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8)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8화
작품 속 4황자 미하엘은 이사벨을 싫어했었다.
아니,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라 경멸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벨에게 직접적인 해코지는 하지 않았어.’
미하엘은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을 싫어한다.
그게 미하엘의 신념이었다.
‘이사벨을 싫어하는 것보다, 그 신념이 무너지는 걸 훨씬 더 싫어했지.’
그래서 이사벨이 아무리 나쁜 짓을 저질러도 이사벨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었다.
나는 독자였던 시절부터 그런 미하엘을 좋아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미하엘의 겉모습이 나랑 별반 차이가 없네?’
빌로티안 황가의 육체는 빨리 성장한다.
9살이라면 적어도 십 대 중반 정도의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이로서의 정신이 너무 강해서 신체가 못 따라가는 건가?’
소설 속에서 미하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가 많지는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아무튼 나는 미하엘이 마음에 들었다.
다행히 미하엘도 내가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음에는 내 친구 소개해 줄게.”
“친구요?”
“어. 싸가지는 없지만 귀여워.”
누굴 말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 * *
카린이 말했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카린은 무뚝뚝한 얼굴로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서 밖으로 나갔다.
‘후, 무서웠다.’
최종 흑막 카린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냉철해지는 것 같았다.
‘조심해야 해.’
어딘지 모르게 따뜻함을 종종 느끼곤 했지만 그래도 조심하는 게 맞았다.
캐릭터 설정이 설정이니만큼 언제 본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나는 카린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오늘도 실수는 없었겠지?’
모든 질문에 똑 부러지게 대답했고 숙제도 다 했다.
약점 잡힐 만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잘 지나갔다.’
거처가 바뀌었다 뿐이지 내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마법을 열심히 수련했고, 몇몇 선생님이 나를 찾아와 예법 같은 것들을 가르쳐 주곤 했다.
그런 내게 특별한 선생님이 한 명 있었다.
시종장 데일사의 남편이자 미하엘의 검술교관인 랜서 경이었다.
그는 내게 딱히 검을 가르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빌로티안 검술은 못 익힙니다. 빌로티안의 황녀가 다른 검술을 배울 수도 없지요.”
“그럼 어떡해요?”
“그러면 말입니다.”
랜서 경은 얼굴에 수염이 가득했다.
덩치도 엄청나게 커서 마치 산적 공룡 같았다.
“저랑 소꿉놀이하고 놀까요?”
“소꿉놀이요?”
소꿉놀이라는 말에 육체가 먼저 반응했다.
나는 이성으로 내 육체의 욕구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저, 저는 황녀인걸요.”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각양각색의 생각과 사고를 읽고 타 개체의 행동을 모방하여 봄으로써 보다 넓은 시야를 지닐 수 있는 최적의 교육 방법입니다. 일종의 역할극이라 볼 수 있죠.”
“역시 그렇죠?”
랜서 경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즐거웠다.
나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자, 황녀님. 저희는 지금 사교 파티에 와 있는 설정입니다.”
“알겠어요!”
내가 나름 우아하게 말했다.
“랜서 경. 제 오라버니는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나요?”
그냥 나는 오라버니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고 싶었을 뿐이다…… 라고 말하기에는 솔직히 너무 재미있었다.
5살의 육체는 소꿉놀이에 아주 취약했다.
“아주 뛰어난 실력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울 듯하군요, 레이디.”
“하나 랜서 경. 제 오라버니는 무척 힘이 세다고 들었는걸요.”
“너무 세서 곤욕을 치르는 중입니다, 하하!”
요약하면 간단했다.
미하엘은 힘이 세도 너무 셌다.
그 힘에 의지하는 경향이 강해서, 정교한 검술 구사를 못 한다고 했다.
‘실제로 4명의 황자 중 완력이 가장 세다고 나왔지, 아마.’
나는 또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척했다.
어른들이 즐겨 마시는 블랙 홍차였다. ……라는 설정이었다.
여전히 찻잔 안에 차 같은 건 없었다.
나는 빈 찻잔을 홀짝이며 교양 있는 척 말을 이었다.
“제 오라버니는 성정이 활달하고 부지런하여 지나치게 많은 것에 관심을 두어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게 사실인지요?”
말은 어렵게 했지만 결국 정신 사납단 뜻이었다.
검술 말고 좋아하는 것이 많은 미하엘은 검술 수업에도 여러 번 지각했다.
그런데 대답은 다른 사람이 했다.
“예, 사실입니다.”
시종장 데일사였다.
아내와 만난 랜서 경의 얼굴은 흙빛으로 물들었다.
“자, 자기? 아, 아니, 여보? 아, 아니, 데, 데일사 시종장?”
와, 사람 얼굴이 저렇게 실시간으로 꺼멓게 변하는 건 처음 봐.
“랜, 서, 경. 지금 무얼 하고 있습니까?”
사교 파티에 참가한 레이디와 기사 설정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어요.
나는 말을 하려다 그냥 참았다.
