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6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66화
가칭 ‘이사벨릭 시스템’.
그것은 말하자면 지구의 전기 시스템과 매우 흡사했다.
전국 곳곳에 ‘마력 발전소’를 설립하고 마력 전선을 통하여 일반 가정에도 마력을 공급한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이러면 그동안 마도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일반 백성들도 마도 문명을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법 연방을 주축으로 한 마법이 수백, 수천 년간 발달해 왔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먼 얘기였다.
마탑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지만, 대다수의 일반 백성들은 해가 지면 잔다.
마도 문명의 혜택은 귀족들과 마법사들에게만 주어지던 것이었으니까.
“물론, 막대한 시간과 천문학적인 돈이 소요될 것입니다.”
“귀찮아하는 표정인데.”
“매우 귀찮습니다. 새로운 것을 도입하려면 어마어마한 반대에 부딪히게 될 테니까요. 테이사벨 이동 관문 때와 라면 때도 보셨다시피 말입니다.”
실제로 나르모르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평생 펑펑 놀고먹고 써도 모자라지 않은 부를 축적했으니까.
더 이상의 부는 무의미할 정도였다.
“그러나 황녀님이 기뻐하실 것 같습니다. 그분은 누구보다 백성을 사랑하시는, 누가 뭐래도 제국의 제1황녀시니까요.”
참고로 이사벨은 ‘5황녀’라 불렸었다.
성별과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1황자~5황녀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년 전, 황명에 의거하여 호칭이 변경되었다.
이제 이사벨은 제국의 ‘1황녀’였다.
“저는 가끔 알페아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황녀님을 추억합니다. 보육원을 찾았을 때의 황녀님을 떠올립니다.”
“…….”
“그때의 황녀님은 정말 햇살 같았습니다. 황궁의 봄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으셨죠.”
어엿한 청년 사업가가 된 나르모르는 가볍게 웃었다.
“황녀님은 반드시 눈을 뜰 거니까, 황녀님 보시기에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습니다. 폐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알페아와 지르델을 시작으로 하여 이사벨릭 시스템을 구축해 보겠습니다.”
* * *
“세상에, 저기 봐, 아룬 경이 오고 계셔.”
“저렇게 멀리 계셔도 빛이 나네.”
아레나 궁의 시녀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비단 아레나 궁의 시녀들만 그런 게 아니었다.
아룬은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단 한 번도 없는데, 이미 사교계의 꽃으로 불리고 있었다.
수많은 영애가 아룬의 사진을 간직하며 몇 번씩이고 그 사진을 꺼내보았는데, 이것은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너도 아룬 경 덕질하니?”
“너도?”
“나도.”
덕질.
그것은 아룬 때문에 탄생한 하나의 신조어였다.
“가, 가까이 오시고 계셔. 어, 어떡하지?”
“침착해. 다소곳하고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자.”
“호, 혹시 말을 거시면 어떡하지? 심장마비 걸리면?”
“걱정 마. 그럴 일 없어.”
아룬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히(?) 심장마비가 걸릴 일 같은 건 벌어지지 않았다.
시녀들은 아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봤어?”
“뭘?”
“날 보고 웃어주신 거 같아.”
“응, 착각이야.”
“진짜야.”
“너 아직 덕질 초기라서 그래. 누구나 그런 망상을 한 번씩 하는 때가 와.”
“어쩜 저렇게 아름다우실까.”
“그 마음 백 번 이해하지.”
이런 일은 황궁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룬이 한 번 지나가기라도 하면, 많은 영애의 대화 주제가 아룬으로 바뀌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그 도도하고 시크한 모습조차도 너무나 매력적이지 않니?”
“아룬 경과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영애가 한 명도 없대. 연서에 답장을 받은 영애도 없고.”
실제로 아룬에게는 연서가 하루에도 수천 통씩 쏟아진다.
최근 황궁 우편물 관리부서에서는 아룬 때문에 인력을 증원할 정도였다.
한편, 아룬은 자신을 둘러싼 기이한 현상들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검술과 이사벨뿐이었다.
“이사벨.”
아룬은 누워 있는 이사벨의 손을 잡았다.
다행히, 오늘도 이사벨의 손은 따뜻했다.
“나 왔어.”
매일매일,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사벨의 방을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황제와의 대련이 끝나면 대련이 끝났다고 알려주었고, 맛있는 것을 먹었으면 맛있는 것을 먹었다고 알려주었다.
“유리모르 제과에서 새로 나온 디저트를 먹어봤는데 정말 맛있더라. 달콤해서 네가 굉장히 좋아할 것 같아.”
그는 포장지에 정성스레 싼 휘낭시에 몇 개를 협탁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눈 뜨면 먹어. 엄청 맛있어.”
당연히 이사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7년째 반복되는 일상이었고, 이사벨에게서는 미동도 찾아볼 수 없었으나 아룬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게 지금의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시간은 계속 흘러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도 그리 길지 않아. 그렇지만 나는 네가 눈을 뜨면 좋겠어. 우리는 할 얘기도 많고, 앞으로 쌓아가야 할 추억도 많으니까.”
이사벨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포기하지 마. 분명 일어날 수 있어. 네가 세상을 많이 바꿔놓았어. 네 눈으로 꼭 직접 봐야 해. 네가 일으킨 기적들이 얼마나 대단한지 말이야.”
몇 시간이 흐르고, 마리아가 찾아왔다.
그녀는 최근 ‘기적의 성녀’라 불리는 위대한 여인이었다.
