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55)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55화
론이 말했다.
“앞으로 무척 피곤할 참이다.”
“……네?”
겁에 질려 있던 이사벨은 저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72일 22시간 23분 55초 전이군.”
“…….”
“이 얼마나 피곤한 일이란 말이냐.”
론은 피곤해야 했다.
그는 작년 이사벨이 했던 말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절로 기억되었다.
이사벨이 했던 말 하나하나가 비수가 되어 그의 가슴팍에 꽂혔으니까.
‘그럼 아빠가 맨날 맨날 피곤하면 좋겠어요. 그러면 오늘처럼 날을 함께 보낼 수 있겠죠?’
‘생일 만요. 1년에 딱 하루만, 아빠가 피곤해 주시면 안 돼요?’
대답하지 못하는 론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눈으로 말했었다.
‘혹시 열여섯 번이 너무 많은가요?’
그 말들이 가슴에 사무쳐서 그는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왠지, 피곤해야만 딸의 생일을 챙겨줄 명분이 생기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제도 피곤했고 오늘도 피곤하고 내일도 피곤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72일 22시간 23분 11초 후에도 피곤할 것이고. 피곤해서 죽을 것 같군.”
“…….”
그쯤 돼서야 이사벨은 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방금까지 가슴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실체 없는 공포가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난 무엇을 무서워하고 있던 거야?’
딱 한 발자국.
그저 한 발자국이었다.
그 한 발자국 떨어져서 아버지를 살펴보니, 아버지는 전혀 화가 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론의 표정은 늘 같았다.
달라졌던 건 이사벨의 마음뿐이었다.
“아빠…….”
이사벨의 맑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까는 무서워서 그랬다면,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론도 그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이사벨의 표정이 달라진 것만으로도 론은 기뻤다.
“저를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선물을 준비했을 뿐인데, 그걸 네가 왜 사과하느냐?”
이사벨은 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선물을 72일 전에 준비한단 말인가.
‘아빠는 아빠의 방식으로 나를 배려해 주고 있는 거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이사벨은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후에엥!”
육체적으로 많이 성장했다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곱 살이었고, 한 번 터진 울음보를 이성으로 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론은 찔끔 놀라 이사벨의 눈치를 조금 살피다가 이내 이사벨을 살짝 안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사벨을 조심스레 꼭 안아주었다.
“무척 피곤하군.”
단단한 손길로 이사벨의 작은 등을 토닥여주었다.
피곤하다고 연신 중얼거리는 론의 표정에서, 피곤함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러 론은 이사벨을 다시 내려주었다.
“황녀가 그렇게 울보 겁쟁이여서 쓰겠느냐?”
“울보 아니에요!”
“네 얼굴을 봐라. 그게 울보가 아니면 무엇이냐?”
론은 티슈를 꺼내 이사벨의 눈가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코도 팽 풀고.”
팽!
이사벨은 마법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저도 모르게 코를 팽! 하고 풀었다.
생각보다 조금 더 많이 나와서 놀랐지만 여기서 부끄러워하는 게 더 이상해서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울보.”
“우, 울보 아니라니깐요.”
“정말 아니냐?”
론은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이사벨을 바라보았다.
제삼자가 보았다면 깜짝 놀랐을 것이다.
철혈의 황제 론에게 저런 표정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할 테니까.
“정말 아니에요!”
“정말 아니냐?”
“…….”
“내가 보기엔 세상에서 제일가는 울보인데.”
이사벨은 힝, 하고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뭔가 현타 오네.’
지금 감정의 동요 속에 이성이 육체에 잠식당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그녀의 정신연령은 20살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이사벨은 그냥 깔끔히 인정했다.
“울보 맞는 것 같아요.”
“역시 그렇지?”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인정하는 딸을 바라보며 론은 활짝 웃었다.
이사벨은 그 미소를 바라보며 두 눈을 끔뻑거렸다.
‘아빠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피식 웃는 것 정도는 여러 번 봤다. 그마저도 햇살 같았었다.
그런데 이건 햇살이 아니라 태양을 눈앞에 마주한 것 같았다.
아, 이건 반칙이지.
“윽, 눈부셔.”
이사벨도 모르게 속마음이 튀어나와 버렸다.
이성을 이 정도로 되찾았는데도 본심이 튀어나왔다는 것은, 그만큼 이사벨이 그 말에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론은 뒤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창문을 통해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꽤 강렬한 햇살이었다.
‘눈이 부실 법하군.’
론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쳐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라. 단순하게 생각해도 된다.”
론이 보는 이사벨은 지나치게 조숙했다.
