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2)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2화
지금은 [시한부 악녀가 죽고 나면>과는 꽤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아셀리아지만, 그래도 그녀의 본질은 로맨스 판타지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다.
“제가 만약 황녀님이었다면 사랑받고 싶을 겁니다.”
“사랑을 받고 싶다고요?”
“그분은 사랑을 주기만 하지, 받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가 그분이었다면 누군가의 사랑을 간절히 바랐을 것 같습니다.”
아룬은 순간 흠칫했다.
그는 아셀리아의 말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이사벨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말은 분명 틀린 말이었다.
그러나 사실관계와 상관없이 아룬은 납득해 버렸다.
‘그렇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시지.’
아셀리아와 아룬의 눈에 묘한 동질감이 생겼다.
약간의 동료의식 비슷한 것이었다.
‘그분에게 어울리는 사랑은 아직 받지 못했어.’
아룬은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사벨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세상이 주는 사랑은, 햇살 같은 이사벨을 채워주기에는 너무 부족했다.
아마 평생 부족할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것이다.
논리적인 모순이 좀 있었지만 아룬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아셀리아 보좌관의 통찰력이 무척 빼어나군요.”
“제 말을 이해하신 것입니까?”
아셀리아는 이런 비슷한 말을 많이 했다.
언니인 아르미텔과는 이런 유의 대화를 상당히 많이 나눴었는데 아르미텔은 늘 이렇게 대답했었다.
‘리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그분은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계셔.’
아르미텔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아셀리아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아룬은 달랐다.
“당연히 이해하죠. 사랑을 더 드려야 합니다.”
“오. 처음으로 아룬 경에게 호감이 생기는군요.”
“저도 그렇습니다.”
여태껏 일적인 관계로만 엮여 있어서 둘은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부로 조금은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룬 경은 생각보다 좋은 사람인 것 같군요.”
“아셀리아 경도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군요.”
“전에는 나쁘다 생각했나요?”
“좀 무섭다고는 생각했습니다. 약간 광기가 보…… 아니, 검을 들지 않은 자 중에 제일 무서웠죠.”
“무서운 사람은 제가 아니라 아룬 경이겠죠. 사람들은 만만한 저만 붙잡고 민원을 넣는다고요.”
“…….”
일로 엮인 이상, 둘 사이는 더 이상 가까워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룬은 뒤쪽을 올려다보았다.
‘응? 시선이 느껴진 것 같은데?’
아레나 궁 7층.
이사벨의 방 창문이 열려 있었다.
* * *
유리가 내게 물었다.
“황녀님,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창문 아래 쪼그리고 앉은 상태다.
솔직히 말해 앉은 게 아니라 숨은 거였다.
사실 나도 이런 나를 모르겠다.
왜 숨은 거지? 숨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눈이 마주치면 인사하면 되는 건데.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요? 왜 그러세요? 벌레라도 있었나요?”
“으, 응 맞아. 벌레가 있었어.”
“저런. 제가 청소를 조금 더 신경 쓰도록 할게요.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죠?”
유리가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러고서는 존재하지 않는 벌레를 사냥(?)하겠답시고 눈에 불을 켜고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밖으로 도망쳤나 봐요. 우리 황녀님을 놀라게 했으니 본때를 보여줘야 했는데.”
주먹을 불끈 쥐고 씩씩거리는 폼이 마치 건달 같아서 나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7년 사이에 많이 씩씩해진 것 같았다.
“유리 있잖아.”
“네, 말씀하세요.”
“내가 떠나도 이 세상은 이치대로 잘 흘러가겠지?”
“그런 말씀 안 하시기로 하셨잖아요.”
유리는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제가 이번에 특별히 개발한 수제 초콜릿을 선물하지 않을 거예요.”
“…….”
내가 떠난다면 결국 아룬과 아셀리아는 서로를 사랑하며 행복하게 살겠지?
그게 소설의 내용이었다.
