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48)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48화
“으, 응?”
비아톤이 당황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키르엔, 네가 왜 여기 있어?”
“먼저 괜찮냐고 물어보는 게 정상 아닌가?”
“너무 괜찮아 보이는데?”
둘은 구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둘은 옛 연인이었다.
10대 후반의 어린 날, 둘은 교제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자연스레 멀어졌다.
비아톤은 비아톤대로, 키르엔은 키르엔대로 너무 바빴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 것도 없었다.
어느 순간, 둘은 헤어졌음을 인식했고, 시간이 더 흐르자 그저 동료처럼 지내게 되었다.
그게 벌써 10년이 넘었다.
“이 좁은 도로에서 사두마차를 타고 다니는 정신 나간 귀족이 비아톤이라니. 좀 실망인데.”
“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비아톤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황녀님께 최고로 좋은 것만 해주고 싶거든.”
“그렇다면 안에 황녀님이 타고 계신다는 뜻이야?”
키르엔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황궁에서 오냐오냐 자란 철부지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좁은 길에 사두마차를 타고 다닐 리 없다.
비아톤이 목소리를 낮췄다.
“황녀님 때리면 안 된다.”
키르엔이 더욱 인상을 썼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너 예전에도 상관을 쥐 잡듯이 패서 외성으로 쫓겨났잖아.”
키르엔은 본래 황궁 소속 흑룡검대의 부검대장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흑룡검대의 검대장을 폭행하는 불상사를 저질렀다.
물의를 일으킨 탓에 그녀는 흑룡검대 부검대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외성의 수비대장이 되어 황궁을 떠나야만 했다.
“맞을 만하니까 팼지.”
“와, 되게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키르엔은 비아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비아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어린 시절 잠깐 교제했던 연인이었으나, 여전히 비아톤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나만 묻자.”
“뭔데?”
“라몬 말인데.”
“라몬? 아아. 그 부하 검대원들 성추행하다가 너한테 폭행당했던 흑룡검대의 검대장?”
키르엔은 여러 날을 참아왔었다. 라몬이 아무리 허튼소리를 해도 받아주었다. 은근슬쩍 계속되는 스킨십과 더러운 눈빛도 눈감아 주었다.
어쨌든 라몬은 그녀의 상관이었으니까.
하지만 라몬이 신입 검대원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들여 수면제를 먹이려던 그 순간을 발견한 키르엔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결국 키르엔은 하극상을 일으켜 라몬을 두들겨 팼다.
그날 이후로 라몬은 키르엔을 죽여 버릴 거라며 이를 갈았다.
“나랑 불미스러운 일이 있고 나서 며칠 뒤에 행방불명 되었더라.”
“아, 맞아. 그랬었지.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
“네가 그랬어?”
“내가? 내가 왜?”
비아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듣는 소리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 말고 누가 그런 걸 할 수 있는데?”
“나눈 모르눈 일이얌.”
어째 말투가 상당히 수상해서 더 따지려던 찰나, 이사벨이 마차에서 내렸다.
“비아톤 경, 왜 무섭게 웃고 있어요?”
“네? 웃는데 무서울 수 있나요?”
“그러게요?”
이사벨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게 되네요?”
그러나 제삼자의 입장에서 비아톤을 바라보고 있던 키르엔은 비아톤의 표정이 변화했음을 직감했다.
“저 말이 맞아. 똑같이 웃고 있는데 웃음이 달라졌어.’
정확히 뭐가 바뀐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의 미소와 아까의 미소는 달랐다.
아까의 미소는 ‘누군가를 실종시키고서 짓는 미소’ 같은 느낌이었고, 지금은 ‘행복하고 따스한 미소’ 같은 느낌이었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키르엔은 이사벨에게 허리를 숙였다.
“황녀님을 뵙습니다. 외성 수비대장 키르엔입니다.”
간단하게 예의를 차렸다.
철부지 황녀와 굳이 얽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럼 저는 이만.”
멀어지려던 찰나, 이사벨이 말했다.
“미안해요.”
“예?”
“안에서 얘기 다 들었어요. 저는 몰랐어요. 저는 황궁 도로 상황이 어떤지, 제가 누리고 있는 이 호사가 남들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키르엔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비아톤이 입 모양으로 ‘아냐, 키르엔, 아냐’라고 말했으나 키르엔은 참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키르엔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몰랐다’라는 얘기였다.
그녀에게 그건 핑계였다.
“모른다는 것이 방패가 되지는 않습니다.”
“저도 알아요.”
키르엔은 솔직히 의외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기분 나빠할 줄 알았다. 겉으로 티를 내지 않더라도 속으로는 분해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사벨에게서는 그런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저는 이제 겨우 여섯 살인걸요.”
키르엔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사벨의 겉모습이 10대 초반쯤 되어 보여서 잊고 있었다. 황녀가 이제 겨우 여섯 살이라는 걸.
“그러니까 모르는 게 부끄럽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해요. 몰랐던 건 배우면 되고, 잘못한 건 고치면 되잖아요.”
“…….”
“앞으로 많이 배울 거예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요.”
“……그렇군요.”
“그래서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키르엔은 괜스레 긴장했다.
