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68)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68화
문득, 어렸을 때 좋아했던 시가 떠올랐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본 아룬이 그랬다.
생기를 잃고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던 꽃에 생명수를 부은 것 같았다.
‘얼굴이…… 많이 변했잖아?’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내 손을 꼭 부여잡고 있는 아룬의 손이 느껴졌다.
그 손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아빠의 손만큼이나 컸다.
어른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사벨…….”
달뜬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룬은 언어를 모두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저 이사벨, 이사벨, 이사벨, 하고 내 이름을 되뇌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이거 감동적인 재회의 순간인 거 같기는 한데.’
내가 진짜 이래도 되나 싶기는 한데.
‘진짜 잘생겼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소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완연한 남자가 보였다.
소년의 모습 또한 무척 아름답기는 했지만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사람이세요?’
아니, 용이지.
아무튼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고, 누군가는 철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겪어봐야 아는 거였다.
그저 입이 떡 벌어지고 그의 미모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 기현상은 사실 나도 처음 겪는 거였다.
“이사벨!”
소설 속, 체통과 멋을 중시했던 남주 아룬은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 품은 무척 넓고 컸지만, 이상하게 나는 아룬이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려 아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룬은 정말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울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흐르자 아룬도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고맙기는, 내가 더 고마워.”
나는 의식을 잃었을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해 줬다.
“자꾸만 누가 나를 어둡고 깊은 곳으로 끌어당기는 것 같았어. 그런데 어느 목소리가 들리는 거야. 아주 오랫동안, 매일매일, 나를 포기하지 않아 준 어떤 목소리가 나를 빛으로 이끌어줬어.”
“…….”
“내 생각에는 그게 아룬, 너였던 것 같아.”
그 목소리가 없었다면 나는 의식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을 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야?”
“7년.”
충격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3년뿐이었다.
“그렇구나.”
그러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슬픈 기색을 내비치면 아룬이 바스러질 것만 같았다.
‘소설 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단단한 정신을 가진 주인공으로 나오는데.’
그런 주인공이 왜 이렇게 내 앞에서는 작아지는 건지.
어쩌면 김벌꿀의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정신적 성숙이 육체의 성숙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건가?
아룬은 이내 내 뺨을 어루만졌다.
‘응?’
그의 손끝에는 깃털이라도 달린 것 같았다.
뺨으로부터 시작된 묘한 간지러움이 온몸 구석구석 전달되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네.”
“뭐, 뭐가?”
“진짜 깨어났어.”
아룬은 다른 손으로 자신의 볼을 주욱- 잡아당겼다.
마치 탱글탱글한 밀가루 반죽처럼 주욱 늘어났다.
저거 깨물어…… 아니. 이게 아니지.
“아프다. 이거 꿈 아니네.”
아룬이 화사하게 웃었다.
여전히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나 누구보다 밝고 따뜻한 웃음이었다.
마치 햇살 같아서 괜스레 나도 행복해질 정도였다.
아룬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해 주었다.
“너랑 단 1초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아, 근데.
얘는 입술에도 깃털이 달린 건가.
이마로부터 시작된 간질거림이 목구멍을 넘실넘실 타고 가서 가슴에 닿았다.
가슴팍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그렇지만 이 기쁜 소식을 나만 알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
뭘까 이 기분.
괜스레 아룬의 입술이 자꾸 보였다.
아룬의 입술은 유난히 붉었고 따뜻했다.
입술 아래 사과 씨 같은 목젖이 보였다.
내 기억 속 아룬은 아직 소년이었고, 저런 목젖은 없었는데.
예전보다는 확실히 선이 굵어진 느낌이었다.
목젖 아래로는 전보다 훨씬 넓어진 어깨가 보였다.
“나는 네가 깨어났다는 것을 알리고 올게.”
아룬이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 아빠만큼, 아니, 아빠보다 비율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키가 저렇게 훌쩍 큰 거야.
나는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아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설 속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상사병에 걸린 이들이 많았다’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시간으로 체감하는 중이다.
“아, 그래도 가기 싫다.”
아룬이 다시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손을 잡았다.
“30초만 더 있다가 갈게.”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그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손을 빼냈다.
아룬의 머리 위에 글자가 생성되었다.
[?] [나 상처?]“미, 미안. 손이 너무 뜨겁게 느껴졌어.”
아룬은 자기 손을 또 자기 뺨에 가져다 대며 온도를 체크해 봤다.
사실 내 말은 말이 안 됐다.
아룬은 현재 사람의 모습이고, 사람의 온도는 36.5도 내외니까.
36.5도가 뜨거워 봤자 얼마나 뜨겁겠어.
“뜨거웠네. 미안.”
아룬에게 사실관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았다.
“다음부터는 조신할게.”
“응?”
