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73)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73화
이사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요. 좋아요.”
적어도 겉모양새만 보면 이사벨은 하나도 겁먹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로베나 대공의 눈에는 정확하게 보였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잖아?’
필사적으로 티를 안 내려 노력하고 있지만 티가 나고 있었다.
그게 귀여워서 웃음이 날 뻔했지만 참았다.
“5년이다.”
“알겠어요, 5년.”
“그럼 신전으로 가지. 여기서 가장 가까운 신전이 어디지?”
“그렇지만 지금은 안 돼요.”
“뭐?”
로베나가 씨익 웃었다. 그와 동시에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왔다.
“수작은 부리지 않는 것이 이로울 텐데, 황녀.”
“수작 부리는 게 아니에요.”
이사벨은 너무너무 무서웠지만 그래도 치맛단을 꽉 쥐고 나오지 않으려는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지금은…….”
“뭐라고?”
“지금은 봉사 중이라서 안 돼요. 이곳에는 제가 필요해요.”
“무슨 뜻이지?”
이사벨은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헥토르 아저씨랑 약속했어요. 매일매일 도르래에 마법을 걸어주기로 했고요, 주방에 시베룬 마석의 바람이 끊기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어요.”
이사벨이 없으면 작업이 곱절로 힘들어진다.
매일같이 주방에서 씨름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더위에 시달려야 한다.
“그러니까 저에게 시간을 조금만 양보해 주세요. 약속은 꼭 지킬게요.”
“흐음, 내가 그대의 무엇을 믿고 약속을 지켜야 하지?”
보다 못한 비아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스승님!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너무했으면 이 벌꿀오소리를 죽였겠지?”
“…….”
그 말에 비아톤이 입을 다물었다.
로베나는 은근히 즐거웠다.
“그 촐싹 맞은 입을 다물게 하는 방법이 존재하기는 했었구나.”
평소 비아톤은 한마디를 안 졌다.
검술이나 마법 등, 무력으로 굴복시켜봐야 저 주둥이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늘은 비아톤의 반응이 이전과 많이 달랐다.
“얄미운 제자님의 약점이 이사벨 황녀라는 사실이 꽤 흥미롭네.”
“스승님께서는…….”
이사벨이 팔을 내밀어 비아톤의 앞을 가로막아 비아톤의 말을 끊었다.
“선생님. 제가 책임질 일이에요. 저 아이의 생명 값을 치르려면, 저 또한 생명을 거는 것이 당연해요. 지금 제 위치는 부탁해야 할 위치이지, 언성을 높일 위치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제가 말하게 해주세요.”
“……황녀님.”
비아톤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난 10년간, 그는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루어냈으나, 로베나 대공 앞에 서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스승 앞에서 여전히 약자였다.
‘나는 아직도 너무나 약하구나.’
한때, 강해졌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론과 로베나 등을 비롯한 절대자들을 제외하면 적수가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비아톤은 강함에 대한 갈증이 거의 없어지다시피 했었다.
‘강해져야 해.’
내가 더 강했더라면. 그러면 로베나와 결투를 벌여 저 요구를 묵살할 수 있을 텐데.
김벌꿀의 목숨값을 다른 방식으로 치를 수 있을 텐데.
그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동안, 너무 안일했었다.’
비아톤의 마음속에, 작지만 커다란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로베나가 다시 물었다.
“무엇으로 그대의 약속을 증명할 수 있냐고 물었는데.”
“이걸 드릴게요.”
이사벨은 품속에 손을 넣었다.
품속에는 작은 아공간 주머니가 있었고, 그 안에서 얼기설기 엮은 화관을 꺼냈다.
“그게 뭐지?”
“벌꿀이랑 같이 만든 화관이에요. 저한테는 무척 소중한 거예요.”
“그걸 약속의 증표로 주겠다고?”
로베나는 쿡쿡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아냈다.
‘다리는 여전히 떨리는군.’
그녀의 눈이 이사벨의 모든 것을 관찰했다.
용안(龍眼)은 모든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진실에 가까운 것들을 느끼는 권능을 지녔다.
‘정말로 소중하게 생각하잖아?’
저까짓 화관이 뭐라고.
저걸 저렇게까지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아.’
이제 슬슬 김벌꿀의 모습을 한 아룬이 깨어날 때가 되었다.
이 상황을 얼추 마무리해야 했다.
“좋아, 그대에게 무척 소중한 것이니 약속의 증표로 가져가겠다. 시간은 얼마나 주면 되지?”
이사벨이 고개를 돌려서 누군가를 찾았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한 사람, 작업반장 헥토르를 발견했다.
“작업반장님, 제가 며칠 동안 일을 더 해야 할까요?”
“그, 그, 그것이…….”
헥토르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동안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이 황녀라는 사실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제 신분을 속여서 미안해요. 알려지기를 바라지 않았어요.”
“아, 아닙니다! 저, 절대 아닙니다. 저, 저는……!”
