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72)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72화
로베나와 비아톤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섰다.
자원봉사자들은 그 둘을 둥글게 둘러쌌다.
“지금 저게 무슨 상황이야?”
“잘 몰라.”
잘은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기세가 느껴졌다.
비아톤과 로베나 정도의 검술가들은 매우 희귀하고, 일반 백성들은 그들과 같은 무인을 만나볼 기회가 굉장히 적었다.
“이게 검술가들의 기세?”
다들 침을 꼴깍 삼켰다.
누가 밀어낸 것도 아닌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말로만 들었지, 이런 게 진짜 있는 줄 몰랐네.”
“그, 그러게나 말이야.”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무시무시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감히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해일이 눈앞에 밀려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싸우는 건가?”
“설마 진짜로 싸우겠어?”
로베나가 씨익 웃었다.
“오랜만이구나, 제자야.”
마법으로 얼굴을 바꿔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로베나는 비아톤의 얼굴을 정확하게 읽어냈다.
‘비아톤’의 이름이 등장하자 사람들이 쑥덕대기 시작했다.
“비, 비아톤이라고?”
“제국 수석 보좌관 비아톤 경?”
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는 위대한 검술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의 오싹함과 두려움은 이내 경탄이 되었다.
“근데 비아톤 경에게 반말하는 저 여인은 누구야?”
“자, 잠깐만.”
누군가가 로베나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푸른 빙하가 녹아내린 것만 같은 머리카락. 호수를 닮은 푸른 눈.
비아톤에게 반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위에 있는 자. 그리고 으슬으슬 몸이 떨릴 만큼 강렬한 한기(寒氣)를 가진 여인.
“서, 설마!”
비아톤이 인상을 찡그렸다.
“벌꿀오소리를 내려놓는 것이 좋을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스승님.”
북부 대공 로베나는 대륙 북부, 에르베 산맥 위를 떠다니는 하늘섬을 다스리는 대공이었다.
하늘섬은 제국령이기는 했으나 중립국에 가까웠다.
500년 전, 초대 황제와 맹약을 맺어 초대 대공이 탄생했고, 그 역사가 500년간 이어졌다.
다만 북부 대공 로베나가 10년 전 모습을 감추면서 교류는 끊어지다시피 했었다.
“싫다면?”
로베나가 팔목을 걷어 올렸다.
팔목에는 벌꿀오소리의 이빨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날 물었는데.”
순간,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벽면 여기저기에 서리가 낄 정도로 찬바람이었다.
그 찬바람에 로베나 대공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비아톤. 10년간 실력이 꽤 늘었나 보지? 10년 전, 내게 까불면 죽일 거라던 경고를 잊은 모양인데.”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그 벌꿀오소리를 내려놓으십시오.”
로베나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재미있네.’
그녀가 보는 비아톤은 굉장히 정치적이고 계산적인 아이(?)였다.
겉으로는 생각 없어 보이고 능글맞아 보이지만, 사실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계산해서 움직이는 아이.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비아톤이 저토록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일 줄이야.’
그녀가 기억하는 비아톤이라면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비아톤이라면 원래 이렇게 반응했어야 했다.
‘500루덴 줄 테니 넘기시죠. 후후. 예? 싫다고요? 그럼 600루덴 드립니다.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배 째세요.’
이런 식으로 말 같지도 않은 흥정을 걸어왔어야 했는데, 지금의 비아톤은 달랐다.
10년 전 비아톤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적이 있었다.
그때도 비아톤은 실실 웃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보다, 아룬이 어떻게 되는 게 더 두렵단 말이야?’
로베나는 자신의 손에 들린 조카를 바라보았다.
이놈의 용감한 조카는 이모도 못 알아보고 용맹하게 달려들어서, 어쩔 수 없이 기절시켰다.
“하긴. 말 못 하는 동물에게 무슨 죄가 있겠어?”
“…….”
로베나는 약간 의아하기는 했다.
이 타이밍에 또 치고 들어와야 하는데.
‘그래요, 죄 없죠. 역시 스승님은 경우를 아는 사람이라니까, 후후.’
그녀가 아는 비아톤과 지금의 비아톤은 많이 달랐다.
“이 미물에게 주인이 있겠지?”
이제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내 계산이 정확하다면 앞으로 약 5초 후.
그녀는 속으로 시간을 셌다.
‘5, 4, 3, 2, 1.’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벌꿀아!”
로베나가 또 씨익 웃었다.
‘왔구나, 이사벨.’
* * *
처음 내 눈에 보인 사람은 검을 들고 있는 비아톤 경이었다.
그다음 보인 사람은 어떤 여자였고, 그 여자의 손에 기절한 벌꿀이가 들려 있었다.
그 여자에게서는 대단한 기세가 느껴졌다.
그 대단한 비아톤 경이 오히려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침착하자, 침착하자, 침착하자.’
이런 경우는 아주 위험했다.
내 육체가 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서 일단 폭주하면 걷잡을 수 없다.
나는 지금도 저 여자 사람에게 달려들어 엉엉 울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었다.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제발, 이사벨.’
다행히 충동을 억누르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 연습해 왔다. 전생에서도 그랬고, 현생에서도 그랬다.