어쩌면 ‘나르비달의 낙인’보다 훨씬 더 강력한 설정.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맥락.
그러니까 나라는 변수가 없어지고 나면 저 둘은 본래대로 사랑하게 될 가능성이 높을 거다.
‘둘이 참 잘 어울리더라.’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둘을 보고 있노라면 봄날의 햇살 같았다.
두 사람에게서 묘한 청량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바라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새어 나올 정도로, 둘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수제 초콜릿. 진짜 안 드릴 거예요.”
유리가 조금 삐지는 바람에 약간 달래줘야 했다.
‘이치대로 흘러가게 두는 게 맞아.’
지금 약간의 욕심으로 아룬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룬은 나와의 추억 때문에, 아마도 마음을 조금 헷갈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떠나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 * *
아셀리아는 아룬을 원래 이렇게 평가했다.
-검술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야만적인 인간.
더 정확히 말하면 너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것을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인간이었다.
어지간한 것들은 다 힘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게 사무관 아셀리아의 눈에는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한 줄을 더 추가했다.
-그러나 황녀님에 관련해서는 누구보다 지혜로운 자.
아룬에게는 특출난 구석이 딱 두 개 있었다.
하나는 검술이고, 하나는 이사벨이었다.
아룬 스스로도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분명 이사벨이 날 쳐다보고 있었어.’
그런데 숨었다.
이사벨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아쉬웠다.
며칠의 시간이 흘러 그는 깨달을 수 있었다.
이사벨이 자신과 거리를 두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왜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에라도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괜히 이사벨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아룬이 로베나 대공을 찾았다.
“어머니, 솔직히 어머니는 VIP대기표 필요 없으시죠?”
“필요 없다기보다는…… 정말 필요한 사람이 있어 보이는구나.”
결국 로베나에게서 VIP대기표를 반쯤 강탈해 간 아룬은 이사벨과 둘이 만남을 가졌다.
아룬은 평소처럼 똑같이 이사벨을 대했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이사벨. 혹시 이거 기억나?”
아룬이 품속에서 반지 하나를 꺼냈다.
꽃으로 만든 반지였다.
“어, 그건…… 내가 옛날에 아빠한테 선물했었던 꽃반지랑 비슷하게 생겼네.”
“맞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고 있어?”
“폐하께서 내게 엄청 많이 자랑하셨거든.”
“아빠가?”
“응.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
아룬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서 그거랑 똑같이 만들려고 엄청 노력했는데, 어때?”
“똑같을 리 없잖아.”
이사벨이 론에게 선물했던 꽃반지는 네 살 때 만든 꽃반지였다.
당연히 엉성하고 조잡했다.
그런데 아룬이 만든 꽃반지는 달랐다.
어떻게 처리한 건지는 몰라도, 꽃잎에 생기와 윤기가 흘러넘쳤다.
모르고 보면 꽃 모양의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줄기 부분에는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마법 글자들이 새겨져 있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마법적 처리를 한 것 같았다.
아룬이 씨익 웃었다.
“나는 이제 꽃반지 장인이 됐어. 이사벨을 떠올리면서 꽃반지를 만들다 보니 이런 경지에 이르고 말았지 뭐야?”
아룬의 머리 위로 [♪♬] 글자가 떠올랐다.
기분이 좋아져서 저절로 떠오른 것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이는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내가 꽃반지 만드는 거 가르쳐 줄까?”
“……이 나이에 무슨 꽃반지야?”
아룬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사벨의 손가락에 꽃반지를 끼워주었다.
“어때? 예쁘지?”
“응, 예쁘긴 해.”
이름난 보석사가 세공한 반지 같았다.
“너한테 정말 어울리는 꽃반지를 찾아주고 싶은데, 나랑 같이 꽃밭에 가주지 않겠어?”
“…….”
아룬은 간절한 눈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마치 김벌꿀이 보호자를 간절히 원하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나 VIP대기표 쓴 거 알지?”
