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8)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8화
나는 비아톤 경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복도를 걸었다.
“집무실로 가는 거예요?”
“아닙니다. 황제 폐하와 황후마마께서는 침실로 황녀님을 부르셨습니다.”
이야기를 나눌 때, 장소는 중요했다.
장소에 따라 의복이 달라지기도 하고, 대화를 대하는 자세도 달라져야 했다.
장소에 따라 어떤 신분과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하는지도 달라진다.
‘딸로서 나를 부르셨네.’
오히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어쩌면 나는 엄마와 아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내가 스스로 미끼가 되어 빌헬름을 불러내겠다는 이 발상은, 사실 내가 엄마 아빠여도 반대했을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세계는 전쟁 직전.
사실상 서로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을 뿐, 이미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충돌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반으로 갈라졌어.’
빌로티안을 지지하는 사람들.
그리고 마법 연방을 지지하는 사람들.
평범했던 이웃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서로를 미워하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바랐던 세상은 이런 세상이 아니었다.
비아톤 경이 물었다.
“손에 들고 계신 건 뭔가요?”
“어제 발행된 소식지들이요.”
“혹시 살펴볼 수 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이사벨 황녀를 필두로 한 빌로티안 황실의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평화를 먼저 깨뜨린 것은 이사벨 황녀다.]어차피 숨길 문제도 아니고, 나는 순순히 소식지를 보여주었다.
비아톤 경의 표정이 무척 어두워졌다.
“이런 헛소리에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황녀님의 모든 행동은 따뜻했…….”
“알아요.”
전생에서도 이런 걸 겪었었는데.
이런 걸 두고 타고난 운명이라고 하나 보다.
그때도 수많은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려서 많이 속상했었는데.
비아톤 경이 안쓰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괜찮으세요?”
“네. 저들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으니까요.”
전생에서는 사람들이 왜 나한테 손가락질하는지 전혀 몰랐었다.
내가 잘못한 거라곤 아픈 거밖에 없는데.
엄마 아빠가 없는 거뿐인데.
당시의 나는 왜 내가 그렇게 악플을 많이 받아야 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걱정 가득한 비아톤 경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방긋 웃어주었다.
“이해되거든요.”
“이해된다구요?”
“마법 연방은 어떻게 해서든 명분을 자신들 쪽으로 가져오려 하고 있어요. 500년간, 여론을 조종하고 대중을 선동해 왔던 그 능력을 바탕으로 말이에요.”
“…….”
“그들은 그들의 이득을 위해서 ‘빌로티안은 평화를 파괴하는 침략자다’라는 프레임을 만들어낼 필요가 있어요. 그리고 여론을 하나로 응집할 공공의 적이 필요했겠죠. 그게 운 나쁘게도 내가 되었을 뿐이에요.”
“……속상하시죠?”
“아니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덧, 엄마 아빠의 침실에 가까워졌다.
“속상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
“이건 화가 날 문제라고 생각해요.”
예전에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이런 말을 본 적 있다.
어떤 변호사님이 하는 말이었는데 ‘성적 수치심’이란 말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피해자가 피해를 입었는데 그게 왜 수치심이어야 한다는 논조였던 거 같다.
성적 수치심이 아니라 성적 빡치심을 느끼는 게 당연하지 않냐고 했었다.
길거리에서 누가 갑자기 날 때린다면 그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화가 나야 맞는 거 아니냐고 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는 속상한 게 아니구요.”
늘 느끼는 거지만 비아톤 경은 아름답다.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 저 눈빛이 내게는 과분하고 호화스러웠다.
“빡쳤어요.”
* * *
아빠와 엄마는 비교적 편한 복장을 한 채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약간 차이점이 있기는 했다.
엄마는 실크 소재의 잠옷이어서 정말 편해 보였다.
아빠는 격식을 좀 빼기는 했지만 어쨌든 제복을 입고 있었다.
어쩐지 나를 만날 때면 늘 제복을 입는 데 불편하냐고 물어봐도 하나도 안 불편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검술 수련할 때는 진짜 편한 복장을 입던데, 왜 저러는지는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엄마가 말했다.
“대략적인 이야기는 들었단다.”
아빠가 입술을 옴짝달싹하고 있었다.
아마도 엄마가 함구령을 내린 모양이었다.
황제의 집무실에서야 아빠가 최상위 명령권자이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엄마가 최강자가 맞는 것 같다.
“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고 한 것이 사실이니?”