나는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상황을 최대한 이성적으로 보려고 노력했다.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그리고 아까 뛰어오는데 ‘스승님’이란 말을 들었다.
비아톤 경이 스승님이라 부르는 사람은 이 작품 속에서 딱 한 명뿐이었다.
‘로베나 대공이 틀림없어.’
로베나는 작품 내에서 비중이 별로 없는 조연이었다.
작품 후반부 모습을 드러내 남주 아룬과 새로운 맹약을 맺고 홀연히 떠나는 역할의 조연.
나는 로베나 대공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빨리 떠올렸다.
‘철두철미하고 냉혹한 성격. 정을 준 사람은 비아톤 경이 유일. 작품 내에서는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어.’
비아톤 경이 나를 뒤로 숨겨주었다.
“뒤로 물러서세요. 위험할 수 있어요.”
비아톤 경의 손길은 여전히 다정했지만, 평소보다는 조금 거친 느낌이 있었다.
그만큼 비아톤 경도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로베나 대공이 말했다.
“네가 이 건방진 것의 주인이니?”
비아톤 경이 빠르게 말했다.
“대답하지 마세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벌꿀이가 대공의 팔목을 문 것 같았고, 그 책임을 주인에게 물려는 것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원수는 10배로 갚고, 은혜는 100배로 갚는 것이 로베나 대공의 철칙이었으니까.
“아니에요, 비아톤 경.”
나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그런 게 아니라 발이 정말로 잘 안 떨어졌다.
‘발이 왜 이렇게 무겁지?’
누가 아주아주 무거운 추를 내 발목에 달아놓은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저는 빌로티안의 황녀이고, 저 아이는 제가 직접 이름을 내린 아이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듣지 못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벌꿀이를 안전하게 데려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비아톤 경 뒤에 숨지 않을 거예요. 그 아이의 이름은 김벌꿀이고요, 제가 그 아이에게 이름을 주었어요. 잘못이 있다면 제가 사과할게요.”
로베나 대공이 입가를 말아 올리고 웃었다.
눈빛이 지나치게 살벌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슬쩍 피했다.
‘아니, 아니야.’
무섭다고 피해서 될 일이 아니다.
나는 용기를 내서 다시 로베나 대공의 눈을 바라보았다.
‘으, 안 되겠어.’
역시 볼 수 없었다.
아예 일반인이면 모를까, 나는 마나를 다룰 수 있는 마법사였고, 그래서 로베나 대공의 저 강대한 기운이 오히려 더 잘 느껴졌다.
“말로만 사과해서 모든 것이 해결된다면 이 세상은 좀 더 아름다웠겠지, 황녀.”
“죄송해요.”
나는 또 용기를 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갔다.
비아톤 경이 나를 보호하려는 듯 손을 뻗었지만, 나는 그 손을 조심스레 치워냈다.
“죄송하다면? 내가 이 미물을 해하지 않는 조건으로, 황녀는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지?”
“제대로 용서를 구한다면, 벌꿀이를 해하지 않으실 건가요?”
“그거야 그대가 하기 나름이겠지.”
나는 잠시 생각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 세계에서, 정당한 명분 없이 사람을 문 동물은 죽인다. 그러니까 대공이 벌꿀이를 죽인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나는 벌꿀이의 생명 값을 치러야 했다.
“생명 값은 생명으로 치르는 것이 맞다고 배웠어요.”
‘황녀님!’ 하고 비아톤 경이 외쳤지만, 나는 말을 이었다.
“제 마지막 1년을, 대공에게 드릴게요.”
“황녀의 1년을? 어떻게?”
내가 손목을 걷어 나르비달의 낙인을 보여주었다.
“신전에 가면,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진 사람의 수명을 신성력으로 빼낼 수 있다고 들었어요.”
일반 사람에게는 불가능한 시술이다. 오로지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진 사람에게만 적용이 가능했다.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진 자는 수명이 정확히 정해져 있었고, 그 수명은 ‘모래’로 명시되어 있으니까.
“아직 떨어지지 않은 모래를 빼낼 수 있어요. 그러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 만들어진대요.”
그것이 ‘나르비달의 낙인’이 저주라고 불리는 진정한 이유였다.
나는 황녀로 태어났으니 그럴 일은 잘 없지만, 보통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지고 태어나면 곧바로 인신매매의 대상이 된다.
부유한 권력가 계층의 ‘기적’을 위한 희생양으로 소모되고 버려진다.
그게 나르비달의 낙인을 가지고 태어난 자들의 운명이었다.
그런데 로베나 대공은 만만치 않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고작 황녀의 1년으로, 목숨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혹시 뭐 그대의 1년이, 다른 사람들의 1년보다 가치 있다는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나는 시한부를 살고 있고,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21년이다.
평균적으로 남들보다 훨씬 짧은 삶을 사는 것이 맞기는 했다.
그렇다고 내 1년이 다른 사람들의 1년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하기는 또 애매했다.
모두에게 시간은 소중한 거니까.
“5년.”
로베나 대공이 검지로 머리카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5년을 내게 준다면 이 미물을 살려줄게. 어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