아주 가끔 어린애 같은 모습이 나오곤 했는데, 론은 그게 이사벨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너는 겨우 일곱 살이다.’
일곱 살이 열일곱 살 같을 필요는 없다.
론이 보는 이사벨은, 매일 열일곱 살 같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낱 미물이 황궁의 보물창고에서 도둑질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 그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어떻게 귀여운 벌꿀오소리가 보물창고를 털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경계가 삼엄한 황궁의 보물창고를.
“이렇게 쉬운 것도 일일이 가르쳐 줘야 한단 말이냐? 정말 너무 피곤할 노릇이구나.”
“죄, 죄송해요.”
“앞으로 죄송하다는 말은 금지다.”
다른 말은 다 괜찮은데 이사벨에게 죄송하다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다.
그건 왠지 그냥 기분이 나빴다.
이사벨의 어깨가 축 처지는 것도, 이사벨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며 두려워하는 것도 싫었다.
“앞으로 또 죄송하다고 말하면, 사전에서 죄송하다는 말을 지워 버리겠다. 황명으로 말이다.”
“…….”
“대답.”
“네, 네. 알겠어요.”
그제야 론은 빙그레 웃었다.
“김벌꿀을 불러보아라. 네가 이름을 부르면 달려올 거다.”
“버, 벌꿀이를요?”
“걱정 마라. 크게 혼내지 않을 테니.”
이내 이사벨은 김벌꿀! 하고 크게 외쳤다.
‘진짜 벌꿀이가 나타날까?’
목소리가 정말 들릴까?
고민했던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벌꿀이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탁! 탁!
창문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론이 커튼을 다시 열고 창문을 열어주며 피식 웃었다.
“여긴 8층인데 잘 올라왔군.”
론은 김벌꿀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그리 놀라지 않았다.
“이사벨. 잠시 김벌꿀과 둘이 얘기를 좀 하려고 하는데. 아레나 궁으로 가서 기다리거라. 이 녀석과 대화를 하고서 고이 보내 줄 테니.”
론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고, 이사벨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덕분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아, 알겠어요. 해석 마법 걸어드릴게요.”
이사벨은 해석 마법을 걸어준 뒤 조심스레 말했다.
“너, 너무 혼내시면 슬퍼할 거예요.”
“걱정 마라.”
론은 이사벨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신기하게도 그 손길은 이사벨에게 큰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안심하고서 아레나 궁으로 돌아갔다.
* * *
황제와의 대화를 끝낸 김벌꿀은 정원으로 뛰어갔다.
갈대밭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생각에 잠겼다.
사실 김벌꿀은 이전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생각과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용?’
김벌꿀의 머리 위에 [?] 표시가 생겨났다.
‘용이 뭐지?’
황제는 김벌꿀에게 혹시 황실을 수호하는 용이냐고 물었다.
흑룡의 후예냐고도 물었는데, 김벌꿀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뭔지 모름.] [그치만 좀 익숙.]뭐랄까. 머릿속에서 삐죽삐죽 뭔가가 자꾸 솟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나님은 용?]아닌데. 나는 벌꿀오소리인데.
‘나는 용?’
김벌꿀의 몸에서 오색빛깔 마나가 새어 나왔으나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주 부끄럽고도 창피한 무언가였다.
그 강력한 감정의 잔재가 무의식에 남아 있었다.
‘최후 종식과 파괴와 투명의 어쩌고? 어쩌고 흑염룡?’
알 수 없는 이름도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룬? 아룬이 뭐야? 먹는 거?’
그렇지만 벌꿀오소리 김벌꿀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김벌꿀은 벌꿀오소리.] [벌꿀오소리는 고민 안 해.]심사숙고 같은 건 벌꿀오소리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벌꿀오소리는 위풍당당하게 걸음을 옮겨 이사벨의 방으로 돌아와서 꼬리를 흔들었다.
븅븅-
이사벨 앞에서만 내는 소리를 내며 강아지처럼 착 앉았다.
이사벨은 그런 김벌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김벌꿀의 턱 밑을 살살 간지럽혔다.
븅븅-
벌꿀이는 이사벨의 손길이 좋은지 이사벨의 정강이 부근에 몸을 비볐다.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혼이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별로 안 혼났구나? 다행이다.”
븅븅-
김벌꿀은 이사벨 앞에 추욱 녹아내렸다.
배를 보이며 누운 뒤, 앞발로 이사벨의 다리를 톡톡 건드렸다.
“응? 왜?”
뭔가 요구하는 것이 있는 듯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