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60)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60화
루카인 병장이 말했다.
“에르베 산맥은 저희같이 가진 거라곤 튼튼한 몸뚱어리밖에 없는 것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3D 업종이었다.
모두가 기피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뭐 다른 말로 하면 무식하고 못난 놈들이란 뜻입니다! 으하하핫!”
“…….”
“미하엘 황자님께서 이동 관문을 자유로이 이용하시며 썰매를 즐기시는 모습을 보며 무척 부러웠습니다.”
이사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륙 북쪽, 차가운 북풍과 맞서며 매일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저들. 이동 관문을 사용할 수조차 없어 가족과도 만날 수 없는 저들.
저들이 미하엘을 보며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 어떤 박탈감을 느꼈는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아! 물론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닙니다. 그야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미하엘 황자님은 고귀하신 혈통이고, 저희는 그냥 혈통이니까요.”
그런데 처음으로 관심을 가져준 사람이 어린 이사벨이었다.
“어느 날, 황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다고.”
언젠가, 미하엘 황자가 직접 경계초소들을 찾았다. 그리고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직접 사과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황족이 직접 평민들을 찾아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유사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미하엘은 이렇게도 말했다.
‘동생한테 무척 혼이 났지 뭐야?’
늘 아무 생각이 없는 미하엘이지만, 그날만큼은 약간의 생각이란 걸 했다.
이사벨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이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았다.
이사벨은 몰랐지만, 그날을 기점으로 미하엘은 많이 변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황족 앞에 저희는 그저 무가치한 돌멩이 같은 놈들일 텐데 말입니다.”
“…….”
루카인은 손바닥을 슬쩍 훔쳐봤다.
어려운 말을 하려면 커닝을 좀 해야 했다.
“어…… 그러니까, 황녀님께서 쏟아주신 그러한 관심과 총애에 보답하고자 찾아왔습니다. 황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무가치한 돌멩이 같지 않아요.”
지구와는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신분제를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곧 황제와 황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귀하다고 생각해요. 검술 제국은 제국민들과 함께 세워진 국가예요. 제국민들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진짜 강한 힘은 제국민들에게서 나와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그 말에 병사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황족인 이사벨에게 저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이사벨의 말에 감동하며 한동안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한편, 말을 하던 이사벨은 오래전 기억을 떠올렸다.
그녀를 후원해 주었던 사람 중 누군가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던 후원자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한 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씩씩하게 이겨내기만 해요. 그게 내 기쁨이에요.’
그리고 이제는 이사벨이 말했다.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그저 오라버니에게 말 몇 마디를 했을 뿐이에요.”
“그 몇 마디가 많은 것을 바꾸었습니다, 황녀님. 저희에게 정말 필요했던 것이 그 작은 관심과 인정이었거든요.”
루카인 병장이 으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벨이 그렇게 대단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붉어진 소년 병사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사벨은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그녀가 오래전 받았던 그 따뜻한 관심들을, 아주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전해 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루카인 병장이 말했다.
“황녀님께서 가지셨던 그 작은 관심이 세상을 바꾸는 거 아니겠습니까? 테이…… 테이, 뭐더라?”
루카인이 옆쪽에 선 사내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고, 사내는 귓속말로 작게 말해주었다.
“테이사불입니다, 병장님.”
“아, 그래, 테이사불! 테이사불 이동 관문처럼 훌륭한 것도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테이사벨 이동 관문은 그저 마도 공학의 산물이 아니었다. 적어도 에르베 산맥의 병사들에게는 희망이었다.
이사벨은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해 준 황녀였다.
“이제 저도 눈에 넣으면 무지막지하게 아플 것 같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아들 녀석을 자주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에르베 산맥의 병사들은 결코 황녀님의 은혜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 * *
에르베 산맥 병사들의 자발적인 지원 덕분에 테이사벨 이동 관문의 안전성은 거의 완벽하게 증명되다시피 했다.
한 번에 무려 10명이 넘는 인원을 안전하게 수송할 수 있는 이동 관문.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안전성은 검증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로텔 마법 연방과 마탑의 권위와 이론을 믿는 사람이 많았다.
“빌로티안 제국이 수를 쓰고 있는 거지. 이사벨 황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치사한 짓인지 모르겠네.”
수백 년간 검술 제국과 마법 연방은 각자의 영역을 잘 지켜왔다. 그런데 이번에 빌로티안이 수백 년의 암묵적인 규칙을 깨고서, 마법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었다.
“이거 왠지 수상하지 않아?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고.”
“뭔 소리야?”
“검술 제국이 마법까지 가져봐. 세계를 독점하는 거라고. 너무 위험하잖아.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려는 첫 출발일 수도 있잖아.”
