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화
데일사는 황녀의 인사말을 떠올려 보았다.
‘저는 이사벨이라고 하고요. 5살이고요. 황녀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데일사 경.’
데일사 시종장이라고 하지 않고, 데일사 경이라고 불렀다.
이사벨은 깜찍한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10년 전, ‘병든 자들의 언덕’에서 아바마마를 구해 주셨다지요?”
“그걸 알고 계십니까?”
“당시 데일사 경께서는 위기에 처한 아바마마를 위해 홀로 몸을 던져 37명의 적을 베어내시고 은성훈장을 받으셨다 들었어요. 그리고 데일사 경은 아바마마의 명예를 위하여 훈장 수여식을 거부했다고도 들었어요.”
데일사는 거창한 수여식을 거부했다.
데일사는 제국 최강자인 황제의 위신에 자그마한 흠집이라도 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자신이 황제를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최대한 감추었다.
“저는 데일사 경의 격에 맞는 예우를 했을 뿐이에요.”
론은 특이한 점을 한 가지 발견했다.
‘발음이 무척 정확하군. 나를 대할 때는 발음이 꼬였는데 말이지.’
그만큼 지금 이사벨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왜 기쁜가?’
이사벨이 자신을 조금 더 편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데일사는 잠시 침묵했다가 입을 열었다.
“황녀께서 태어나시기도 전의 아주 오래전 일입니다.”
“그 명예는 시간에 삭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저는 황녀로서, 데일사 경의 헌신을 존중하고 싶어요.”
데일사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아레나 궁이고, 현재 데일사 경의 직책은 시종장이니, 앞으로 저는 시종장으로서 데일사 경을 대하도록 할게요. 오늘부터 잘 부탁드려요. 데일사 시종장님.”
“…….”
데일사는 말을 잃고 말았다.
‘충격적이군.’
어렴풋이 생각해 왔던 황녀의 모습과 실제 황녀의 모습은 무척 달랐다.
실제로 본 황녀는 지극히 황녀다운 기품이 있었고, 5살답지 않게 조숙했다.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황녀를 둘러싼 소문들이 헛소문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만…….’
황녀에 관해서는 사실 좋은 소문보다 나쁜 소문이 많았다.
빌로티안 검술을 제대로 익힐 수 없는 반쪽짜리 황족이라는 것.
선택식에서 잠을 자는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는 것.
1년 전 태양 연회에서 꾀죄죄한 몰골로 나타나 비웃음을 샀다는 것.
황실은 그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황녀의 꽃반지를 최고의 선물로 선택해 버렸고, 그 때문에 황실도 꽤 곤란했었다는 것.
그래서 황녀는 황제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
그래서 검술 제국의 황녀에게는 모욕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 선생을 붙여주었다는 것.
보통 그런 것들이 황녀를 둘러싼 소문이었다.
일단은 화제를 돌렸다.
“폐하께서 직접 에스코트해 주신 것은 숨기는 게 좋겠군요.”
“시종장의 뜻대로 하라.”
데일사는 황녀를 향한 황제의 시선이 어떤지 단박에 알아냈다.
황제는 황녀에게, 다른 황자들에게 보내는 시선과는 다른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황제 폐하의 약점이 될 것이다.’
황녀는 저 스스로의 몸을 지킬 수 있는 무력을 지니지 못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황녀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좋을 것이 별로 없었다.
“오늘 국정 회의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딸을 부탁하지.”
“걱정 마십시오.”
황녀가 아니라 딸이라고 표현했다.
론은 데일사에게 이사벨을 맡기고 등을 돌렸다.
걸어가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 또한 데일사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딸을 지나치게 총애하고 있다.’
그는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이사벨은 빌로티안의 훌륭한 검술가가 될 수는 없겠지만, 누구보다 큰 숫자를 가져야만 하는 아이였다.
아니, 누구보다 큰 숫자를 주고 싶은 아이였다.
‘너무 티를 내면 안 될 것이다.’
그것은 이사벨에게 독이 될 것이다. 그래서 돌아보지 않고 그냥 걸어갔다.
이사벨 또한 그러한 사실을 어느 정도는 인지했고 이해했다.
멀어지는 아빠의 등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또 피곤해해 주셔야 해요!”
그냥, 또 말이 나와 버렸다.
“사랑해요!”
론의 몸이 움찔했으나 이내 멀어졌다.
* * *
데일사가 앞장서서 걷다가 물었다.
“황녀님께서는 이해하신 모양이군요.”
“네. 이해했어요.”
이사벨은 책을 옆구리에 끼고서 활짝 웃었다.
“시기, 질투를 염려하고 계신 거죠? 또 제가 아바마마의 약점이 될까 걱정하시는 거고요.”
“……카린 경의 자랑이 허튼소리가 아니었군요.”
“카린 선생님이 자랑을 하셨다구요?”
이사벨이 아는 카린은 칭찬에 매우 인색했다.
그녀는 늘 최종 흑막다운 태도를 유지했고, 이사벨도 카린을 대할 때는 조금 두려웠다.
언제 본색을 드러낼지 모르니까.
‘카, 카린이 무슨 말을 한 거지?’
