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200)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200화
예전, 이사벨이 7년 만에 눈을 떴을 때와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다르지 않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악화됐다.
데일사 시종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이렇게 순서를 안 지키시면 제가 법도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나 말고 다른 애들은 다 지키라그래.”
“다들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전에는 다들 데일사의 통제에 잘 따라줬었다.
그래서 별 무리 없이(?) 이사벨과 가족들은 각자의 데이트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안 통하게 되었다.
결국 데일사는 이사벨과 일대일 면담을 나누기에 이르렀다.
“이러다 아레나궁이 폭삭 무너지겠습니다.”
“무너진다니요?”
“서로 황녀님과 먼저 만나겠다고 기 싸움을 어찌나 하시는지…… 기둥이 흔들릴 정도군요.”
“그, 그럼 요 며칠 땅이 흔들렸던 게 지진이 아니었단 말인가요?”
“네. 지진이 아니라 기세 싸움이었습니다.”
“저, 전혀 몰랐어요.”
“당연하지요. 황녀님 앞에서는 모두 착한 강아지들이니까요.”
결국 데일사의 중재 아래, 황가는 매주 수요일 저녁을 ‘가족의 날’로 정하게 되었다.
이사벨을 독점하는 사람 없이, 모두가 평등하게(?)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었다.
그걸로 데일사는 아주 잠깐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으나 그게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첫 번째 가족의 날, 초대받지 못한 아룬이 가족들의 식탁에 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당당히 선언했다.
“이제 결혼을 허락해 주십시오.”
순간 화기애애했던 ‘가족의 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세르나를 제외한 모두가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세르몬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잘못 들은 거 아닙니다, 형님. 저는 이사벨의 당당한 약혼자이고, 이제 결혼을 요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요즘은 죽여 달라는 말을 그렇게 길게 하나?”
아룬의 얼굴을 향해 포크가 날아들었다.
일반인들의 눈으로는 볼 수조차 없을 만큼 빨랐으나 아룬은 그다지 당황하지 않고서 포크를 가볍게 잡아냈다.
“저는 죽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이사벨과 백년해로할 거라서요.”
“아무래도 그대는 예의가 없군.”
카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족이 모여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고 있는 이 시간을 굳이 이렇게 찾아와 방해해야 하는 건가? 내 그대에게 황궁 예법의 지엄한 도를 가르치겠다.”
스릉-
그가 검을 뽑았다.
이상한 건 황제도 딱히 말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미하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 그래도 난 쟤가 마음에 안 들었어. 형. 같이 패도 되지?”
“본디 한 사람을 다수가 핍박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으나, 저 흉악한 도적놈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도의를 따질 필요가 없겠지.”
“알겠어. 같이 패자.”
미하엘이 목을 돌렸다.
뚜둑, 뚜둑, 소리가 났다.
아룬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님, 분명히 결혼 허락해 주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내가? 언제?”
카만이 검을 휘둘렀다.
카만 또한 강자이기는 했으나 아룬은 이미 [시한부 악녀가 죽고 나면> 속 남주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갖게 된 상황.
카만의 검과 미하엘의 주먹을 그리 어렵지 않게 피하거나 막아냈다.
“저는 이사벨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그게 자랑할 일이냐?”
론의 눈에는 은근한 실망이 담겨 있었고 아룬은 아차 싶었다.
“하긴, 그건 그렇죠. 제가 이런 걸로 생색내려는 건 아니었습니다.”
“실망할 뻔했군.”
이사벨은 한숨을 내쉬었다.
도무지 이 상황이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스테이크나 먹자.’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면 그녀가 말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누군가는 쓰러져야 끝이 난다.
오늘도 그러겠거니 싶었는데 세르나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결국 중요한 건 우리 딸의 생각 아니겠어요?”
그러자 거짓말처럼 싸움이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이사벨을 향했다.
“이사벨은 저와 결혼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결혼을 약속했거든요.”
론이 물었다.
“저 말이 정말이냐?”
“그게…….”
“거봐라. 아니라고 하지 않느냐?”
아룬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이사벨은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폐하.”
“나는 도둑놈에게 이사벨을 내어 줄 생각이 없다. 썩 물러가라.”
“저는 이사벨의 생각을 들어야겠습니다.”
세르몬이 이번에는 나이프를 집어 던졌다.
