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5)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5화
로베나는 대공저로 돌아와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에 거품을 잔뜩 낸 욕조 안에 몸을 맡겼다.
“좋네.”
거품 묻은 손으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슬슬 만져보았다.
꽤 보드랍고 좋았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사실이지만, 로베나는 이 거품 반신욕 때문에 인간의 모습으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거품 목욕은 로베나가 제일 좋아하는 취미였다.
라벤더향이 물씬 나는 이 따뜻한 물은 로베나의 몸을 노곤노곤 녹여주었다.
“14시간 정도 더 있고 싶지만 어쩔 수 없겠지.”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샤워가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와 머리를 매만지고 제복을 갖춰 입었다.
“그 꼰대들 만나기 싫기는 한데…….”
이제 로베나가 아니라 라비나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충류의 그것처럼 가늘어졌다.
“가볼까.”
그녀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간이 바뀌었다.
“왔느냐?”
“왔는가?”
커다란 원탁이 있는 회의실.
이곳은 진짜로 존재하는 세상은 아니었다.
모든 것이 마법으로 구현된 가짜 세상.
500년 만에 생성된 성룡들의 회의장이었다.
“네. 성룡 회의에 참여해 주신 여덟분의 성룡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원래 용들은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극히 개인주인적이며, 자신의 일 외에는 일체의 관심도 두지 않는 편이니까.
세계멸망 같은 거대한 주제만이 그나마 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용군주께서는 이번에도 참여 안 하셨군요.”
“그분이야 늘 그렇지.”
“어디서 뭐 하는지 아시는 분?”
“모르네.”
“모르지.”
“알면 용군주가 아니겠지.”
용들의 왕, 용들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용군주는 오늘도 불참했다.
어쨌든 성룡 회의가 시작됐다.
“그래, 라비나. 말을 들어보지.”
“제2의 흑염룡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고?”
어쩌고 흑염룡 카델리나는 세상을 멸망으로 몰고 갈 뻔했다.
이곳에 모인 성룡 중 나이가 가장 많은 고룡, ‘파일라헨’은 그때를 아직도 잊지 못했다.
흑염룡이 미쳐 날뛰는 바람에 둥지를 잃은 용들이 무려 열 마리가 넘었다.
“그때는 끔찍했었지.”
“그보다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 아들 때문에요.”
“아들이라면…… 아룬 말이냐?”
아룬이라는 말에 성룡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아룡 아니냐?”
“아룡이죠.”
“그런데 아룡이 어떻게 흑염룡 사태를 일으켜?”
“이 세상에 비상식적인 일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전혀 관심이 없었겠지만요.”
라비나는 그간 있었던 일들을 대략적으로 얘기해 주었다.
“……해서, 론이라는 자는 이미 성룡의 힘을 뛰어넘었습니다. 아룬도 그와 비슷한 무력을 갖추고 있는데, 용언을 활용한 마법 사용 능력이 어쩌면 그 어머니보다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허어. 그럴 수가. 그게 말이 되는가?”
“그의 어머니는…… 어쩌고 흑염룡 카델리나 아니냐.”
아룡인 아룬이 어떻게 카델리나를 넘어선단 말인가.
“그러니까 비상식적이라고 표현하지요. 제 생각과 판단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자꾸 벌어지고 있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 어느 한 시대를 대표할 만한 무력을 가진 이들이 같은 시대에 모조리 몰려 있으며…… 하여…… 빌헬름이라는 자가 마법 연방의 마법사들을 통합하여 이사벨을 노리고 있습니다. 이사벨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앞서 제가 언급한 모든 자가 이성을 잃고 날뛰기 시작할 것입니다.”
“…….”
“그것은 제2의 흑염룡 사태가 되겠지요. 아니, 어쩌면 흑염룡 사태보다 훨씬 더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라비나는 숨을 들이마신 뒤 간곡히 부탁했다.
“용들이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용이, 그것도 아룡이 세상을 멸망하게 만들도록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성룡들의 시선이 파일라헨을 향했다.
