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79)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79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있다.
사실 나는 그 말을 딱히 체감하지 못하고 살았었다.
나한테는 부모님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는 누구보다 그 말을 잘 알 것 같았다.
“……네가 아주 먼 훗날, 이 아비의 마음에 얼마나 큰 대못을 박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아빠는 나를 책망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저 말마저도 나를 향한 애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아주 먼 훗날’이라고 얘기했으니까.
아빠는 내가 아주 먼 훗날까지 살아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거니까.
“미안해요.”
“미안한 줄 알면.”
아빠는 거기까지 말을 하고서 말을 멈췄다.
무슨 말을 하려는가 싶어서 꽤 오랫동안 기다려 봤는데 아빠는 입을 열지 못했다.
결국 엄마가 대신 입을 열었다.
“나랑 연애할 때도 저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한 줄 알면 데이트를 하자고 말씀하시는 거란다.”
“데이트요?”
“네 아빠는 데이트하자고 말을 못 하는 병에 걸리셨거든.”
“그런 병이 어디 있어요?”
얘기만 들어보면 아빠는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한다.
엄마를 걸면 거짓말을 못 하는 병.
엄마에게는 화를 낼 수 없는 병.
엄마의 말이라면 일단 동의하고 보는 병.
데이트하자고 말을 할 수 없는 병.
기타 등등.
“잔병치레가 잦네요. 아빠는 생각보다 약골인가 봐요.”
“네 아빠는 검 말고 다른 걸 배운 적이 없으시거든. 그래서 연애 초기에 엄마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사회화가 안 되어 있는 사람이라서 엄청 많이 다퉜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빠의 연애 얘기라니.
흥미가 부쩍 동했다.
“다퉜다구요? 그치만 그때의 아빠는…….”
“그래, 사회화가 안 된 사람이었지.”
아빠는 검에만 미쳐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미친 사람과 싸우면 큰일 나게 마련이다.
“근데 다툼이 성립되긴 했어요?”
사회화가 안 된 미친 사람이라면 대뜸 칼부터 휘두를 것 같은데.
그도 아니면 다시는 얼굴도 마주치지 않거나.
계속 침묵하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다투지 않았다.”
“그럼 엄마 말이 다 거짓말이에요?”
“일방적으로 폭행을 당했지. 칼에 베이는 것보다 말로 맞는 것이 더 아프더군.”
“그럼 아빠는 엄마한테 화 안 냈어요?”
엄마가 빙그레 웃었다.
“네 아빠는 나를 처음 본 순간부터, 내게 화를 낼 수 없는 병에 걸렸단다.”
“……아.”
얘기를 들어보니 이제야 알겠다.
“아빠가 엄마한테 첫눈에 반했구나. 그런 거죠?”
엄마를 만나서 사회화 과정도 거치고, 지금의 온전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된 거 같다.
아빠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부끄러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는데, 저럴 거면 아니라고 부정이라도 하든지.
아빠는 엄마와 관련해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병에 걸린 것이 틀림없었다.
* * *
좌 엄마, 우 아빠.
‘이거 진짜 든든하네.’
왼쪽에는 황후마마가.
오른쪽에는 황제 폐하가.
가운데에는 내가 있다.
팔짱을 끼고 수도의 번화가를 걸었다.
물론, 우리의 신분을 감출 수 있도록 마법 반지를 착용했다.
마법으로 얼굴과 체형을 바꿔주는 반지였다.
“엄마랑 아빠랑 이렇게 산책해 보는 게 소원이었어요.”
전생에서부터 그랬다.
병원 창문 밖을 바라보면서, 엄마 아빠와 팔짱 끼고 걷는 애들이 너무 부러웠었다.
“미안하구나. 엄마가 너무 바빴었지?”
“아니에요.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엄마는 우리에게 굉장히 미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
“엄마는 제 엄마기도 하지만, 만인의 어머니기도 하니까요.”
아빠는 시종일관 입을 꾹 다문 채 앞만 보고 걸었다.
나랑 팔짱을 끼고 걷는 것이 영 어색한 모양이었다.
걷는 모양새가 목각인형처럼 뚝딱거렸다.
말을 걸면 고장 날 것 같아서 일부러 말은 안 걸었다.
“세린 강을 따라서 걷다 보면 몽마르아 언덕이 나온단다. 엄마랑 아빠랑 연애할 때 많이 갔었어.”
“그때도 아빠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 정도면 다행이게?”
세린 강을 따라 걸었다.
수많은 사람이 하하호호 웃으며 산책로를 걷고 있었고, 상인들이 배를 타고 다니며 물건들을 판매했다.
뭐랄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수컷 한 마리라도 접근하면 죽여버리겠다며 살기를 풀풀 풍기는 바람에 아무도 접근을 못 했단다.”
“수, 수컷 한 마리요? 표현이 과격하네요.”
“그땐 그랬어.”
정말 검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미친 사람이었구나.
엄마가 참 많이 고생했겠다 싶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몽마르아 언덕에 도착했다.
이곳은 제국의 노을 맛집이라고 소문이 파다한 곳이었다.
해 질 녘 주황빛 노을이 수도를 향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곳.
일몰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몽마르아 언덕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참고로 아빠는 엄마랑 데이트하는 내내, 단 한 마디도 얘기를 안 했단다. 정확히 말하면 안 한 게 아니라 못한 거지만 말이야. 주변 수컷들을 경계해야 하고, 혹시라도 모를 위협에 대비해야 하며, 모든 변수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고 거창한 이유를 붙이기는 했는데.”
