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6화
론은 무뚝뚝한 표정을 유지했다.
“카린에게 수학을 다시 가르치라 일러야겠군.”
“……네?”
“나는 열여섯만큼 작은 수를 보지 못했다.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도 너무 작은 숫자라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배우지 못한 것이냐? 대체 무엇을 배우고 있는 것이냐?”
화가 났다.
저 아이에게 남은 가장 큰 숫자가 열여섯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열여섯 번만 피곤해 달라는 말이 칼이 되어 론의 가슴에 꽂혔다.
많이 아팠다.
론은 이사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길로 이사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만지니 피곤하군.”
이사벨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릎을 꿇으니 피곤하고.”
이사벨의 눈을 바라보았다.
“너를 바라보니 피곤하다.”
벌써 세 번 피곤했다.
론은 이사벨의 머리에 얹었던 손을 내렸다.
“손을 움직이니 피곤하고.”
이사벨의 작은 손을 잡았다.
“손을 잡으니 피곤하고.”
이사벨의 손은 무척 작았다.
조약돌처럼 작았는데, 조약돌처럼 단단하지는 않았다.
론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사벨을 끌어당겼다.
“너를 당기니 피곤하고.”
이사벨의 몸이 론의 품에 폭 안겼다.
“너를 안으니 피곤하다.”
단련된 검술가인 그의 청력에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아직은 분명히 세찬 박동이었다.
“네 심장 소리를 한 번 들으니 피곤하고.”
저 세찬 박동은 15년 후에 멎을 것이다.
그러면 론의 세상도 멈출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번 들으니 더욱 피곤하다.”
그리고 속으로만 말했다.
‘어떻게 해야 네게 남은 가장 큰 숫자가 16이 아니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느라 피곤하고.’
겉으로 말했다.
“평안한 침대에서 자지도 못한 채 모질이 황녀와 시간을 보내느라 피곤하고.”
“…….”
“그 가치 없을 것이 분명했던 이 시간이 너무나 값진 것이 의아하여 피곤하고.”
말을 하다 보니 눈이 붉어졌다.
절로 깨달았다.
빌로티안 검술을 익힐 수 없을지라도, 이 아이는 분명히 빌로티안의 황녀이며, 그와 세르나의 하나뿐인 딸이었다.
자식에게 정을 느껴본 적 없는 자가 자식에게 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완연히 새로운 감정을 배우게 되었다.
“새로운 것을 배우느라 피곤하고.”
론의 품에 안긴 이사벨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말투는 무뚝뚝했으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론의 감정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론의 모든 말속에, 이사벨을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흐에에엥!”
론은 엄지손가락으로 이사벨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보 황녀의 눈물을 닦아주느라 피곤하다.”
이번에도 속으로 말했다.
‘내 눈물을 참느라 피곤하다.’
그가 말했다.
“벌써 열여섯 번이나 피곤했다. 이제야 알겠느냐? 나는, 열여섯이 아니라 일백육십, 아니, 일천육백 번이라도 피곤할 것이다.”
이사벨이 훌쩍거렸다.
론이 듣기에는 분명 애처로운 목소리로 론을 불렀다.
“아빠.”
“말하여라.”
그 애처로운 목소리에 응답하듯 론 또한 간절한 눈으로 시한부인 딸을 바라보았다.
시한부 딸이 입을 열었다.
“열세 번이었어요.”
“…….”
수리 논술전형으로 한국 대학교에 합격했었던 이사벨은 숫자에 꽤 정확한 편이었다.
* * *
겉으로 열세 번을 말했고, 속으로 두 번을 말했다.
그러니 이사벨이 듣기에는 열세 번이 맞았다.
“아니. 열여섯 번이다.”
그렇지만 론의 기준으로는 열다섯 번 피곤함을 말했다.
나머지 한 번은 이제 곧 말할 예정이었다.
그렇게 계산하면 열여섯 번이 맞았다.
“분명히 열세 번이었어요.”
“아니. 열여섯 번.”
“똑똑히 기억하는걸요.”
사실 이사벨은 열세 번이든, 열여섯 번이든 상관없었다.
그냥 론이 그렇게 말해주는 것이 좋았다.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다.
‘세 번 더 말해주세요. 그냥. 더 듣고 싶어요.’
그래서 말했다.
“진짜 열세 번이었어요.”
“열여섯 번이라니까.”
“……아빠는 바보예요.”
그 말에 론은 침묵하고 말았다.
자식에게 바보라는 말을 들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저도 모르게 바보라는 말을 내뱉은 이사벨은 흠칫 놀랐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헤헤 웃었다.
“헤헤.”
“웃지 말거라.”
“웃으면 안 돼요?”
자신의 죽음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으면서 저렇게 웃는 게 너무 아팠다.
그러나 아픈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체통과 품격을 지켜야지.”
“품격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법이라고 하셨잖아요.”
“지금은 있을 때다.”
“싫어요.”
론이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바보라고 말하는 데 이어 대놓고 싫다고 말했다.
예의에 무척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나쁘지가 않군.’
‘바보’라든가, ‘싫어요’라는 말을 듣자, 왠지 딸과 친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무척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비아톤에게 서신을 보내야겠군.’