그들은 생각하기가 귀찮았고, 파일라헨의 결정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용들도 움직여야 할 때가 왔군. 라비나.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되지?”
* * *
이사벨이 의식을 잃었던 7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비아톤은 베크사가 남긴 유산을 탐독하고 또 탐독했다.
그 작업은 소설 속 남주의 동료였던 테이슬론이 함께했다.
그리고 둘은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끌끌, 결국 마법 연방이라는 것은, 빌헬름 가문의 연막작전이었겠군.”
“테이슬론 경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대외적으로 초대 마법 연방은 12명의 창성 마법사가 뜻을 함께하여 만들어낸 운명공동체였다.
그러나 비아톤이 해석하기로는 달랐다.
“결국 머리는 빌헬름의 가문이겠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처음 둘은 악연(?)으로 시작했으나 이제 마음이 꽤 잘 맞는 친구가 되었다.
“정황상, 빌헬름 가문이 일부러 12명의 창성 마법사를 전면에 내세워 마법 연방을 설립했고, 각 마법 명문가에 몇몇 비전마법을 전수한 것 같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전혀 유해하지 않은 마법들이죠.”
“그러나 합쳐보면 거대한 강림 마법이 된다.”
“그것도 죽음의 신, 나르비달을 말이죠.”
빌헬름 가문이 결국 원했던 것은 용들도 어쩔 수 없는 거대한 권능과 힘이었다.
그 힘을 이용하여, 역사상 단 한 번도 넘어서지 못했던 검술가들의 아성을 넘어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다.
테이슬론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참고로 이건 내가 알아낸 거다.”
“혹시 치매입니까?”
“뭐?”
“제가 알아낸 부분이 훨씬 더 많을 텐데요. 그리고 왜 자꾸 반말합니까? 테이슬론 경은 황궁의 수석 마법사이고, 저는 황궁의 수석 보좌관입니다. 위아래가 없는데 왜 자꾸 반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상대를 존중하시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테이슬론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너 몇 살이냐?”
“먹을 만큼 먹었습니다.”
“나이도 어린 게 자꾸 어른한테 맞먹어?”
비아톤이 빙그레 웃으며 맞받아쳤다.
“나이를 항문으로 먹어도 어른입니까?”
“뭐? 항문? 하아아앙문? 말 다 했냐?”
디저트를 챙겨서 둘의 연구실로 들어온 유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하세요. 지겹지도 않아요?”
라고 말했으나 둘에게는 유리의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항문이라고 한 거냐?”
“똥꼬라고 해드릴까요?”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언제는 마음 잘 맞는 친구라면서, 분명 어제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유리가 짝! 손뼉을 쳤다.
“둘이 자꾸 그렇게 싸우면 황녀님이 슬퍼하겠죠?”
테이슬론과 비아톤이 서로 손을 맞잡았다.
“제가 경솔했군요, 테이슬론 경.”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봅시다, 비아톤 수석 보좌관.”
둘은 다시 친구가 되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다가 이내 황제를 찾았다.
비아톤이 대표로 보고를 올렸다.
“결국 빌헬름은 황녀님을 원할 것입니다. 아, 화내지는 마세요.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고 빌헬름이 그럴 거라고 예측을 하는 거니까요. 무서워서 보고를 올릴 수가 없지 않습니까?”
“……보고를 이어봐라.”
“황녀님의 신체를 이용하여 죽음의 신, 나르비달을 강림시키려 시도할 것입니다.”
“그게 가능하다 보는가?”
“나르비달의 화신체까지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권능을 일부 훔쳐올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저희의 판단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칩거하셨던 이유도 사실은 이것 때문이었던 것 같고요.”
베크사는 하늘이 내린 천재였고, 그녀 자신이 가진 힘이 너무 강대하여 칩거한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비아톤은 단순히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결국 어머니는 그들을 막기 위해서 유산을 남기신 것입니다. 어쩌면 본인께서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지고 계셨기에, 빌헬름의 야욕을 일찌감치 눈치채신 것인지도 모르죠.”
