께서 직접 딸과의 여행에 함께하시겠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사벨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되잖아요.”
황제의 본업은 검술 수련이다.
이사벨은 론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된다.”
“검술 수련 할 시간을 많이 빼앗길 거예요. 저는 아빠한테 민폐 끼치는 딸이 되고 싶지 않아요.”
“마침 로베나와 대련이 약속되어 있어서.”
“네?”
금시초문이었다.
보통 황제와 대공의 대련이 잡히면 소식지에서도 난리가 난다.
‘아빠 목소리가 좀 작아진 것 같은데.’
약간 떳떳하지 못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로베나 언니랑 대련이 약속되어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렇다.”
“왜 저는 이렇게 아빠가 거짓말하는 것 같죠?”
론의 몸이 움찔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는 철혈의 황제일지 몰라도, 이사벨 앞에서까지 철혈일 수는 없었다.
익숙지 않은 거짓말을 하려니 티가 날 수밖에.
“아빠가 거짓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론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물어볼까 말까를 짧게 고민하다가 이내 물었다.
“내가 같이 가는 것이 싫으냐?”
“좋아요.”
이사벨은 저도 모르게 푸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놀리는 맛이 있단 말이야.’
저렇게 잘생긴 사람이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아, 이러면 안 돼.
뭔가 취향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야.
‘약간 귀여운 것 같기도 하고.’
그러고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큰일이야. 주변 사람들의 주접을 닮아가는 것 같아.’
출발은 내일 오전이었다.
* * *
아룬은 숙소로 돌아와 명상에 잠겼다.
‘눈을 뗄 수가 없었어.’
벌꿀오소리의 눈으로 본 이사벨과 인간의 눈으로 본 이사벨은 너무 달랐다.
괜스레 심장이 쿵쾅거려서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웠다.
이사벨의 말 하나하나, 숨소리 하나하나를 모두 기억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그 기억이 무엇보다 소중한 느낌.
‘잘하고 있는 거겠지.’
그는 앞으로 어떻게 이사벨을 대해야 할지, 김벌꿀이 아닌 아룬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꽤 오래 고민하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오늘 확신을 내릴 수 있었다.
‘내 롤모델은 비아톤이다.’
김벌꿀에게 비아톤은 아니꼬운 경쟁자였다.
비아톤이 늘 이사벨의 관심과 사랑을 빼앗아갔었으니까.
김벌꿀은 그렇게 느꼈다.
‘생각보다 잘한 것 같아.’
집무실에서 빠져나올 때, ‘묘하게 비아톤 같은 느낌이 나서 혐오스럽구나’라는 론의 말을 들었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안 그래도 김벌꿀의 눈으로 비아톤을 많이 관찰했었고, 많이 다투었다.
그는 애증의 비아톤을 떠올리며 다음 날을 기다렸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안 되겠군.’
새벽 3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레나궁 입구에 섰다.
‘여기서 기다리면 1초는 빨리 볼 수 있겠지.’
그는 기쁜 마음으로 이사벨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동이 트고 날이 밝아왔다.
“아룬 공자?”
“에스코트하러 왔습니다.”
“언제부터 기다렸어요? 안에 기별을 주지 그랬어요? 그럼 조금 더 서둘렀을 텐데.”
“방금 왔습니다.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현재 시각은 8시 30분.
이사벨을 기다리는 5시간 30분이, 아룬에게는 찰나였다.
아룬이 손을 내밀었다.
이사벨은 그 손을 맞잡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러면 또 황명 어기는 거 아니에요? 또 나랑 대화하잖아요.”
“여행 기간 도중에는 대화해도 된다고 허락받았습니다.”
“그래요?”
“예, 그리고 그게 아니었다고 해도 최대한 황명을 어길 생각이었습니다.”
“뭐라고요?”
이사벨은 웃음을 터뜨렸다.
“황녀 앞에서 그렇게 말해도 되는 거예요?”
“황녀님께서 비밀을 지켜주시리라 믿습니다.”
“왜요? 제가 왜 비밀을 지켜야 해요?”
“정확히 말하면 부탁드립니다. 저는 황녀님과 대화를 나누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왜요?”
“첫사랑이라서요.”
“네?”
아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방금 뭐라고 한 거 같은데 잘 기억이 안 났다.
머릿속으로 ‘내가 비아톤이라면 어떻게 말을 할까’를 열심히 계산하다 보니, 말이 본능적으로 튀어나갔다.
‘김벌꿀의 자아 때문이다.’
김벌꿀은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가는 타입이었다.
그 자아가 너무 강하게 영향을 끼쳐서 이런 실수들이 나오곤 했다.
이사벨이 입술을 살짝 내밀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저를 언제 봤다고 첫사랑이라는 거예요?”
이사벨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했다.
갑자기 나르모르의 말이 떠올랐다.
‘예. 불여우라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아무래도 바람둥이 설정인 것 같았다.
이사벨의 마음이 차게 식었다.
‘그냥 보기에만 아름다운가 보다.’
소설 속 인물들은 아룬이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말하면, ‘꺅! 네! 저도 사랑해요!’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사벨은 달랐다.
애초에 아룬을 조금 경계하고 있던 차에 난데없이 첫사랑 고백을 해오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마음에 전혀 와닿지 않았다.
당황한 건 아룬도 마찬가지였다.
본능대로 외쳤을 뿐, 그는 본인이 뭐라고 했는지 기억도 못 했다.
“제가 실언을 한 것 같군요.”
“그래요, 앞으로 저를 상대로 그런 농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죄송합니다.”
얼마 후, 론을 태운 마차가 이사벨 앞에 도착했다.
이사벨과 아룬은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 안.
먼저 자리해 있던 론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아룬에게 향해 있었다.
“사실 길잡이가 필요하지 않는 여정이다만.”
“하늘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렇겠지, 도둑질을 배우기 위해 얼마나 쏘다녔겠느냐.”
“……저는 도둑질을 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 할 예정으로 보인다만.”
“혹 황녀님과의 오붓한 여정에 끼어들어서 불편하신 것입니까? 그렇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만, 그 외의 다른 것으로 저를 핍박할 명분은 없으신 것 같습니다, 폐하. 저는 하늘섬 태생으로 하늘섬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말하는 모양새가 꼭 제정신인 척하는 비아톤 같구나.”
“수석보좌관에 비하면 한참 부족합니다. 그러나 칭찬으로 알고 정진하겠습니다.”
“두고 보겠다.”
“예, 폐하.”
“앞으로 모든 행동을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론이 아룬을 노려보는 가운데,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가운데 낀 이사벨은 무척이나 불편해졌다.
바보가 아니라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아빠, 왜 그렇게 아룬 공자를 구박하세요?”
“구박을 했다?”
“너무 불편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요.”
“…….”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것이 빌로티안의 황제 폐하잖아요. 그런데 왜 약한 자를 이렇게 핍박하시는 거예요?”
“약하다고? 저자가 약자란 말이냐?”
“네. 아빠는 제국의 황제고, 지금의 아룬 공자는 그저 견습 기사일 뿐이잖아요.”
론이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말을 이었다.
“이사벨. 저놈은 그렇게 약한 놈이 아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