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19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196화
저만치 왼쪽 구석.
엄마는 붉은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고 있고.
그보다 조금 오른쪽.
아빠는 눈물을 흘리며 내 이름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오른쪽.
세르몬이 보였다.
‘왜 다들 저렇게 어두운 공간에 홀로 숨어 있는 건데.’
바깥에서는 축제가 한창인데, 사람들은 기뻐하고 있는데, 우리 가족들은 슬픔의 수렁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었다.
세르몬 오빠는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요사하리만치 날카롭게 빛나던 붉은 안광이 사라져 있었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미없군.”
인형이었던 시절의 세르몬처럼.
감정이 모조리 닳아버린 사람 같아 보였다.
“죽일까?”
무엇을 죽이겠다는 얘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르몬의 눈동자는 무척이나 공허했다.
“아니면…… 죽을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세르몬의 책상 위에 밧줄이 준비되어 있었다.
저 밧줄은 중범죄자들을 교수형에 처할 때 사용하는 밧줄이 틀림없었다.
“얼른 이사벨을 보고 싶은데.”
세르몬은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죽으면 볼 수 있을 거 같기도 하고.”
나는 안 된다고 소리쳤다.
아무리 소리쳐도 내 목소리는 세르몬에게 닿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왜 저러는 거예요?”
“네가 그만큼 소중하기 때문이겠지.”
“내가 떠났으니까, 내 몫까지 최선을 다해서 살아줘야 하잖아요. 그래야 내가 기쁘잖아요.”
“남은 사람들의 고통을 네가 헤아리지 말렴.”
“…….”
“어쩌면 저들은 죽는 사람보다 더 큰 멍에를 지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감당하기 벅찰 만큼.
“저 아이를 보렴. 그래도 저 아이는 네가 바란 대로 행동하고 있지 않니?”
어느덧, 세르몬 오빠의 모습도 왼쪽으로 조금 옮겨졌다.
그리고 그 오른쪽에는 백마를 타고 있는 한 기사가 보였다.
단단한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가리고 있었지만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카만 오빠?”
카만이었다.
카만은 수많은 기사를 대동하여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제국은 축제에 심취해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치열하게 싸워야 한다. 평화는 힘으로부터 이룩되는 것이므로.”
카만은 무려 7개의 기사단을 이끌고 마물 원정을 떠났다.
그는 마물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는 의지를 여러 번 표명했고, 기사들은 그의 뒤를 따랐다.
“어때? 보기 좋지?”
“……아니에요.”
내가 아는 카만은 사실 마물 토벌이라든가, 검술 같은 것을 저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저 해야 했기에, 혹은 익혀야 했기에.
착한 아들이 되고 싶어서 검술에 매진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도망치고 있는 거야.’
내가 없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거다.
저대로 내버려 두면, 마물 소탕과 전투에만 미쳐버릴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세르몬 오빠와는 다른 방식으로 미쳐가고 있었다.
‘다들 왜 그러는 건데.’
어차피 내 죽음은 정해져 있었다.
모두가 내 끝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다들 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이러면…….”
“…….”
“이러면 내가 마음 놓고 떠날 수가 없잖아요.”
나도 마지막을 끊임없이 준비하고 대비해 왔다.
좋게 떠나고 싶어서.
그래도 최대한 즐겁게 떠나고 싶어서.
매일매일 마음을 다잡으며 내 스스로를 세뇌해 왔다.
“이러면…….”
“…….”
이러면 내가 무너지잖아.
내가, 떠날 수가 없잖아.
“그렇다면 저 아이를 보겠니?”
카만의 모습이 왼쪽으로 옮겨지고,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하하하핫! 나는 신이 난다!”
이번에는 미하엘이었다.
미하엘은 약간 낯부끄러운 행색으로 산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급조한 가죽옷을 대충 걸치고 있었는데 옷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애매했고 거적때기라고 보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저곳은 ‘비 오는 산’이란다.”
나도 얘기를 들어본 적 있다.
365일 내내 비가 내리는 산.
위험한 마물들이 많아서 인간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하는 곳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
미하엘은 소리치며 산속을 뛰어다녔다.
자세히 보니 발바닥에서는 피가 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지롱!”
얼마나 오래 뛰어다닌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아주 오랜 시간 뛰어다녔다는 것만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재미있어! 즐거워! 행복해! 통쾌해!”
바닥에 고여 있는 물을 첨벙첨벙 밟기도 했고 나무를 타기도 했고 바위와 바위 사위를 폴짝폴짝 뛰어다니기도 했다.
이윽고 미하엘은 어느 동굴 안에 들어갔다.
체력이 다했는지 벽면에 기대고 앉았다.
“재미있다. 헤헤.”
한참 동안 헤헤- 하고 웃었다.
“재미있어. 비 맞고 뛰어다니는 게 최고야.”
그렇게 중얼거리던 미하엘은 자신의 팔로 무릎을 끌어당기고 쪼그려 앉았다.
“……재미없어.”
얼굴을 푹 묻었다.
“한 개도 재미없어.”
