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4)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4화
아빠는 나를 무감정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정말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눈을 깜빡여봐라.”
목소리도 굉장히 차가웠다.
그때, 비아톤 경이 나섰다.
공손히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폐하께서 제게 증거를 보이라 하셨으니, 믿고 맡겨만 주신다면 제가 책임지고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윤허한다.”
비아톤 경은 한쪽 무릎을 꿇은 상태로 몸을 반 바퀴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햇살이 나를 내리쬐는 것만 같았다.
미인은 옳았다.
그는 무척이나 다정하고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뺘뺘뺘뺘, 황녀님! 눈을 깜빡해 보시겠어요?”
그의 톤이 무척 높아졌다.
“깜~ 빡!”
어른들이 아기를 다루는 모범적이고도 정석적인 태도였다.
나도 모르게 까르르 웃음이 터졌다.
눈을 힘껏 떴다.
“깡빠!”
나는 눈을 깜빡여보았다.
비아톤도 나랑 똑같이 눈을 깜빡였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비아톤도 따라 깜빡이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내가 마술사가 된 것만 같았다.
까르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 황녀님, 이번에는요, 두 번 갈 거예요. 두 번. 이해하셨지요?”
비아톤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손이 큰 건지, 얼굴이 작은 건지 얼굴이 다 가려졌다.
두근두근.
나는 심장이 뛰었다.
‘이, 이게 말로만 듣던 까꿍 놀이인가 봐.’
언제 저 아름다운 얼굴이 튀어나올까?
언제 까꿍! 해줄까?
아기인 나는 본능적으로 설레고 말았다.
“깜~ 빡! 깜~ 빡!”
“까르르!”
나는 한바탕 또 웃음을 터뜨리고서 눈에 힘을 줬다.
두 번 깜빡였다.
“깡빠! 깡빠!”
너무 재미있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이 상했는데도 저걸 설레하는 나 때문에 또 자존심이 상했다.
그렇지만 정말 너무 즐거웠다.
“폐하. 황녀께서 한 번에 이어 눈을 두 번 깜빡였습니다. 이 정도면 증거로 인정해 주시겠습니까?”
“…….”
아빠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샤벨!”
허리를 살짝 숙였다. 예의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이샤벨, 임, 미, 다.”
어어, 어어.
내 머리가 지나치게 가분수인 탓에 중심을 잃고 쓰러졌…… 아니? 안 쓰러졌다.
‘날 들어 올렸다?’
로판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공주님 안기 같은 건 없었다.
아빠는 나를 제 몸도 못 가누는 한심한 물고기를 보는 것만 같은 표정으로 나를 집어 들고 있었다.
엄지와 검지, 딱 두 개만 써서 날 집어 올린 꼴이 마치 오물을 집어 든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낚싯대에서 걸린 물고기처럼 허공에서 퍼덕거렸다.
‘으아악! 꼴이 이게 뭡니까!’
내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들어 올려진 것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았다.
진짜 자존심 상하는 건, 이조차도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하늘을 나는 굴욕감?’
그렇게 말하면 너무 없어 보이니까 그냥 비상하는 굴욕감이라고 해야겠다.
즐거움과 굴욕감을 동시에 맛보는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렇다면 내 이름은?”
“롬! 롬 비오치안임미다.”
“네가 날 선택한 것이 맞느냐?”
“마즙니다.”
“진짜로 내 말을 모두 이해하고 대답하는군.”
“마즙니다.”
비아톤 부관이 덧붙였다.
“황제께서 제국에서 가장 예리한 검이기 때문인 것도 맞으시지요?”
“마즙니다.”
“…….”
“혹시 그 검이 제일 멋있었나요?”
“마즙니다!”
아빠는 내 대답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성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황녀가 검을 선택하였다.”
비아톤 경에게 물었다.
“황녀가 선택한 검이 무엇이냐?”
“론 빌로티안, 검술 제국 빌로티안 최후의 검이자, 황제 폐하를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전개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는지 다들 침묵했다.
검림학사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러므로 서기관은 기록하라. 오늘 황녀의 선택을.”
* * *
결국 암살자는 등장하지 않았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내 선택이 나쁘지 않은 것 같았다.
‘원작 비틀기 성공.’
그놈의 원작 보존의 법칙이랄까. 일단 그런 법칙은 없는 것 같았다.
‘응?’
순간,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내가 정신을 잃기 직전 매번 느꼈던 어지러움이었다.
이러고 나면 꼭 간호사 선생님들이 바쁘게 움직였고, 한참 후에야 눈을 뜰 수 있었다.
‘무서워.’
잠시 잊고 있었던 공포가 나를 잡아먹었다.
원작 보존의 법칙일까? 원작을 뒤틀었으니, 나한테 형벌이 떨어지는 걸까?
‘싫어.’
이렇게 정신을 잃고 나면, 또다시 병실에서 깨어날 것 같았다.
엄마도, 아빠도, 아무도 없는, 약품 냄새만 가득한 병원일까 봐. 원래대로 돌아갈까 봐.
‘싫어!’
기절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또 그렇게 아프고 싶지 않았다.
‘제발요. 나 말 잘 들을게요.’
누군가 그랬다.
전생에 죄를 지어서 이렇게 태어났다고.
‘죄 안 지을게요. 21살까지만 살아도 좋아요. 진짜 진짜 착하게 살게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었다.