이사벨은 헥토르의 당황스러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헥토르를 다그칠 필요가 있었다.
괜히 시간을 끌면 저 변덕스러운 괴짜 로베나 대공이 김벌꿀을 해칠 수도 있으니까.
“내가 며칠을 더 일해야 하냐고 물었어요.”
“보, 본래는 한 달가량 걸릴 일이었으나 화, 황녀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5, 5일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고마워요.”
이사벨이 로베나 쪽을 바라보았다.
“5일. 5일만 미뤄주세요.”
“좋아, 그러지.”
로베나는 손에 들려 있던 김벌꿀을 휙! 내던졌다.
이사벨이 바닥으로 몸을 던져 김벌꿀을 받아냈다.
그녀의 옷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무릎과 팔꿈치가 까졌지만 그런 것쯤은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행이야. 진짜 다행이야.’
김벌꿀은 그냥 잠든 것 같았다. 평온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이사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김벌꿀이 무사한 것이, 지금은 너무 기뻤다.
이사벨의 눈물이 김벌꿀의 몸으로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며 비아톤은 피가 나도록 주먹을 꽉 쥐었고, 로베나 대공은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로베나는 성문 밖으로 빠져나와 한참을 걸었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일반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서, 그 뒤를 쫓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따라온 누군가가 있었다.
“이제 그만 모습을 드러내는 게 어떻습니까?”
길도 제대로 나 있지 않은 황무지.
최근 건기가 길어져서 대부분의 식물이 바싹 말라비틀어져 있는 이 사막 같은 곳에서 로베나는 누군가를 맞이했다.
그는 몸 전체를 덮는 두꺼운 로브로 몸과 얼굴 전체를 가리고 있었다.
“공사가 다망하신 황제 폐하께서 이런 변방에는 어쩐 일로.”
빌로티안 제국의 황제, 론이었다.
그가 로브의 모자를 벗었다.
“그 아이의 5년을 가져가려면, 너는 네 목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래요?”
로베나는 론과 마주 섰다.
검을 뻗으면 맞닿을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로베나는 검지로 자신의 푸른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그렇다면 왜 아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죠?”
“…….”
스릉-
맑은 검명이 들려왔다.
“기어이 검을 뽑으시네.”
로베나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사라졌다.
로베나가 유일하게 긴장시키는 존재가 검을 뽑았기에, 그녀 또한 마냥 장난만 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폐하도 지금 하는 짓이 부끄러운 짓이라는 건 알고 있죠? 그러니까 아까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여기서 나타나신 거고요.”
“…….”
“이 화관은 약속의 증표라고요. 직접 보셨으니 거짓이 아니라는 건 너무나 잘 알고 계실 테고.”
생명 값은 생명으로 치른다.
사람을 공격한 벌꿀오소리의 생명을 살려주었으니, 그에 걸맞은 값을 치러야 한다.
벌꿀오소리의 주인인 황녀 이사벨이 그걸 공증까지 했다.
“이제 와서 폐하가 이렇게 행동하시면, 황녀의 품위가 뭐가 되겠어요? 황실의 품격은? 여지껏 지켜왔던 명예와 전통은?”
로베나의 말은 모두 맞는 말이었다.
또한 황녀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을 진 일이니, 사실 이건 그저 황녀를 칭찬하고 말 일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랬다.
“제국의 번영과 황족의 명예만을 생각했던, 내가 알던 폐하가 아닌데. 그리고 폐하의 이 행동은 하늘섬의 대공인 나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것도 알고 계시지요?”
“…….”
로베나는 용안을 통해 론의 기세를 읽어냈다.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살벌한 기운이 느껴졌다.
용안이 따끔거려서 눈이 시릴 정도였다.
“빌로티안 제국에 있어서, 에르베의 하늘섬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자산인지 모르지는 않으실 테고.”
“…….”
“그 아이의 5년이 폐하한테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었나요?”
로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로베나는 일부러 자신의 가치와 위치를 알려주었다.
잠시 잠깐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황제의 이성을 되찾아 주기 위하여.
‘조금 더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나면, 아마 저 검을 거두겠지. 당연히 아니라고 대답할 거야.’
그래야 황제다운 선택이니까.
로베나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그 확신은 보기 좋게 틀려 버렸다.
“그렇다.”
“……네?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줄래요?”
론은 이런 말을 하기가 몹시 꺼려졌다.
남 앞에서 진심을 꺼내놓은 적이 거의 없기에 그랬고, 그것이 이사벨과 관련한 마음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 아이의 5년이.”
“네, 그 아이의 5년이.”
“…….”
“확실히 말을 좀 해줘요.”
“그 아이의 5년이 네가 말한 그 모든 것보다 귀하다.”
로베나는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응? 뭐지?’
용안에 새로운 무언가가 잡혔다.
론에게서 특별한 것을 읽어냈다.
수십 년간 론과 인연을 맺어온 로베나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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