“이사벨이 싫다잖아.”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본래대로면 얼마든지 나이프를 막아냈을 아룬이 나이프를 막지 못했다.
“큭.”
나이프가 아룬의 어깨에 박혔다.
이사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룬!!!”
* * *
세르몬은 아차 싶었다.
‘당했다.’
이사벨이 달려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거기서 세르몬은 결국 이사벨을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빠! 이게 무슨 짓이에요!”
세르몬은 말해주고 싶었다.
저거 쟤가 일부러 맞은 거다.
급소는 피했고, 힘줄도 다 피했다.
그냥 네 관심을 끌기 위해 일부러 맞은 거란 말이다.
“얼른 사과하세요. 오빠들이 하는 행동들은 정당하지 못해요. 언제부터 황가가 이렇게 폭력적인 가문이었어요?”
지난 500년간, 늘 그래왔다.
그렇지만 모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룬, 괜찮아?”
아룬이 쿨럭쿨럭 기침을 했다.
사실 몸에 별다른 충격은 없었지만, 그래도 왠지 기침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괜찮아, 이사벨. 걱정 끼쳐서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어?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은 세르몬 오빠인데!”
이사벨이 고개를 휙 돌려 세르몬을 노려보았다.
세르몬은 이사벨의 눈을 피했다.
“어서 사과하세요.”
“그건 쟤가…….”
“빨리요. 오라버니가 사과 안 하면, 저는 오라버니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요.”
“…….”
세르몬은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함정에 빠진 것은 그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사벨의 도끼눈을 보고 있노라니 사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미안.”
“제대로, 격식 갖춰서 사과하세요.”
“실례했다. 내 손속이 너무 과했음을 인정하지.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한다.”
아룬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오른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참고로 나이프가 박힌 곳도 오른 어깨였다.
움직임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 보였다.
세르몬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딱히 짚지는 않았다.
결국 아룬과 손을 맞잡았다.
“이해해 줘서 고맙군.”
아룬이 아주 작고 빠르게 말했다.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허락?”
“이건 허락의 악수 아니었습니까?”
“…….”
세르몬의 이마에 힘줄이 돋아났으나 이사벨 때문에 더 이상 화를 내지는 못했다.
결국 세르나가 다시 말했다.
“이사벨, 네 생각은 어때?”
* * *
나도 나를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아룬을 좋아하기는 한다.
아룬의 마음을 다 느껴버렸는데,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기겠어.
그리고 저 얼굴을 보면 없던 사랑도 퐁퐁 솟아날 정도다.
근데 막상 결혼하고 싶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조금 부끄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용기 내야지.’
아룬이 내게 내준 용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나도 아룬을 위해서 작은 용기는 내야 했다.
“아룬을 좋아하기는 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결혼하고 싶니?”
“…….”
나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용기 내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일단 용기를 내니 내 마음을 조금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진지하게 결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아빠와 오빠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렇지만 결혼을 한다면 아룬 외에 다른 사람을 생각해 본 적도 없어요.”
이번에는 아룬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날 밤, 황궁회의가 이어졌다.
이게 뭐라고 회의까지 할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여기에는 비아톤 경을 비롯하여 데일사 경, 테이슬론 경, 유리, 나르모르, 아셀리아를 비롯한 내 친구들까지 초청되었다.
미하엘은 불량한 자세로 앉아 이파리를 질겅질겅 씹었다.
“왜 도둑놈을 그냥 둬? 도둑놈은 패야지.”
저렇게 불량한 미하엘은 처음 봤다.
뭔가, 괜스레 내가 잘못 키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아톤 경이 거기에 힘을 보탰다.
“아주 흉악한 도둑놈인가요? 그렇다면 제가 직접 잡아 오겠습니다.”
거기에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세르몬이 말했다.
“걱정 마. 결혼 전에는 반드시 죽일 거니까. 카만, 네 생각은?”
“도둑을 제거하는 일이라면 저 또한 돕겠습니다. 그것이 곧 제국을 위하는 길이므로.”
아오, 진짜.
당사자를 앞에 두고 자꾸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박수를 짝! 짝! 두 번 쳤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확실하게 말할게요.”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고 아빠와 오빠들을 말릴 사람은 나밖에 없는 거 같다.
“저는 아룬이랑 결혼하고 싶고요.”
이래서는 끝이 안 날 거 같다.