최종 흑막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사망 플래그고, 납치 플래그다.
모든 말을 조심해야 했다.
작은 말 한마디가 복선이었고, 훗날 큰 것이 되어 돌아오는 경우도 많았다.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때, 위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 드디어 나타났구나, 경쟁자 녀석!”
목소리에는 마나가 담겨 있었고 그 때문에 아레나 궁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다.
쿵!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데일사가 안경을 고쳐 쓰고서 엄하게 말했다.
“4황자님. 8층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고 누누이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곱슬거리는 금발. 장난기가 가득한 호박색 눈동자.
아침에 분명 깨끗하고 깔끔하게 다려져 있었을 제복은 이미 여기저기가 구겨져 있었고, 바지에는 정체 모를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아마도 어떤 색깔 있는 주스를 흘린 모양이었다.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9층이었는걸?”
“8층이든, 9층이든 뛰어내리면 안 되는 겁니다.”
“왜 안 되는데?”
“황자로서의 품격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랜서 경은 칼만 잘 쓰면 장땡이라고 했는데?”
랜서는 시종장 데일사의 남편이었고, 황자의 검술교관 중 한 명이었다.
“오늘 사살할 예정입니다.”
“우와, 나 구경 갈래!”
“…….”
“구경 가도 돼?”
“안 됩니다.”
이사벨은 저도 모르게 싱긋 웃고 말았다.
‘4황자 미하엘과 시종장 데일사는 상극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데일사에게 미하엘이 상극이었다.
데일사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거고, 미하엘은 지금도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사벨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오라버니. 오늘도 여전히 귀엽네요.”
“나를 알아?”
“네. 선택식에서 봤잖아요.”
“그때가 기억이 난다고?”
“네. 그때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이 나요.”
미하엘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표정에서는 숨길 수 없는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그때, 미하엘은 이렇게 말했었다.
‘형님아, 제가 더 귀엽지 않아요?’
‘그렇지만 내가 더 귀여운걸요.’
그러니까 방금 말한 ‘경쟁자 녀석’은, 이사벨을 귀여움의 경쟁상대로 여기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쨌든 이사벨이 그때를 기억한다는 말에, 데일사도 약간 흥미가 동한 것 같았다.
그녀는 안경을 고쳐 쓰고서 미하엘에게 물었다.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까?”
“흐음…….”
미하엘의 호박색 눈동자가 이사벨을 유심히 관찰하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해라. 거짓말이지?”
“아니야. 오라버니가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증거를 가져와 봐.”
“증거는 없어요.”
“증거도 없는데 왜 이렇게 뻔뻔해?”
“저는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요.”
“거짓말을 안 했으면, 그렇게 뻔뻔해도 돼?”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이렇게 뻔뻔하죠.”
데일사는 둘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저런 식의 대화라면…… 미하엘 황자가 억지를 부릴 텐데?’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미하엘이 고개를 끄덕이는 기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긴, 그건 그래.”
데일사는 깜짝 놀랐다.
미하엘이 저렇게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런데 이사벨이 또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야말로 솔직히 말해줘요.”
“뭘?”
“솔직히 그때 뭐라고 했는지 기억 안 나죠?”
“헐?”
“아무 생각 없죠?”
“헐?”
“왜냐하면 아무 생각 없기 때문이죠?”
“헐?”
미하엘은 순수하게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딱 봐도 기억 안 나는 사람 모습이었는걸요.”
“너 진짜 똑똑하다.”
“그럼 이제 오라버니가 사과할 차례.”
“잉?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갔는걸. 엄청 속상했는걸.”
데일사는 이번에야말로 확신했다.
‘저 막무가내에게 그런 식의 대화는 통하지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미하엘은 인상을 살짝 찡그리고 있었다.
검지로 입술 근처를 살살 긁고 있었는데 저 모습은 억지 부리기 일보 직전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강인한 사람만이 자기 실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배웠어요.”
미하엘의 몸이 움찔했다.
“오라버니는 엄청 세죠?”
“그, 그으럼.”
“사과해 줘요.”
데일사는 미하엘이 절대 사과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미안해, 사과할게.”
“네. 알겠어요.”
“응? 꼬투리 안 잡아?”
“꼬투리를요? 왜요?”
“랜서 경이 함부로 사과하면 꼬투리 잡힌다고 그랬는데.”
“으응으응, 아니야. 사과해 줘서 정말 기뻐요.”
이사벨은 미하엘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은 무척 맑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하엘은 이사벨이 독자였던 시절부터 애정했던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오라버니는 제가 그려왔던 모습 그대로네요.”
“멋있다는 얘기야?”
“응. 멋있어.”
멋있다기보다는 귀엽지만.
그 말은 하지 않고 빙그레 웃었다.
미하엘은 기분이 좋아졌다.
“으하하핫! 앞으로도 내가 실수하면 지적하도록 해.”
“정말요?”
“그래.”
그는 자신 있다는 듯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맘껏 사과해 주마.”
데일사는 적잖이 감탄하고 말았다.
뭐랄까. 이사벨은 햇살 같았다.
‘저게 된다고?’
황녀가 아레나 궁에 입성하게 되면서부터, 작은 변화가 시작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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