“어째서 이사벨이어야 하는 것이냐?”
“그건 아마도 황녀님의 신체 특성 때문일 것입니다.”
“신체 특성?”
“신을 강림시키기 위해서 아주 단단한 육체가 필요하겠지요.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육체가 어느 핏줄이겠습니까?”
세상에서 제일 튼튼한 육체.
그것은 바로 빌로티안 황가의 육체였다.
“게다가 황녀님은 마력을 느끼는데 탁월한 기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외부의 힘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뜻이죠. 나르비달의 힘을 빠르게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또한, 바다같이 넓은 마력량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것은 곧 마력의 그릇이 거대하다는 뜻이지요.”
나르비달의 낙인.
튼튼한 육체.
거대한 마력 그릇.
“하여 빌헬름은 황녀님을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반드시 황녀님을 노릴 것입니다. 놈들에게는 수백 년의 염원이니까요.”
황제의 최측근 인사들은 이 내용을 모두 숙지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위험이 닥쳐온다.
이사벨의 남은 수명은 3년.
빌헬름은 3년 이내에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 * *
나는 요즘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황궁 내에서도 이따금씩 들려오는 ‘이사벨 찬가’ 같은 위기를 제외하면, 모든 날이 아주 좋았다.
나를 소중히 여겨주는 사람들, 그리고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들과 함께 햇살을 즐기며 디저트 타임을 즐기는 소소한 행복감이 내 마음을 가득가득 채워주었다.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삶이잖아?’
돈 많은 백수.
뭐, 내가 원한 건 아니지만 여기에 명예와 권력까지 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심심할 틈도 없다.
잘 생각해 보면 모든 사람이 꿈꾸는 로망의 총집합체였다.
가족들은 늘 내게 상냥했고 나는 전생에 그토록 바라왔던 가족들의 사랑을 원 없이 누릴 수 있었다.
그건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아빠, 또 몰래 오셨어요?”
“그 여자가 너무 엄격해져서.”
전에 데일사 시종장님을 언급할 때는 꼬박꼬박 시종장이라고 했다.
그리고 약간은 애틋한 눈을 하곤 했었다.
함께 전장을 누볐던 전우애와 추억 때문이었을 텐데, 지금은 약간 원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무튼, 내일 도둑놈이 찾아올 것이다.”
“도둑놈이요?”
“그래. 아주 못된 도둑놈이지.”
“아빠가 그렇게 말씀하실 도둑놈은 아룬밖에 없는데요?”
“아룬?”
아빠의 눈이 가늘어졌다.
부르르-
테이블 위의 유리컵이 진동했다.
매서워진 눈초리가 부담스러워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 아룬 경이요.”
“언제부터 아룬을 이름으로만 불렀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요.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잖아요.”
그러고 보니 언제 아룬이 됐지?
김벌꿀이라는 사실을 안 이후부터기는 했는데, 어쨌든 김벌꿀과 아룬은 다른 존재인데.
언제부터 아룬이라고 편하게 부르게 됐는지 나도 잘 기억이 안 났다.
잘은 모르겠는데 아룬이 자꾸만 곁에 천천히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스르르 스며들어와서 평소에는 잘 모르고 있다가 정신 차려보면 내 옆에 있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까.
아빠는 여전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그놈이 아주 이상한 소리를 할 것이다.”
“이상한 소리요?”
“그래. 아주 더럽고 해괴한 소리지.”
“더, 더럽고 해괴한 소리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일 들어보면 알 것이다. ‘그것’을 언급할 거야.”
“그것이 뭐예요? 말을 정확히 해주세요.”
“아니. 난 ‘그것’을 언급할 생각이 전혀 없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아빠는 인상을 찡그렸다.
도대체 뭔데 아빠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아빠는 결국 ‘그것’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이 되었을 때, 아룬이 내게 찾아왔다.
“아주 천천히, 조금씩, 네가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가려고 했어.”
더럽고 해괴한 소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갑자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