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45)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45화
“일단 씻고 와요. 유모, 유리 언니랑 나랑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를 좀 준비해 줘.”
보아하니 며칠 정도는 굶은 것 같았다.
갑자기 너무 무거운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날 것 같기도 했다.
“가볍고 소화 잘되는 음식으로 부탁해.”
“알겠어요.”
일단 황송해하는 유리를 욕실로 밀어 넣고서 나는 테이블에 앉아 고민하기 시작했다.
‘으아. 당당히 말하기는 했는데.’
나는 유리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절망의 구렁텅이 속에서 마지막 희망의 끈 하나를 잡은 것만 같은 그 표정.
나는 그렇게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이 아닌데, 그토록 반짝거리는 것을 바라보던 것 같은 그 표정.
‘너무 오바했나 싶기도 하고.’
유리를 돕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으나 유리를 돕는다는 건 로스일드 공작가와 약간의 척지는 걸 감수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로스일드에서 쫓아낸 아이를 빌로티안 황가에서 받아들여 후원해 주는 건 정치적인 문제로 엮일 소지가 커.’
빌로티안 황가에서 공식적으로 후원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 나한테 천만 루덴이 있으니까,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로 들어올 정도의 돈은 되겠지.’
말하자면 정착지원금 정도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돈은 사실 폭등 로켓을 쏘아 올릴 돈이었다.
이 돈이 없어지면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그때, 데일사 시종장님이 내 방에 들어왔다.
“황녀님…… 음? 황자님도 계셨군요?”
아. 맞다. 오빠도 여기 있었지.
하도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도 까먹고 있었다.
오빠는 입가에 침을 황급히 닦아냈다.
“아, 안 잤어.”
잤네, 잤어. 어쩐지 조용하더라.
오빠가 조용한 순간은 잘 때랑 기절했을 때밖에 없으니까.
오빠는 크게 하품을 하고서 기지개를 켰다.
“재미없어졌어, 난 갈래.”
폴짝.
의자에서 뛰어내렸다.
살짝 뛰었는데도 쿵! 하고 바닥 전체가 울렸다.
여기가 튼튼한 황궁이라 망정이지, 일반적인 집이었으면 바닥이 무너졌을 거다.
“다음에는 칭찬받을 테다.”
오빠는 묘한 승부욕을 불태우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야! 벌꿀이! 너 어딨냐! 나랑 격투 놀이하자!”
라고 크게 외치면서.
데일사 시종장님은 빙그레 웃었다.
“그래도 오늘은 창문으로 안 뛰어내리셨군요.”
“그러…… 게요?”
“황녀님 앞에서는 행동거지를 무척이나 조심하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제 앞에서요?”
“네.”
저게 조심하는 거라고? 방금도 바닥 부술 뻔했고 문도 박살 났는데?
“황녀님이 소중한가 봅니다.”
“행동거지를 조심하는 거랑 제가 소중한 거랑 상관이 있어요?”
“있지요.”
왠지 모르게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함부로 대하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생긴 것 같습니다.”
“…….”
하긴.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 법이니까.
오빠가 힘 조절 잘못하면 나는 그길로 멀리 떠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에르베 산맥 사건 이후로, 오빠랑 같이 있을 때 두렵다거나 다칠 뻔했다거나 한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보통 그런 자각이 이렇게 늦게 생겨요?”
“황녀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안 생겼을지도 모르겠군요.”
“…….”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데일사 시종장님은 늘 그렇듯 눈치가 무척 빨랐다.
“그래서…… 무슨 고민을 그토록 하고 계십니까?”
“그게…….”
“대략적인 상황은 듣고 왔습니다.”
데일사 시종장님은 이미 거의 대부분의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시종장과 여러 가지 얘기를 나누었다.
“……해서 어떻게 하면 유리 언니를 도울 수 있을지 고민 중이에요.”
“그 소녀를 왜 돕고 싶습니까? 황녀님에게는 그 어떤 실익도 없습니다.”
사실 이득 같은 건 별로 없었다.
[시한부 악녀가 죽고 나면> 속에서, 유리는 별로 비중이 없는 조연이었다.그냥 가끔 ‘수학 천재 누구누구’라고 몇 번 언급될 정도였다.
그러니 테이슬론 경이나 나르모르처럼 내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을 확률이 높았다.
“그냥, 마음이 아파서요.”
“…….”
저 아이가 홀로 짊어지고 있는 짐들이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혼자서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가 지나쳐서.
나는 그래서 저 아이를 돕고 싶었다.
“많은 사람이 저를 도와주었거든요.”
사람들의 조건 없는 후원이 없었다면 나는 20살까지 살지 못했다.
병원비가 없어 쫓겨났을 거다.
아니, 애초에 입원도 하지 못했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겠지.
내게는 엄마도 아빠도 없었고, 당연히 돈도 없었으니까.
얼굴 모를 수많은 사람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았다.
‘아차.’
비아톤 경의 말이 떠올랐다.
‘걱정 마세요! 성기사단이 척살해 줄 거랍니다!’
