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6화
아룬은 품속에서 붉은 보석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장미 한 송이를 꺼냈다.
작은 반지함과 함께.
“나랑 약혼해 줘야 해.”
겉으로는 약간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가 없어. 혹시 내가 싫어도, 이사벨은 거부할 수 없어.”
물론 싫을 리 없겠지만.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이사벨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아룬 또한 마력을 통해 상대의 감정을 읽어낼 수 있다.
다른 것에는 무감해도 이사벨에게 지극히 예민한 아룬이고, 7년간 옆에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붙어 있다 보니 그게 가능해졌다.
적어도 이사벨에 한해서는 그랬다.
‘이사벨도 나를 좋아해.’
만약 이 마음을 읽어내지 못했다면 훨씬 더 조급했을 것이다.
심지어 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급한 상태니까.
이사벨을 향한 마음이 그랬다.
마음을 알고 있어도 확인받고 싶고, 자꾸 안달이 났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약혼이라니?”
아룬은 ‘약혼’이라는 말로 이사벨의 정신을 쏙 빼놓은 뒤, 유려한(?) 손놀림으로 이사벨의 넷째 손가락에 반지를 껴 주었다.
상당히 숙련된 몸동작이어서 굉장히 자연스러웠다.
이사벨은 너무 황망한 나머지 아룬이 그렇게 하는지도 몰랐다.
“선택권이 없어, 이사벨.”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해줘.”
“사실 이 얘기를 이사벨에게 해야 하나, 하지 말아야 하나, 우리 사이에 많은 이야기가 있었어. 그렇지만 결국, 이사벨에 관한 일이니 이사벨도 알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어.”
아룬과 이사벨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니까, 결국 빌헬름이 내 몸을 원할 거라고?”
“응. 그놈들 말로는 강림체라고 하는 것 같아. 베크사 경의 희생이 아니었다면 아마 마지막 순간까지 몰랐을지도 모르지.”
죽음의 신, 나르비달을 불러온다.
나르비달이 불가하다면, 그 권능의 일부라도 강림시킨다.
그리고 그 힘을 세계를 지배하는 데에 사용한다.
‘[시한부 악녀가 죽고 나면> 이야기 속에 이렇게까지 딥한 내용은 없었는데.’
이건 로맨스 판타지가 아니라 그냥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스케일의 얘기였다.
신을 강림시켜 세상을 지배하겠다니.
‘소설 속에서도 빌헬름과 마법 연방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을 텐데.’
그런데 왜 소설 속에서는 이런 내용이 등장하지 않았을까를 조금 고민해 봤다.
‘내가 변해서인 것 같아.’
강림체를 위한 조건에는 ‘마력에 예민한 감각과, 엄청난 마력을 수용할 수 있는 거대한 마력 그릇’이라는 게 있다고 했다.
‘소설 속의 이사벨은 마법을 익히지 않고 패악질만 부리니까. 내게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겠지.’
그래서 빌헬름의 목표가 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빌헬름이 뭔가 일을 치르기 전, 최종 흑막으로 각성한 카린에 의해 처치되었거나.
“……그래서 결국 우리는 약혼을 해야 해.”
“내게 위험이 닥쳤다는 건 알겠어. 그게 세상에도 큰 위협이라는 것도 알겠고. 그런데 그것과 우리의 약혼이 무슨 상관이 있는 건데?”
“24시간 호위가 필요하거든.”
이사벨이 고개를 갸웃했다.
“호위?”
“그런데 아무나 24시간 동안 너와 붙어 있을 수 없잖아. 명분도 없고.”
“…….”
“사실 너랑 결혼하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그것만큼은 극구 반대하셔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24시간 호위를 하기 위해서 나와 약혼을 하겠다고?”
“응. 진짜 어쩔 수가 없네.”
“어쩔 수가 없다는 사람치고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이사벨이 느끼기에 호위라는 건 아무리 봐도 핑계였다.
굳이 약혼이라는 방법을 쓰지 않아도, 그냥 호위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냥 24시간 붙어서 호위하면 안 돼?”
“그럼 이사벨을 둘러싸고 안 좋은 소문이 퍼질걸? 세상 사람들은 남의 사생활을 들춰서 쑥덕거리는 걸 좋아하거든. 물론 나한테도 나쁜 소문이 퍼지긴 하겠지만 벌꿀오소리는 그딴 거 신경 쓰지 않지. 그런데 이사벨은 다르잖아.”
아룬은 이사벨을 안다.
이사벨은 남들의 시선을 쓰는 사람이다.
평범하지 않은 전생 때문에, 어쩌면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타인의 이목에 예민하다.
아룬은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사벨이 타인의 이목에 예민하다는 걸 알아.”
“…….”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둔감하라고 말하지도 않을 거야. 내가 사랑하는 이사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거든.”
“바, 방금 뭐라고……?”
“응? 뭐가?”
“아니, 방금…….”
“이사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거라고 했는데?”
“그 전에 말이야.”
“둔감하라고 말하지 않겠다고. 예민해도 괜찮다고 말했어.”
“아니, 그다음에 말이야.”
“뭐가?”
아룬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사벨이 짐짓 인상을 찡그렸다.
“장난치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손 줘봐.”
아룬은 그 말에 냉큼 손을 내밀었다.
이사벨의 손을 잡았다.
이사벨은 마력을 통해 느껴보았다.
‘진짜로 해맑잖아? 나를 놀리는 게 아닌데?’
손을 잡아보니 알 수 있었다.
아룬은 정말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한 걸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숨을 쉬듯 본능적으로 진심이 나와버린 것 같았다.
물론, 그것 또한 아룬의 계략이었다.