방금 조심이라고 한 거 맞겠지?
아룬은 묘한 눈으로 내 눈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니, 아룬의 표정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표정과 같았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저 눈이 좀 묘하다고 느끼고 있을 뿐일지도.
“왜, 왜 자꾸 그렇게 쳐다봐?”
나도 모르게 아룬의 눈을 피했다.
사람의 눈을 이렇게 오랫동안 마주하고 있노라니 괜스레 불편했다.
“그냥, 예뻐서.”
아. 이 장면.
생각났다.
소설 속에서도 이런 장면이 자주 나왔다.
그다음 말은 보통 이거였다.
「“이 시간이 소중해서.”」
“이 시간이 소중해서.”
리아랑 있을 때 종종 있던 장면이었다.
소설 속 아룬은, 아셀리아를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행복감에 젖어 어쩔 줄 몰라 했다.
한참 동안 바라보며 행복해했고, 아셀리아가 왜 그렇게 바라보냐고 물으면 그냥 예뻐서, 이 시간이 소중해서라고 대답하곤 했었다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여주가 아닌데?’
어쩌면 진짜 서로를 사랑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 나라는 변수가 끼어든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피어올랐다.
* * *
세르몬이 한 남자를 결박해서 끌고 왔다.
그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가볍게 웃었다.
“데려왔습니다, 폐하.”
이사벨이 일으킨 기적 중 하나로, ‘이사벨릭 시스템’이 있었다.
이것은 마력발전소에서 마력을 일으켜 세계 각지로 보내 일반 백성들이 마도 문명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준 거대 혁명이었다.
현재 알페아와 지르델에 시범적으로 운영 중이었는데, 이미 나머지 다섯 명의 왕도 이사벨릭 시스템을 적용해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권과 발전이 있는 곳에는 비리와 욕심이 있게 마련이었다.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마력을 빼돌려 몰래 팔아치웠네요. 게다가 핵심 기술들을 빼내어 마법 연방에 팔려고 했던 정황들도 드러났습니다.”
세르몬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 미소를 본 남자는 바닥에 엎드려 싹싹 빌었다.
참고로 그의 옷은 원래 흰색이었으나, 이미 붉은색이 되어 있었다.
“사, 사, 살려만 주십시오.”
“어떻게 할까요, 폐하?”
세르몬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사벨의 정신을 모욕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 죄질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르몬,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론과 세르몬은 보편적인 부자 관계는 아니었다.
특히 론은 세르몬에게 약간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르몬과 ‘잘’ 교류하는 방법을 잘 몰랐다.
그러나 지난 7년, 둘은 꽤 깊은 유대감과 동질감을 쌓아왔다.
“역시 그냥 죽이는 건 효과가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 습성을 지닌 자들은 마치 바퀴벌레들 같아서 아무리 박멸해도 계속 생겨나니까요.”
“좋은 생각이 있는 것 같구나.”
“제 생각에는 혀를 삐이- 해서 삐이- 하고 삐이- 하여 삐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참고로 이 ‘삐이-’는 세르몬이 제 나름대로 고안한 방법이었다.
아주 잔혹하고 끔찍한 말들을 대체하는 말이었다.
세르몬이 이렇게 말을 하는 이유는 ‘이사벨이 싫어할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말을 순화하는 것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론은 그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
이것이 론과 세르몬이 교류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그렇군.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자들에게 경고도 되고 좋겠어.”
“그럼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세르몬이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고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밝게 웃으며 단도를 살짝 핥았다.
“용서는 없을 거야. 너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저질렀거든. 제일 삐이- 하게 삐이- 해줄게.”
그런데 그때, 비아톤이 노크도 없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폐하!”
“말리지 마라. 이사벨의 이름을 더럽힌 놈이다.”
“아니,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요!”
그딴 거?
론이 인상을 찡그렸다.
비아톤도 7년간, 너무 많이 강해져서 함부로 하기 힘들어졌다.
둘이 제대로 싸우게 되면 수도가 날아갈 것 같아서 요즘은 많이 못 때렸다.
“요즘 안 맞은…….”
“황녀님께서 눈을 뜨셨……!”
후웅-!
커다란 바람이 일었다.
쨍그랑!
창문이 깨졌다.
이 자리에 이미 론은 없었다.
창문으로 몸을 던져버린 상태였다.
비아톤이 크게 외쳤다.
“아니, 이놈은 어떻게 하라고 둘 다 사라져 버립니까!”
남자는 비아톤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살려달라 애원하고 있었다.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생각이 짧았다, 살려만 주시면 뭐든지 하겠다며 싹싹 빌었다.
마력을 통해 음성이 전달되었다.
[특별사면해.]“……예? 갑자기요?”
[이사벨의 이름으로.]더 이상의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