“사실 엄마랑 있는 게 너무 떨려서 아무 말도 못 한 거죠?”
“어머, 눈치챘니?”
당연했다.
나는 여전히 아빠의 팔을 붙잡고 있는 상태다.
팔을 통해 아빠의 감정이 전부 다 느껴진다.
아빠를 물로 비유하자면, 아빠는 지금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아빠는 가족과의 데이트보다는, 전쟁터가 훨씬 편한 사람이라서.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해. 아마 오늘도 한마디도 안 하실 거야.”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주황빛 하늘은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너무 예뻐요.”
눈을 깜빡이는 시간도 아까워서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오늘의 풍경을 꾹꾹 눌러 담았다.
이 장소.
이 시간.
다 너무 좋았고, 장소와 시간을 함께 채워주는 사람들이 좋았다.
그런데 아빠가 입을 열었다.
“매년, 오늘, 이곳에서 함께 노을을 보자꾸나.”
나보다 엄마가 더 놀랐다.
“당신, 데이트 도중에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아빠가 내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답지 않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약속이다.”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이내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네, 약속이에요.”
정말 허황된 얘기지만 나도 그 약속이 이루어지면 좋겠다.
그 바람을 담아 아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보았다.
저녁노을을 머금은 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왔다.
몽마르아 언덕은 참 아름다웠다.
* * *
정말 어렵게 마음을 정했고, 나는 결국 빌헬름을 유인해 내기로 했다.
이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판단했으니까.
엄마랑 비아톤 경과 아셀리아.
그리고 카린이 함께 머리를 맞대어 정교하고 효과적인 작전을 세우고 있다고 들었다.
다들 굉장히 바빠 보였다.
그런데 아룬은 조금 다른 의미로 바빴다.
“나랑도 데이트해야 해. 우리는 약혼한 사이잖아.”
“……응.”
위험한 일을 수행하기 전에 약혼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건 조금 달랐다.
나는 분명 함정으로서의 역할을 하겠지만, 아마도 내 옆에는 아룬이 함께 있을 거다.
같이 있을 건데 따로 데이트해야만 하는 건가 싶은 의문이 들었다.
“근데 아마 우리는 함께 움직이지 않겠어?”
“내가 대기표를 미리 구해놨어.”
“어떤 대기표?”
“유리모르 제과 본점의 대기표!”
아룬이 활짝 웃었다.
유리가 만들어주는 디저트는 언제나 마음만 먹으면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아룬의 논리는 이랬다.
“밖에서 기다려서, 약혼자와 함께 먹는 디저트는 훨씬 더 맛있을걸? 그리고 대기표가 있어도 1인당 하나밖에 못 사. 훨씬 더 맛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내 소중한 친구인 유리의 사업장을 직접 가보질 못했네.
내가 조금 무심했던 거 같다.
나는 아룬과 함께 유리모르 제과점으로 향했다.
“신분을 좀 감춰야 하지 않을까?”
“제국 수도 내에서만 움직일 건데 뭐. 괜찮을 거야.”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물론 유리모르 제과점 근처에는 세계 각지의 젊은 귀족들로 득실거렸으나, 그중에서도 나와 아룬은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지, 진짜 황녀님이신가요?”
“이사벨 황녀님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셨다!”
사람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대하는 아룬의 태도가 영 이상했다.
“맞습니다, 제가 약혼자입니다.”
“예, 제가 약혼자예요. 약혼식은 아직 치르지 않았지만요.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요. 그렇죠, 이사벨 황녀?”
나는 속으로 황망함을 감추어야 했다.
아룬은 나를 보호하듯 내 어깨를 감싸고 있었는데, 그를 통해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즐기고 있잖아!’
나만 당황하고 있었다.
어쩐지 아룬은 이런 상황을 다 예측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디저트를 함께 먹자는 건 그냥 핑계였고, 사실은 약혼관계를 만천하에 퍼뜨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구두로만 약혼하겠다고 약속했고, 정식 약혼식도 치르지 않았으니까.
나는 그 맛 좋은 초코케이크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르고 먹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아룬이 내게 사과했다.
“이렇게라도 해야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미안해, 이사벨.”
“…….”
“황제 폐하께서 언제 또 말 바꾸실지 몰라서 말이야. 약혼식도 안 치러주시고.”
원래 소설 속 아룬은 공명정대하고, 모든 일을 정면에서 풀어나가는 전형적인 남주였다.
이런 여우 같은 짓은 안 하는 캐릭터였는데 많이 변해버렸다.
“……괜찮아. 그렇지만 이런 일을 벌일 거면 미리 얘기를 좀 해주면 좋겠어.”
“꼭 그렇게 할게.”
아룬이 내 손을 잡았다.
아룬은 정말로 내게 미안해하고 있었다.
“네가 너무 욕심나서 그랬어.”
아무리 봐도 이건 반칙이다.
너무 잘생겨서 더 이상 화를 낼 수 없었다.
그리고 진짜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룬의 여우짓이 싫지 않았다.
정말 어쩔 수 없이 저 마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핑계를 허락해 주는 거 같아서 고마웠다.
그리고 며칠이 더 흘렀다.
황궁의 수석대변인이 된, 전직 소식지 기자 율리가 한 가지 사실을 공표했다.
“……하여, 이틀 뒤, 이사벨 황녀님께서 직접, 과거 봉사활동을 펼치셨던 알페아의 린타 지방을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이틀이 흘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