아룬은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인 카델리나를 속여왔다.
그때부터 연습해 왔던 것이 몸에 각인이 되어 있었다.
비록 잠깐이기는 하지만 어머니이자 성룡인 카델리나조차 속였다.
이사벨을 속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룬은 남몰래 웃었다.
‘엄청 적극적인 돌진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 가랑비처럼 네 마음을 계속 적실게.’
그 마음을 계속 두드리기로 했다.
이사벨이 마음의 문을 완전히 열어줄 때까지.
* * *
마법 연방 측에 경고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빌로티안 제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소리움 지방에서부터였다.
소리움 지방의 작은 마을이 불탔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마법 연방은 그것이 빌로티안 제국 기사들 소행이라고 발표했다.
빌로티안은 즉각 반박 성명을 냈으나, 마법 연방은 여전히 이번 사건의 범인으로 검술가들을 지목했다.
“마법 연방은 빌로티안의 만행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그들은 악마의 음식을 팔아 막대한 이윤을 남기고, 500년간 평화와 균형을 유지해온 전통을 깨부수며 마법의 권위를 자꾸만 잠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번 소리움 지방의 습격을 통하여, 그들의 더러운 면모를 드러낸 것이 틀림없다.”
마법 연방 측에서는 이 일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며 대대적인 선동전을 펼쳤다.
마법 연방에 속한 수많은 사람이 격분하며, 당장에라도 검술가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며 들끓어 올랐다.
그에 따라 빌로티안 제국 행정수장이라 할 수 있는 세르나가 무척 바빠졌다.
뿐만 아니라 수석 보좌관 비아톤도 숨 가쁘게 뛰어다녔다.
세르나가 말했다.
“아셀리아, 부탁할게요. 이번에 지르델에 좀 다녀와야 해서요. 아셀리아를 믿고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네요.”
그리고 비아톤도 말했다.
“아셀리아 사무관. 이 건 좀 처리해 줘요. 저는 지금 소리움 지방으로 파견 나가서 증거들을 좀 수집해야 할 것 같네요. 아셀리아 사무관만 믿고 갑니다.”
아셀리아의 책상 위에는 온갖 서류가 올려졌다.
그녀의 상사로서, 언니인 아르미텔도 있기는 했으나 아르미텔의 능력은 아셀리아에 비해서는 현저히 뒤처졌다.
아르미텔은 행정가라기보다는 군인에 가까웠으니까.
안 그래도 수척했던 아셀리아의 안색이 더욱 나빠졌다.
‘나는 일이 즐거웠는데.’
일을 해도 해도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일이 너무 즐거웠고, 일을 해냄으로써 얻는 성취감에 행복해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에게 휴식 시간 같은 사치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나마 그녀가 시간을 내는 건 오로지 이사벨과의 짧은 대화뿐이었다.
“많이 지쳐 보여.”
“아니에요. 약혼 축하드려요.”
이미 황궁 내에 소문이 파다했다.
아룬과 이사벨이 약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약혼식을 치를 거라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떠돌고 있었다.
“고, 고마워. 얼떨결에 이렇게 된 거라 축하받아도 될지 모르겠네.”
“황녀님이 좋다면 얼마든지 축하해드릴 수 있어요.”
“……응, 고마워.”
다시 살펴봐도 원작 여주 아셀리아는 원작 남주 아룬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녀는 남주 따윈 완전히 잊고 일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힘들지 않아?”
“…….”
평소였다면 힘들지 않고 즐겁다고 말했겠지만 그러지 못했다.
최근 일주일 동안 3시간도 못 잤다.
사실상 인간의 체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전에 리아를 봤을 때는 나도 정말 기뻤거든?”
“기쁘셨다구요?”
“응, 일을 정말로 즐기는 것 같아서. 마치 즐거운 취미를 가진 것 같아서 너무 좋았거든.”
“…….”
“그런데 이제는 그 취미가 정말로 일이 되어버린 것 같아.”
이사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취미가 일이 되어버리는 것만큼 가혹하고 슬픈 게 없는 건데.”
“…….”
그 말에, 아셀리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황녀님의 말 덕분에 깨달았어요.”
“뭘?”
“저는 아셀리아로서,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일을 빼앗겨 버렸어요.”
취미도 감당 가능한 수준이어야 취미지, 그 수준을 넘어가면 취미가 아니다.
“저는 즐겁게 지내려고 아셀리아로 살고 있거든요.”
“…….”
이사벨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력장이 요동치고 있었다.
마력에 예민한 이사벨은, 아셀리아가 엄청나게 거대하게 보였다.
‘용의 마력인데?’
어딘지 모르게, 아셀리아가 많이 변해 있었다.
“그만 참아야겠어요.”
아셀리아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이사벨의 손등에 가볍게 키스했다.
“저는 황녀님을 정말 애정 하거든요.”
“나도 리아를 좋아해. 요즘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아서 아쉽지만.”
“아무래도 그 시간을 되찾아와야 할 것 같아.”
손등 키스로 인사를 나눈 아셀리아는 몸을 돌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몸에서,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샌가 그녀의 몸이 사라졌다.
“여기들 모여계셨네요.”
지혜의 용, 라비나가 눈을 크게 떴다.
“다, 당신은?”
제2의 흑염룡 사태를 막기 위해 모인 7인의 성룡이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용들의 용.
가장 고귀한 혈통을 타고나, 신에 가장 근접한 힘과 권능을 지닌 용군주가 틀림없었다.
아주 오래전, 미쳐 날뛰던 흑염룡을 제압했던 것도 용군주였다.
“요, 용군주!”
“군주!”
용들의 군주.
순백룡 아이실라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