미하엘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나도 안 신나.”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치 어린 시절의 미하엘을 다시 보는 것만 같았다.
어른이 되기 싫어 성장을 거부했던 어린아이.
그 어린아이가 내 눈앞에 있었다.
미하엘은 품속에서 너덜너덜해진 화관을 꺼냈다.
“어? 이사벨?”
동굴 입구에는 아무도 없는데, 미하엘은 환상을 보는 것 같았다.
미하엘의 몸에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화관이 이렇게나 낡았지 뭐야? 우리 새 걸로 같이 만들자. 이제 나도 잘 만들어. 보여줄까?”
꽃이 하나도 없는 동굴 속.
미하엘은 손으로 동굴 벽면을 파내기 시작했다.
“내가 예쁜 화관 만들어줄게.”
미하엘의 손가락에도 피가 맺혔다.
미하엘의 볼을 타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그니까 여기서 딱 기다려. 가지 말고.”
어느새 나도 미하엘을 보며 울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남겨진 사람들에게 남겨진 짐은 너무 무거웠다.
미하엘의 모습이 작아지며 왼쪽으로 옮겨졌다.
또 다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유리였다.
“유리모르 제과점은 문을 닫겠습니다.”
많은 실무진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러나 유리의 의지는 확고했다.
“제가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거든요.”
내 시녀로서, 늘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만 보여주었던 유리의 머리카락이 잔뜩 헝클어져 있었다.
옷매무새도 단정하지 못했다.
데일사 시종장님이 유리의 옷매무새를 정돈해 주었다.
“유리. 너는 아레나 궁의 시녀다. 몸가짐을 바로 하도록.”
그렇게 말을 하는 데일사 시종장님도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었다.
“몸가짐을 바로 하면요? 황녀님이 돌아오나요?”
단 한 번도 데일사 시종장님에게 반항한 적 없던 유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기강을 중시하는 데일사 시종장님은 그런 유리를 혼내지 않고 슬쩍 안아주었다.
“이별은 언제 겪어도 힘들지. 두 번째인데도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유리를 품에 안고서 유리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유리는 데일사 시종장님 안에서 세상이 무너질 듯 울었고, 데일사 시종장님의 뺨에도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기둥 뒤에서 훔쳐보던 루루카 유모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유모는 내가 즐겨 입던 파란 드레스를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그 모습이 왼쪽으로 움직이고, 나르모르의 모습이 보였다.
나르모르는 빈민가에서 뒹굴거리던 그 모습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져 있었다.
“귀찮군.”
무슨 서류를 결재해야 한다는데 그것도 안 했다.
“귀찮아.”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비서로 보이는 어떤 사람이 황급히 다가와 일 얘기를 길게 했는데 나르모르는 손을 내저었다.
“귀찮아. 알아서 해.”
“대표님이 그러고 계시면 나르모르 코퍼레이션의 하루 손실이 얼만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게 다 무슨 소용인데? 귀찮으니 마음대로 해.”
“대표님!”
“아니면 다 너 가져.”
“…….”
“귀찮으니 꺼져.”
나르모르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르모르에게서는 그 어떤 의욕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아셀리아는 그 반대였다.
일에 파묻혀서 잠도 자지 않고 일만 했다.
“리아. 너 한숨도 안 잤고, 한 끼도 안 먹었잖아. 그러다 병나.”
“병나면 어때?”
아르미텔 경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셀리아를 바라보았다.
“죽기밖에 더하겠어?”
“리아. 제발. 수프라도 한 술 떠먹어.”
“거기 두고 가. 나중에 먹을게.”
“리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아셀리아는 귀찮다는 듯, 아르미텔 경을 힐끗 봤다가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내 머리카락을 잘라서 선물해 줬었던 가발이었다.
“나는 이날, 제일 소중한 친구를 얻었어.”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가발을 한 번 껴안았다가 머리 위에 썼다.
“그 소중한 친구가 아름다운 세상을 원해. 그러려면 내가 더 열심히 해야…….”
거기까지 말하던 아셀리아의 목이 꺾이는가 싶더니 몸이 뒤로 넘어갔다.
“리아!”
아셀리아는 기절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일에만 매진한 결과인 것 같았다.
리아의 코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괴로워.’
너무 괴로워서 미칠 것 같았다.
“어떤 생각이 드니?”
“괴로워서 죽을 것 같아요.”
“너는 이미 죽었단다.”
“돌아가서 한 명, 한 명 안아주고 싶어요. 나는 괜찮다고. 그러니까 다 괜찮아 달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위로해 주고 싶어요. 다들, 그만 울었으면 좋겠어요.”
“돌아가고 싶니?”
너무 당연한 말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순간보다, 삶이 귀하고 소중했다.
저토록 힘들어하는 사람들 곁에 내가 있어주어야 했다.
그 어느 때보다,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활활 타올랐다.
“살고 싶니?”
나는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죽었다는 걸 알지만.
살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아마도 지금이 때인 것 같구나, 아들아.”
그때.
머리 위에 마법진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누군가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