“네. 맞아요.”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위험해. 엄마 아빠는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도 따다 줄 수 있지만, 이런 방식은 받아들일 수 없어.”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내게 그런 위험부담을 지우느니, 엄마 아빠는 전 세계와의 전쟁을 택하고도 남을 사람들이니까.
그걸 생각하지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졌다.
전 세계가 나를 손가락질해도, 적어도 내 울타리가 되어줄 사람들이 둘이나 있었으니까.
든든하고 고마웠다.
“이 소식지들을 보면, 빌헬름은 저를 자극하고 있어요. 이는 명분을 쌓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결국 저에게서 빈틈을 만들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언제든 기회가 된다면 저를 납치하려 할 거예요.”
순간, 내 눈앞에서 소식지가 갈가리 찢겨 나갔다.
마치 파쇄기에 넣고 갈아버린 것 같았다.
“당신. 험악한 모습 좀 그만 보이라고 했죠? 자꾸 그러면 딸이 아빠를 싫어하게 될지도 몰라요.”
“……난 아무것도 안 했소.”
실제로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검을 휘두른 모양이었다.
‘실감이 좀 나네.’
세계관 최강자급들이 너무 많이 등장했고, 예전부터 세계관 최강자였던 아빠는 더 최강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체감되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고요? 그럼 저 소식지가 왜 저절로 잘려나갔어요?”
“나도 잘 모르는 일이지.”
“저를 걸고 진짜 몰라요?”
“…….”
엄마를 걸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아빠는 난처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나는 푸흡,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계관 최강자에게도 저렇게 큰 약점이 있다는 것이 재미있었다.
좀 버르장머리 없을지도 모르겠는데, 엄마 아빠가 투닥거리는 모습이 약간 귀엽기도 했다.
“엄마, 아빠.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 저도 쉽게 결정한 거 아니에요.”
“말해보렴.”
“저를 자극하고자 하는 게 확실해요. 그걸 대놓고 보여주고 있어요. 평소였다면 좀 더 은밀하고 티 나지 않게 작업했을 텐데요. 다시 말해, 저들도 급해요.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요. 조금만 틈을 보여주면 결국 움직일 거예요. 대비 시간을 적게 주는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 훨씬 유리할 수 있어요.”
엄마 아빠는 내 말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나는 이성과 논리로 엄마 아빠를 설득했다.
“제가 틈을 보이는 만큼, 그들도 틈을 보일 거예요. 게다가 저는 차원이격결계를 익혔잖아요. 이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저는 적어도 몇 초 정도는 제 스스로의 몸을 보호할 수 있어요. 그 몇 초면 모든 것을 바로잡기에는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
“그들도 함정이라는 걸 알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어요. 그들에게도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 상황과 환경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빠도 내 말에 맞다고 인정해 줬다.
“네 말이 모두 맞다.”
그러나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라도, 아빠에게는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아빠가 말했다.
“빌로티안은 모든 것을 쓸어버릴 힘이 있어.”
나도 안다.
용들의 가세로 그것은 더욱 확실해졌다.
빌로티안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상의 절반은 파괴될 거예요.”
전쟁은 피해야 한다.
이제 피어나는 젊은 청년들, 힘없는 노인들, 죄 없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죽을 거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언제나 가장 약한 사람들이다.
“황폐화된 세상에 제 이름을 남기고 싶지 않아요.”
논리와 이성으로 단련된 창으로는 엄마 아빠의 마음을 뚫을 수 없었다.
“제가 조금 더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제 나는 황실의 봄이 나를 뜻한다는 걸 알고 있다.
엄마 아빠에게는 조금 가혹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내 뜻을 전달했다.
“저에게 남은 마지막 세 번의 봄이 따뜻하길 바라요.”
사람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싸우는 세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 남은 3년이 그렇게 흘러간다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는 선물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사람들의 얼굴에 웃음이 지켜지길 바라요.”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한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한 평화와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절실해질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이 엄마 아빠를 잃지 않기를 바라요.”
그건 정말 힘들고 속상한 일이다.
무서운 세상 속에 홀로 남겨진 그 기분은 정말 끔찍하고 비참하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가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요.”
“…….”
“가족들이 저녁 식탁에 함께 마주 앉아 오순도순 얘기를 나누며 평범한 일상을 공유하기를 바라요.”
“…….”
“제 마지막 기억에 남을 세상이, 전쟁으로 얼룩지지 않기를 바라요.”
“…….”
“제가 기억할 세상이 조금 더 아름답기를 바라고, 저를 기억해 줄 세상이 조금 더 따스하면 좋겠어요.”
나는 진심을 담아 내 마음을 전했다.
“도와주세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