세상 사람들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었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면 늘 죄인 같은 마음이었다.
마리아는 이사벨의 가슴에 손을 얹고 신성력을 불러일으켰다.
마리아의 손에 하얗게 물들며 이사벨의 몸을 따스하게 덮었으나 이사벨은 눈을 뜨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 힘이 아직도 많이 부족하네요.”
“그대가 죄송할 일은 아닙니다.”
마리아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아룬 경은 오늘도 이곳을 지키고 계실 건가요?”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7년 동안 한결같았기에 별로 특별할 것은 없었다.
“저는 나가볼게요.”
“예, 살펴 가십시오.”
마리아가 나가고 난 뒤 아룬은 다시 이사벨의 손을 잡았다.
‘보고 싶어.’
지금 보고 있는데도 보고 싶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기묘한 감정이었다.
‘내 이 감정은 무엇일까?’
깨어나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그리움?
어린 시절, 추억을 함께한 소꿉친구에 대한 애정?
김벌꿀과 보호자의 깊이 있는 유대감?
처음에는 그런 건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한 달, 두 달, 석 달, 그리고 1년, 2년이 흐르면서 단순히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점차 깨달아갔다.
‘너무 그립고.’
단순히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절절했고.
‘얘기를 나누고 싶고.’
우정이라 표현하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아룬의 세상에는 어느새 이사벨밖에 남지 않았다.
이사벨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었다.
그저 이사벨이 그의 전부였다.
‘목이 말라.’
애가 탔다.
아무리 차가운 물을 마셔도 가슴이 답답하고 묵직했다.
이사벨의 말 한마디, 따뜻한 눈빛 한 줌이 이 갈증을 없애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사벨. 나, 너무 애가 타.”
오로지 이사벨이라는 단비만이 그의 메마른 마음을 적셔줄 수 있었다.
3년이 지나고 4년이 되었을 때.
아룬은 결국 깨달을 수 있었다.
이것은 우정이 아니라고.
이것은 분명히 사랑이었다.
그 외에는 이 감정을 설명할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나한테는.”
5년째가 되었을 때.
황제에 버금가는 검술가라 불리며 또 한 명의 절대자라 불리기 시작한 그는 이사벨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는 이제 그가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았다.
“네 사랑이 필요해.”
사랑이라 표현했지만 그리 거창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잘 있었어?
그 한마디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사벨은 오늘도 그 말 한마디를 해주지 않았다.
* * *
얼마나 잠을 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겠구나, 어렴풋이 느낄 뿐이었다.
그런데 또 언제부터인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맛있는 디저트를 사 왔어. 신상이래. 여기 둘 테니까 깨어나면 먹어.”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이 목소리는 실체가 없는 허상처럼 금방 흩어져 버렸다.
‘졸려.’
자도 자도 계속 졸렸다.
이따금 꿈처럼 이런저런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내 모든 기억 속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왔어, 이사벨.”
어딘지 모르게 또 익숙한 목소리.
또 잠을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게 되겠지만, 저 목소리를 듣고 있는 순간에는 기분이 좋아졌다.
내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많이 이상한 느낌이기는 했다.
내 팔이 아니라 무슨 고무팔을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15번째 생일이야.”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마, 따뜻한 생일을 보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목소리들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마도 아빠라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날 피곤하게 하지 않느냐?’라고 했는데, 어쩌면 우는 것 같기도 했다.
‘아쉽다.’
이런 따뜻한 기억들이 또 금방 사라져 버리고 말 테니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다정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는 사실이었다.
그 목소리가 자꾸만 멀어져 가는 내 의식을 붙잡아주었다.
“이사벨. 내가 여기서 널 기다리고 있어.”
메마른 목소리.
간절하게 나를 원하는 목소리였다.
‘또네.’
저 목소리가 자꾸만 나를 깨웠다.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나를 자꾸만 나를 일깨웠다.
만약, 저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캄캄한 어둠 속에 빠져들었을 것 같았다.
저 목소리가 들려오고, 따뜻한 손길이 느껴질 때면 멀어지던 의식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아주 깊고 어두운 터널에서 홀로 헤엄을 치는 것 같았다.
“나한테는 네 사랑이 필요해.”
그 이후.
이 어두운 세상에 아주 미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우주 저편의 아주 작은 별빛과도 같아서, 너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한자리에 우뚝 서서, 매일 같은 모습으로 나를 기다려주는 누군가를 위해, 나는 힘을 내야만 했다.
그 다정함을 잊지 않기 위해.
단 하루도 지치지 않고 나를 위해 힘을 내주는 사람을 위해, 나도 힘을 내야만 했다.
‘빛이 보여.’
너무 멀었다.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냥 쉬어. 가만히 누워 있으면 편해.
네 목숨은 그리 많이 남지 않았어.
눈을 뜨더라도, 얼마 후면 또 사람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말 거야.
너는 그러기를 바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캄캄하고 외로운 어둠 속에서 내 편이 되어주는 목소리.
그 한결같은 목소리가, 내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도록 지탱해 주었다.
“내일, 다시 올게.”
누군가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저 목소리가 없으면, 나는 또 잠에 빠져들겠지.
저 손이 없으면, 또 저 빛은 사라지고 말겠지.
이제 나도 쉬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빛이 사라지지 않았다.
‘왜 안 사라져?’
어쩐 일인지 빛이 굉장히 커진 것처럼 보였다.
저 빛을 향해 계속 헤엄쳤다.
움찔.
잘은 모르겠지만, 내 진짜 손가락이 움직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