이사벨이 멈칫하는 사이 아룬이 한쪽 무릎을 꿇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가 에스코트할게.”
“…….”
이사벨은 저 손을 잡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조금 고민되었다.
황궁의 꽃밭은 김벌꿀과의 추억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곳에 아룬과 함께 가면 정말 많은 기억이 떠오를 것이었다.
그게 과연 우리에게 좋은 일일까?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이사벨은 늘 그래.”
어느새 아룬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사벨을 안아 들었다.
“내, 내려줘.”
“김벌꿀은 원래 제멋대로 살아.”
“너는 지금 김벌꿀이 아니잖아.”
“김벌꿀이 곧 나야.”
이사벨을 꼭 안은 채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뭐, 뭐 하는 건데?”
“놀라지 마. 몸을 띄울 거야.”
아룬의 몸이 천천히 두둥실- 떠올랐다.
“마법을 쓴 거야?”
“응. 네가 자는 동안 마법도 익혔어.”
소설 속에서 아룬은 검술만 다루는 검술가였다.
그런데 마법을 익혔다.
“그냥, 어떻게 하면 너한테 도움이 될 수 있을까를 연구하다 보니 마법도 익힌 거야.”
아룬은 이사벨을 안아 든 채 창문 밖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이사벨이 너무 겁먹지 않도록 조금씩.
“이사벨은 마력을 통해 내 감정을 읽을 수 있지?”
“……응.”
“어때?”
7층 높이에 두둥실 떠 있는 상태.
그러나 이사벨은 무섭지 않았다.
아룬의 마력을 통해 전해지는 감정과 생각들이, 이사벨을 안전하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었다.
“포근해.”
“그럼 꽃밭으로 가자.”
아룬은 이사벨이 겁먹지 않도록 천천히 비행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예전 얘기를 꺼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무슨 말?”
이사벨의 눈앞에 마력 글자가 생성되었다.
“이제는 비행 아룬이야.”
이사벨은 그때 생각이 나서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룬이 빙그레 웃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그날 김벌꿀은 라면 먹고 배탈이 크게 났었지. 그래도 행복했었어. 이사벨을 위해서 뭔가 해낸 것 같은 기분이었거든.”
이사벨을 품에 안은 아룬은 확신했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이사벨을 안고 있는 지금 이 시간이야말로 자신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품속의 이사벨이 웃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온 세상이 내 것이 된 것만 같았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렇다고 무턱대고 ‘사랑해, 나랑 결혼해’라고 외쳐댈 수는 없었다.
김벌꿀이었다면 그랬겠지만 아룬은 아니었다.
조금 더 계산적이고 전략적으로 이사벨에게 접근했다.
이사벨과 쌓아왔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하나씩 건드리면서.
“아참. 나 화관도 되게 잘 만들어. 보여줄까?”
함께 만들었었던 화관도 만들었다.
아룬은 화관을 머리 위에 쓰고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예전에 김벌꿀이 그랬던 것처럼.
이내 김벌꿀은 자신의 머리 위에 올려놓았던 화관을 벗고서 이사벨의 머리 위에 올려주었다.
“이건 선물로 줄게. 이사벨도 나한테 만들어줘.”
“…….”
시간이 지날수록 이사벨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러면 안 될 거 같은데, 거리를 더 둬야 할 거 같은데.
그런 마음이 들었지만 꽃밭이라는 장소가 그녀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건 추억 회상 같은 거니까.’
그녀도 화관을 만들었다.
아룬만큼 정교하게 예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아룬의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화관이었다.
아룬은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진짜 예쁘다.”
“응?”
“꽃이 예뻐.”
“……응.”
“주변을 봐봐.”
의아한 일이었지만 주변의 모든 꽃이 갑자기 만개해 있었다.
화사하게 핀 꽃들 사이에서, 아룬이 꽃들보다 더 화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나, 이사벨이랑 꼭 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함께 가주겠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