‘여기 사람들도 내가 다 지켜줄게요. 나 사랑해 달라고 욕심도 안 부릴게요. 그냥 21년만 열심히 살게요. 엄청 소중한 선물들 남기고 떠날게요. 그때까지만 살게 해주세요. 제발요.’
이 꿈같은 시간이 깨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안…… 돼!’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익숙하지 않은 느낌.
아니,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포근한 기분이 들었다.
‘따뜻해.’
나는 누군가에게 안겨 있었다.
놀랍게도 아빠가 나를 여태껏 안아 들고 있었다.
‘안겨 있어.’
누군가 나를 안아줄 사람이 있다는 거. 그게 내 아빠라는 거.
누군가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를 이 사실이 내게는 기적이었다.
전생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아빠의 품은 넓고 따뜻했다.
병원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했던 포근함이었다.
“후에에엥!”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아빠의 셔츠 앞섶을 꼭 말아 쥐었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후에에에엥! 에꼬야(내 거야).”
그러다가 문득 목덜미가 싸늘해졌다.
‘참아야 해.’
빌로티안 황가는 본래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의 황가.
아무리 아기의 몸을 가졌다고 해도 칭얼거리는 아이는 눈 밖에 날 것이다.
‘또 버려지고 싶지 않아.’
나는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아보려 했지만 이미 터진 눈물샘은 마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빠가 귀찮다는 듯 중얼거렸다.
“시끄러운 아이군.”
괜히 엄마가 보고 싶었다.
애기들이 그렇게 엄마를 찾던데, 그게 본능인가보다.
선택식은 끝났는지, 이 자리에는 아빠와 비아톤 경만 남아 있었다.
“퍽 귀찮으신 모양이니 제가 받아 들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비아톤 경이 나를 안아 들었다.
때마침, 나는 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제가 안으니 울음을 멈추시는군요.”
슬쩍 올려다보니 비아톤 경은 씨익 웃고 있었다.
“제 품이 더 안락한가 봅니다, 폐하.”
“네 근육이 물러진 탓이겠지.”
조심스레 나를 안아 든 비아톤 경은 부드러운 손길로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그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에 나는 마음이 몽글몽글해지고 몸이 노곤노곤 해졌다.
“예. 제 근육이 물러진 탓으로 하지요.”
나는 나도 모르게 비아톤 경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육아 마스터 비아톤 경의 품은 정말 편안했다.
“아기 황녀님을 위해서라면 근육이 얼마든지 물러져도 괜찮을 것 같군요.”
“…….”
“제가 잘 안아서 방까지 모시겠습니다.”
비아톤 경은 나를 안아 든 채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았다.
비아톤 경은 나를 안고 복도를 걸었다.
그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폐하의 얼굴에 표정이 생긴 것 같아요. 기쁘네요.”
눈부시다 못해 찬란한 미소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사랑을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긴, 황녀님이 이렇게까지 귀여우신데 표정이 안 생기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풍뎅이죠.”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비아통 경, 죠아.”
어떻게 안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다정하고 세심한 사람의 설정 중 하나가 전직 암살자이자 검귀라니, 말도 안 된다.
이건 작가님의 실수가 틀림없었다.
“정말요?”
“웅.”
비아톤 경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자신의 볼을 내 볼에 마구 비볐다.
건장한 성인 남성의 볼이었지만 하나도 까끌까끌하지 않았다.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 같은 느낌이었다.
비아톤 경은 나를 아기침대에 눕혀주었다.
내 이마에 가볍게 키스했다.
폭신폭신한 젤리가 이마에 닿은 것 같았다.
‘빌로티안식 경례 겸 인사를 하고 돌아가겠지?’
올곧은 검로에 빛나는 영광을.
“올곧은 귀여움에, 빛나는 사랑을.”
누군가가 하면 오그라들 말인데, 비아톤 경이 하니까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역시 말의 완성은 얼굴이다.
‘으……. 졸려.’
잠을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비아톤 경과 인사도 하지 못하고 잠들어 버렸다.
나는 졸릴 때 자고, 눈 뜨면 먹고, 먹고 나면 싸고를 무한 반복했다.
* * *
몇 달이 흘렀다.
그사이, 내 어휘 실력은 쑥쑥 늘었다.
“엄마마마! 안아져여(안아줘요).”
내 안아달라는 말에 엄마는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웃음을 지었다.
“말을 어쩜 이렇게 잘할까? 이 아이는 혹시 천재일까? 황궁 학사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언어 발달이 빠른 아이는 처음이래.”
“언어 발달뿐이겠어요?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척 풍부하면서도 성숙하다고 해요. 이렇게 귀여우신데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는 게 정말 놀라워요.”
루루카는 정말 열정적으로 나를 칭찬했다.
그리고 칭찬은 아기를 춤추게 했다.
덩실덩실.
엉덩이가 절로 움직였다.
“게다가 태생영창까지도 외우셨죠. 제가 듣기로 태생영창을 외우는 아이는 미로텔 마법 연방에서도 0.1%가 안 된다고 해요.”
“그래?”
“네! 황녀님은 천재가 틀림없어요.”
엄마와 유모는 늘 애정 어린 눈으로 나를 관찰했다.
나는 그 관심이 싫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겠다.
싫지 않은 수준이 아니라, 그냥 그 관심이 너무너무 좋았다.
‘내가 이렇게 관종일 줄이야.’
그리고 대망의 오늘이 찾아왔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