사실 키르엔은 지체 높은 귀족가의 자제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키르엔이 생각하는 그들의 말에는 항상 숨겨진 칼날이 존재했다.
겉과 속이 너무 달라서 키르엔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사벨의 ‘부탁’이라는 말이 무척 껄끄럽게 느껴질 뿐이었다.
“예. 뭡니까?”
“사인해 주실 수 있어요?”
이사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저번에는 경황이 없어 티를 못 냈지만, 사실 키르엔은 이사벨이 무척 좋아하는 캐릭터였다.
가까스로 자제하고는 있지만 지금 속마음은 꽃밭이었다.
‘아무리 봐도 미친 잘생쁨이야.’
훤칠한 키. 은빛 갑옷으로도 숨길 수 없는 아우라. 약간은 중성적인 외모. 포니테일로 정리한 붉은 생머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사벨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덕질의 상대를 눈으로 직접 보고 있으니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제…… 사인이요……?”
“네! 사인해 주세요!”
마차 안에서 이걸 꺼내오느라고 좀 걸렸다.
이사벨은 메모지와 펜을 내밀었다.
“갑자기 사인을 해달라고요?”
황녀에게 사인 요청을 받을 줄 몰랐던 키르엔은 당황했다.
비아톤을 바라보았는데 비아톤은 갑자기 마부를 부축해 주고 있었다. 사고가 난 지 꽤 시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말이다.
참고로 마부는 비아톤의 직속 부하였고 이 정도 사고로는 절대 다칠 일 없는 엘리트였다.
“여긴 사석이니까 말 편하게 해도 되죠?”
“그건 황녀님의 자유입니다만…….”
“저는 예전부터 언니 사인이 꼭 갖고 싶었어요.”
이사벨은 진심이었다.
그 진심이 눈에 담겼고 키르엔은 조금 혼란스러웠다.
‘나를 언제 봤다고?’
그 마음을 읽었는지 이사벨이 말을 이었다.
“언니에 대한 소문은 이미 범지구적으로 퍼져 있단 말이에요.”
“범지구적이요?”
“아주아주 널리 황궁까지 퍼져 있단 뜻이에요.”
다시금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사인요!”
키르엔은 얼떨결에 사인을 해주고 말았다.
사인을 받아 든 이사벨은 폴짝 뛰며 즐거워했다.
“우와아아! 진짜 이걸 얻었다!”
이사벨은 저게 저렇게 즐거울까 싶을 정도로 행복해했다.
정말로 어린애 같았다.
‘아니, 실제로도 어린애가 맞기는 하지.’
키르엔은 이사벨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녀 주변에 유독 빛이 모여드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얼른 자리를 뜨려던 키르엔이 한 가지를 물었다.
“그런데 외성 쪽으로는 왜 가시는 겁니까?”
“아, 유리 언니를 데리러 가려고요.”
“유리 언니라면…… 그때 그…….”
“맞아요.”
키르엔은 또 이상함을 느꼈다.
그런 초췌한 행색의 아이더러 언니라고 부르다니.
아무래도 이 황녀는 이상했다.
“왜 직접 데리러 가시죠? 그것도 황제의 부관까지 대동해서.”
황제의 부관이 저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닐 텐데.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말은 못 했다.
왜냐하면 그 바쁠 것이 분명한 황제의 부관은 지금 마부석에 앉아 휘파람을 불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 모습만 보면 세상에서 제일 한가로워 보이기는 했다.
“음, 도와주고 싶어서요.”
“왜 그 아이를 그렇게 돕고 싶어 하십니까?”
사실 키르엔은 대략적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로스일드의 여식과 불미스러운 일들이 있었다지.’
그랬다. 이건 자존심 싸움이었다. 로스일드에서 쫓아낸 아이를 황녀가 받아들이는 것.
키르엔 입장에서는 유치한 자존심 싸움에 불과했다.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사벨의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이유가 필요한가요?”
“…….”
“저도 잘은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왠지 보답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보답을 말하는 거죠?”
이사벨이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무려 황제의 부관씩이나 되는 비아톤 경이 제 선생님이 되어주셨고 저를 지켜주시잖아요. 그리고 남들은 평생 가도 타보지 못할 사두마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타고 다니고, 매일매일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이사벨이 제자리에서 씩씩하게 뛰어보았다. 그녀의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힘차게 휘날렸다.
이렇게 뛰어도 심장이 아프지 않다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이렇게 달리기도 잘할 수 있고.”
후우!
가슴과 볼을 빵빵하게 부풀려 숨을 들이마셨다가.
하아아아!
얼굴이 새빨개질 만큼 길게 내뱉어보았다.
“숨도 이렇게 쉴 수 있잖아요. 저는 너무너무 행복해요.”
예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찬란한 순간들을 매일매일 마주하고 있다.
모든 날이 그녀에게는 선물이었다.
“저는 이렇게 매일매일 선물을 살아가고 있어요. 이 모든 게 너무 감사해서 무언가에 보답해야 할 것 같아요.”
거기까지 말한 이사벨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까지가 대외적인 명분이구요.”
그래. 그럼 그렇지.
키르엔은 이사벨에게 또다른 속셈이 있으리라 확신했다.
“친구가 필요해서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