마법 연방 측은 검술 제국이 ‘시커먼 야욕을 숨기고 있다’라는 프레임을 씌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이 그에 쉽게 선동되었다.
그 시꺼먼 속내를 위해 안전하지 않은 것을 안전한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벨과 점심 식사를 마친 나르모르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황녀님. 진짜 븅딱들 같지 않아요?”
이사벨 옆에 서 있던 루루카의 몸이 움찔했다.
세상에, 저런 비속어를 황녀님 앞에서 사용하다니. 그렇지만 이사벨이 까르르- 웃고 있는 바람에 일단은 나서지 않았다.
솔직히 루루카도 화가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황녀님이 얼마나 숭고하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빌로티안의 시꺼먼 속내니, 황녀님을 내세운 선동이니 뭐니. 확실히 기분이 나쁠 만하지.’
“돈 냄새를 진짜 못 맡는다니까. 저였다면 곧바로 황녀님과 연락해서 제휴 파트너십을 맺을 거예요.”
지극히 세속적인 말에, 루루카는 조금 황당해졌다.
“어차피 파트너십은 안 맺었겠지만요.”
이사벨이 눈을 똘망똘망떴다. 평소보다 훨씬 눈빛이 맑았다.
루루카는 괜스레 슬퍼졌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당연하죠. 저한테 아주 좋은 생각이 있어요.”
“그게 뭔데?”
“이동 관문으로 꼭 사람을 보낼 필요는 없지 않아요?”
“…….”
이사벨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지극히 당연한 얘기였다. 굳이 사람으로 실험하고 증명할 필요는 없었다.
“조그마한 물건들을 먼저 보내면서 관리하면 될 것 같아요. 어차피 진실은 가릴 수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대중들도 테이사벨 이동 관문에 대해 잘 알게 되겠죠. 알게 되면, 더 이상 두렵지 않을 거예요.”
“왜 그렇게 간단한 걸 생각 못 했지?”
“그야 이동 관문은 수백 년간 사람만 이동시켜 왔으니까요.”
이래서 고정관념이 무서운 거다. 이사벨조차도 당연히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제가 있던 빈민가 기억나죠?”
“응.”
“거기 있던 구두 닦는 여자애 생각나요?”
“응. 오라버니가 가르쳐 줬어.”
이름이 알리라고 했다. 미하엘은 알리를 불쌍히 여기지 말라고 했었다.
“걔가 그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를 알아요?”
“그게 뭔데?”
“사실 걔한테는 언니가 한 명 있거든요. 그 언니랑 가끔 편지를 나누는데, 그게 알리가 버틸 수 있는 이유예요.”
빈민가의 사람들에게는 편지 한 번을 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서는 꽤 많은 돈을 써야 하기에 당장 끼니가 급한 빈민가의 사람들은 편지를 주고받을 여유가 없었다.
“테이사벨 이동 관문을 이용하면 서신 주고받는 것이 훨씬 쉬워지고 간편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
“그리고 그것은 곧 제국 유통망의 초석이 될 거예요. 유통망을 지배하는 자가 곧 세계를 지배할 거예요. 흐흐흐흐.”
돈 냄새가 난다, 돈 냄새가 나.
돈비가 내린다 내려.
나르모르가 음침하게 웃었다.
그사이, 이사벨은 또다시 이곳의 현실을 체감했다.
한국에서는 그저 몇백 원만 있으면 우편을 보낼 수 있었다.
솔직히 우편을 보낼 필요도 없었다. 스마트폰을 몇 번 누르기만 하면 메일이 전송되었고, 영상통화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나르모르가 물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그냥, 문명의 혜택이 너무 공평하지 않은 것 같아서.”
“당연히 공평할 수 없죠.”
“그렇지만 조금은 더 공평하면 좋겠어.”
“흐음…….”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이상해?”
“황족답지 않은 발언이라고 생각해요. 조금 이상하긴 하죠.”
어쩌면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이상론적이고 교과서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사벨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사벨다운 말이네요. 저는 황녀님의 시야가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아름답다고는 생각해요.”
나르모르는 저도 모르게 이사벨의 손목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이사벨이 저렇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이유를 안다.
세상에 선물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고 했다. 세상이, 떠난 이후의 자신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황녀님의 아름다운 시야는 어쩌면, 나르비달의 낙인 때문일지도 몰라.’
문득, 그는 가슴이 아프다고 생각했다.
‘저도 도울게요.’
훗날, ‘나르 코인’의 창시자이자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호가 될 나르모르는 그 나름대로 준비를 시작했다.
“일단 먼저 해야 할 게 있어요.”
그는 이사벨이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을 짚어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