저도 모르게 씨익 웃고 말았다.
비아톤에게 ‘오늘 이사벨이 내게 바보라고 말했다. 뿐만 싫다고까지 말했다. 아주 예의가 없지 않느냐?’라고 써서 보내면, 비아톤은 무척 짙은 패배감을 느낄 것이 분명했다.
* * *
시간이 조금 흘렀다.
이사벨은 문득 이 자리에 세르나가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엄마는요?”
“로스일드 공작과 재무 회의가 있어 일찍 떠났다.”
“앗, 그러고 보니…….”
이사벨은 간밤에 꿨던 꿈을 기억해 냈다.
“엄마가 새벽에 제 이마에 키스해 주는 꿈을 꿨어요. 저한테 잘 자라고, 사랑한다고 해줬어요.”
아마도 그건 꿈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문득 행복해졌다.
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모든 것을 다 가진 삶은 역시 축복이었다.
“오늘은 어디 안 가세요?”
“어디 간다.”
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좋아한다는 책은 버려두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뭘 멀뚱멀뚱 서 있느냐? 따라오지 않고.”
론은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표정이었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손을 내밀고 있는 론도,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이사벨도, 론이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어디 가시는데요?”
“어서 잡기나 해라. 이게 열여섯 번째 피곤할 일이니.”
이사벨이 활짝 웃었다.
기분이 너무 좋아져서 말이 아무렇게나 나왔다.
그녀는 아직 5살의 육체였고, 긴장이 풀리면 발음도 풀렸다.
얼른 론의 손을 잡았다.
“성은이 망곡함미다.”
“뭐?”
“아무것도 아님미다.”
론은 자신의 손에 담긴 작은 손을 또 느껴보았다.
정말 작고 소중했다.
“네 거처를 옮기는 날이니 내가 에스코트해 주마.”
론의 말투는 무척 딱딱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일이라 익숙하지 않아서 더 그랬다.
“정말 아빠가 에스코트해 주시는 거예요?”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거라. 내가 무척 싫어하는 행동이다.”
“그렇지만 방금까지는 열여섯 번 말씀하셨는걸요?”
“대답해 주느라 열일곱 번 피곤하다.”
속으로 또 말했다.
이 열일곱이 백칠십이 되게 하겠노라고.
“기뻐요.”
이사벨은 론의 손을 잡은 채 활짝 웃었다.
론은 이사벨의 시선을 피했다.
“웃음이 헤픈 아이로군.”
“아 참.”
이사벨이 론의 손을 놓았다.
론은 순간 큰 상실감을 느꼈다.
꼭 쥐고 있어야 할 것이 사라져 버린 듯, 가슴에 구멍이 하나 난 것 같았다.
다행히(?) 이사벨은 금방 돌아왔다.
“책은 제가 챙겼어요. 아빠가 좋아하는 거니깐.”
“…….”
이사벨은 책을 한 팔로 꼭 안았다.
그리고 다시 달려가서 론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무척 높은 곳에 있어서 팔을 바짝 들어올려야 했다.
‘아주 큰 보자기 같다.’
론의 손이 이사벨의 손을 감쌌다.
론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자.”
이사벨은 황제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아레나 궁으로 향했다.
빌로티안 5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 * *
아레나 궁의 관리 책임자는 시종장 데일사였다.
그녀는 빌로티안 황궁 내 최강의 검대 중 하나인 ‘검은 고래’를 지휘하였던 뛰어난 검술가였으나 큰 부상을 입어 시종장의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이었다.
“황제 폐하. 인사 올립니다.”
“데일사. 오랜만이군.”
“직접 에스코트를 해오신 겁니까?”
데일사의 눈이 황녀에게로 향했다.
이사벨이 방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이사벨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저는 이사벨이라고 하고요. 5살이고요. 황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데일사 경.”
“제게 그렇게 허리를 굽히시지 않아도 됩니다.”
시종장 데일사와 황제 론은 전우이기도 했다.
아주 오래전, 그녀는 뛰어난 무위를 바탕으로 위기에 처했던 론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따라서 둘 사이에는 전우애를 바탕으로 한 끈끈한 유대감이 존재했고, 론은 데일사의 권한과 권위를 충분히 존중해 주었다.
그건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황제 앞에서 황녀를 나무라는 셈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말이기에 따로 지적하지는 않았다.
“왜요?”
“저는 시종장이고, 황녀께서는 황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데일사의 시험 아닌 시험이었다.
이러한 경우, 황녀는 황녀다운 기품으로 시종장에게 경고해야 했다.
‘내가 정말로 황자들의 궁전에 들어왔구나.’
500년간 황자들의 궁전이었다.
500년 만에 내가 태어났으니, 이제는 그 말도 바뀌어야겠지만…….
아무튼 이곳은 이전과는 다르다.
황녀로서의 올바른 모습을 보여야 했다.
‘나는 황녀로 태어났으니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황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그중 일부였다.
이사벨은 론의 손을 잡은 채 일부러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시종장이라고 안 불렀는걸요. 제가 무어라 불렀는지 귀담아듣지 않으신 걸까요?”
추궁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사벨은 밝게 웃고 있었다.
시종장 데일사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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