있지도 않은 과거 얘기를 하면 안 되지.
나는 일단 둘러댔다.
“이 세상이 저에게 선물이 되어주었듯, 저도 누군가의 선물이 되어주고 싶어요.”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너무 전생 얘기를 해버렸나 싶어 조금 무서웠다.
“……너무 거창한 꿈일까요?”
* * *
결과적으로 데일사 시종장님은 나름의 방법을 찾아주었다.
“시종장의 권한으로 유리를 황녀님의 시녀로 고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오, 정말요?”
“예. 제게 그 정도 인사 권한은 있습니다. 약간 걸리는 것은 유리가 평민 출신이라는 것입니다만, 14올림피아드의 수석이니 어찌어찌 구색은 갖출 수 있을 것 같군요.”
다 씻고 나온 유리 언니는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
무슨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발발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나는 그 옆에 앉아 유리 언니의 손을 살짝 잡아주었다.
“앞으로 당신은 황녀님의 시녀가 될 것입니다. 황녀님의 위신에 해가 되지 않도록 매사에 품행을 단정히 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데일사 시종장님의 눈빛은 매서웠다.
처음 보는 사람은 차갑기 짝이 없다고 느낄 것이 분명했다.
말투 자체는 차가웠다.
“황녀님과 잘 어울리기 위하여 학업에 정진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시녀로서 부끄럽지 않은 소양과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본 시종장은 당신의 학업 시간을 원하는 만큼 보장하겠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무척이나 따뜻했다.
“뛰어난 성취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황녀님과 깊이 친교할 수 있을 테니.”
“그게…… 제 공부의 이유인가요?”
“예. 또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
내 손을 잡은 유리 언니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몸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게, 정말로 제가 공부해야 할 이유인가요? 황가의 명예라든가, 후원자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라든가…….”
“황녀님의 시간을 즐거이 채워드리는 것이 당신의 역할입니다.”
말을 조금 더 다정하게 해줘도 좋을 텐데.
나는 유리 언니의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시종장님은 저랑 친하게 지내달라고 부탁하는 거예요.”
“…….”
“사실 저도 친구가 없어서 외로웠거든요.”
유리 언니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에휴.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으면 이 정도로 저렇게 감정이 북받쳐 오를까.
나는 조심스레 언니의 손 위에 손수건 하나를 올려주었다.
데일사 시종장님은 여전히 얼음장 같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또한 황궁의 근로 복지는 상당히 훌륭한 편입니다. 그 외에도 각종 매뉴얼이 담긴 책자를 드릴 테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황궁에서 일하는 사람의 가족이 아프면 황궁에서 책임져준다.
치료 시작부터 완쾌까지.
데일사 시종장님의 말은 그런 뜻이었다.
“다만, 한 가지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기는 합니다만…….”
“어머니나 아버지의 허락이 있어야겠죠?”
보통 아레나 궁에서 일하는 사람에 대한 인사권은 아레나 궁의 시종장에게 있게 마련이었다.
그렇지만 이번 경우는 조금 특수했다.
로스일드 공작가에서 유리를 도둑으로 몰아 쫓아냈다.
그 유리를 받아들이는 건, 말하자면 범법자를 시녀로 들인다는 뜻이다.
그런데 황궁은 범법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곧, 로스일드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황궁에서 유리를 고용한다는 것은 ‘유리는 도둑이 아니다’를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로스일드 공작가에서 분명히 반발할 거예요.”
“…….”
데일사 시종장님이 한동안 침묵했다.
“왜 그러세요?”
“그저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분이신가 싶다가도, 이럴 때 보면…….”
“이럴 때 보면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종장님.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두 가지가 있는데요.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나도 말을 끊었다.
끊기 신공은 나도 할 줄 안다.
그렇지만 데일사 시종장님은 딱히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조금 분했다.
“어쨌든,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하도록 하겠습니다.”
황가 입장에서 이건 ‘치명적인 일’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지만 분명히 껄끄러운 일이었다.
데일사 시종장님도 나름의 위험을 짊어져야 하는 일.
“제가 할게요.”
“예?”
“어마마마와 아바마마께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그게 옳은 것 같아요.”
내가 벌인 일이다. 그러니까 내가 책임지는 것이 맞았다.
그날 저녁, 나는 아빠와 저녁 식사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엄마도 함께 있었다.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저녁이네.’
전생에서는 그저 꿈이었는데. 이제는 이게 현실이었다.
괜히 행복하고 설렜다.
행복한 저녁 식사가 끝나고 엄마가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그래서…… 우리 딸이 꼭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왜 엄마랑 아빠를 불렀지요?”
저 동작 하나에도 기품이 서려 있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엄마를 따라 하고 말았다.
톡톡.
나도 나중에는 엄마처럼 해야지.
엄마처럼 자연스러운 기품이 묻어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흉내는 내봤다.
“그게요. 사실은요.”
이러이러해서요.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유리를 시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아빠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 말은…….”
아빠의 입에서 상상하지도 못했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