아룬이라면, 내 남은 삶을 함께해도 좋을 것 같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오히려 아룬의 얼굴이 붉어졌다.
조심스레 내 손을 꼭 잡았는데, 손이 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이 기분 좋았다.
“아룬이랑 결혼하게 해주세요. 자꾸 도둑놈을 처리한다느니, 없애겠다느니, 그런 말 하시면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말로 간주할 거예요.”
“…….”
“…….”
다들 큰 충격을 받은 모양새였다.
그래도 한 번은 넘어야 할 산이었다.
“자꾸 그러면 저 가출합니다.”
음, 가출보다 좀 더 좋은 말이 있으려나?
“분가합니다?”
그 말에 아빠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의 회의는 이쯤 하도록 하지. 심신이 무척 곤고하여 회의에 집중하기가 어렵군.”
“아, 죽여야 할 놈이 생각났군.”
“잊고 있던 아주 중요한 임무가 생각났어. 그것을 속히 처리하러 가야겠군.”
“최벌꿀이랑 싸움 약속 있었는데 까먹고 있었다! 우헤헤헤!”
다들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비아톤 경이 내게 다가왔다.
“저는 황녀님이 가출이든 분가든 상관없습니다. 단.”
나를 보는 눈과 사뭇 다른 눈으로 아룬을 바라보았다.
“황녀님을 보필하는 건 저, 비아톤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황녀님을 보필하도록 하지요.”
그러고서 유유히 멀어졌다.
테이슬론 경은 좋은 구경 했다며 껄껄대며 웃었다.
카린 선생님, 아니, 이제 카린 전하가 말했다.
“저는 황녀님을 응원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저의 도움이 필요하면 말씀만 주십시오.”
“선생님도 왠지 웃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다행이다 싶어서요. 방식은 조금 이상하지만, 다들 황녀님을 무척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저는 그거면 됐습니다.”
그리고 아룬을 스쳐 지나가면서 경고하듯 말했다.
“저는 결혼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만, 잘해야 할 겁니다. 황녀님을 힘들게 하면, 그 곱절로 그대가 힘들어질 테니.”
나르모르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결혼에 찬성하기는 합니다만, 잘해야 할 겁니다. 대륙에 제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은 없거든요. 아룬 경을 아주 힘들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 유리?”
“당연하지. 황녀님 울리면 진짜 가만 안 둬요.”
어느새 나르모르와 유리는 팔짱을 끼고 있었다.
늘 티격태격하던 둘이었으나, 나를 함께 애도하는 가운데 정이 들어버렸다나 뭐라나.
아무튼 보기는 좋았다.
아셀리아도 씨익 웃으면서 다가왔다.
“저한테도 황녀님은 무척 소중한 친구예요.”
눈동자가 흐릿해졌다.
“내 친구 울리면 진짜 가만 안 둘 줄 알아.”
방금은 아마도 용군주로서 말을 한 것 같았다.
아셀리아도 멀어졌고, 이제 이곳에는 나와 아룬만 남게 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말했다.
“어쩐지…… 결혼이 쉽지 않을 거 같네. 응? 아룬?”
아룬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화사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고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왜, 왜 그래?”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고, 아룬은 그리 빠르지 않은 속도로, 그러나 집요하게 나를 쫓아왔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창가에 걸터앉게 됐다.
마침 푸른 달빛이 새어 들어와 아룬의 얼굴을 비추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룬의 붉은 입술이 보였다.
“어, 어깨는 괜찮은 거지?”
어쩐지, 아룬의 호흡이 조금 가빠져 있었다.
“키스, 할게.”
아룬이 내 손에 깍지를 꼈다.
반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리듯 나는 차차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서 감각에만 집중했다.
아룬의 감정이 해일처럼 내게 쏟아졌다.
그 수많은 감정의 폭포가 사탕으로 뭉쳐 입 속에서 살살 녹는 것만 같았다.
사랑이 녹아 몸 안으로 들어와 손끝, 발끝까지 달콤해졌다.
아주 달콤한 밤이 될 것 같다.
순간, 아룬이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나는 손깍지를 풀고서 아룬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내 쪽으로 서서히 끌어당겼다.
여전히, 아까보다 더 달콤한 사랑이 내 입안에 굴러다녔다.
이 사탕이 절대 녹지 않기를.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