괜히 불똥 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모르는 척이 상책이다.
“지금은 검술교습 시간 아니었습니까?”
“데일사, 그, 그게…….”
“호칭을 바로 하시길 바랍니다. 지금은 일과 중이니.”
“시종장. 이것은…….”
데일사 시종장은 분명 무표정이었다.
그렇지만 눈빛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서워.’
무서우니 적극적으로 눈을 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미 눈을 깔고 있지만 더 열정적으로 깔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최종 흑막 카린을 제외하면, 데일사 시종장이 제일 무서웠다.
“시, 시종장. 이건 분명한 월권행위요. 나는 지금 황녀님과 소꿉, 아니, 검술……!”
“지금 몇 시입니까?”
그 말에 랜서 경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내 정신 좀 보게!”
“지금은 미하엘 황자님의 검술교습 시간 아닙니까?”
“안 그래도 지금 바로 가려고 했어.”
“했어?”
“했어요.”
“요?”
“했습니다.”
아무래도 소꿉놀이에 푹 빠져 있던 랜서 경이 다음 수업을 잊은 모양이었다.
땅을 보고 있는데도 데일사 시종장의 눈길이 느껴졌다.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님의 입술에는 대체 뭘 발라놓은 겁니까?”
“그게…….”
“어른의 화장품은 아이의 피부에 자극적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이제 와서 고백하는 거지만, 나는 화장도 한 상태다.
얼굴은 약간 밀가루 같았다.
입술은 사인펜으로 칠한 것 같았다.
누가 봐도 이상하다고 말할 테지만,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예뻐 보였다.
병원에 있을 때에는 한 번도 못 해봐서인지. 아니면 5살의 육체 때문인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화장하는 내내 너무 설레고 즐거웠다.
“그리고 내 신발은 언제 가져갔습니까?”
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물론 사이즈는 맞지 않았다.
신었다기보다는, 그냥 하이힐 위에 내 발을 올려놓은 수준에 불과했다.
‘짜증 나, 이게 왜 재미있는 건데!’
솔직히 존잼이었다.
뭔가, 어른이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화장과 하이힐이라는, 뭔가 아이는 발을 들이면 안 될 것만 같은 금단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만 같은 묘한 감각.
굉장히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그렇지만 도둑질은 다른 문제다.
‘아니. 그렇다고 아내 것을 훔쳐 오면 어떡해요, 선생님!’
역시 모르는 척해야겠다.
냉철하게 판단을 끝낸 나는 그냥 모른 체했다.
그래도 랜서 경은 ‘황녀님이 시켰어’라고 고자질을 하지는 않았다.
꽤 의리 있는 편이었다.
한바탕 소동이 일고 있을 무렵, 쩌렁쩌렁 큰 소리가 들려왔다.
“랜서 경!”
이 커다란 목소리는 분명 미하엘의 것이었다.
아마도 1층에서 소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이후, 총체적 난국의 황당한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랜서 경과의 검술 수업을 하나도 안 잊었는데, 여기에는 다 사정이 있었어! 지각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고!”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상황을 요약해 보면 이러했다.
랜서 경은 나랑 노닥거리느라 오라버니와의 수업에 늦었다.
그런데 오라버니도 똑같았다.
밖에서 놀다가 수업에 늦은 모양이다.
‘그러니까, 둘 다 수업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얘기네.’
그런 주제에 랜서 경은 조금 뻔뻔했다.
본인도 교습을 잊고 있었으면서 진중한 척 말했다.
그 음성에는 마나가 담겨 있어서 1층까지 전달되었다.
“황자님. 지각은 나쁜 겁니다. 일단 제가 내려가서 사정을 들어보지요.”
그렇게 말한 랜서 경은 데일사 시종장을 힐끗 바라보았다.
황자께서도 어차피 지각이니 별로 문제 될 것 없지 않느냐며 소심하게 물어보는 듯한 모양새였다.
데일사 경의 이마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랜서 경은 도망치듯 1층으로 내려갔다.
‘데일사 시종장이 따라가잖아?’
나는 하이힐을 조심스레 벗어서 내려놓았다.
왠지 좀 아쉬웠다.
더 신고 싶었는데.
‘아무튼 나도 따라가야겠다.’
뭐랄까. 흥미진진한 상황이 펼쳐질 것 같은 것이, 5살 육체의 호기심을 왕창 자극했다.
‘오! 드디어 삼자대면?’
랜서 경, 오라버니, 데일사 시종장이 1층에서 만났다.
그런데 오라버니의 어깨 위에는 생전 처음 보는 생물체가 올라가 있었다.
“이거 봐봐. 이 녀석이 자꾸 날 치근덕대는 바람에 교습에 늦을 수밖에 없었어. 절대 까먹은 게 아니라구.”
청설모보다는 훨씬 컸고 족제비를 닮은 모양새였다.
언젠가 다큐멘터리로 보았던 오소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응?’
나는 분명 저 동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몰랐다.
저 동물이 내 빙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줄은.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