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7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76화
계단 꼭대기.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비아톤 경이었다.
“황녀님이라면 이럴 줄 알았거든요.”
비아톤 경은 미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청량한 미소로 웃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데, 어딘가 묘하게 슬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어요.”
“……비아톤 경은 남쪽으로 가신다고 하셨잖아요?”
“저를 남쪽으로 보내놓고 북쪽으로 오고 싶어 하셨잖아요. 맞죠?”
정곡을 찔린 바람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이게 제가 황녀님을 사랑하는 이유이자, 걱정하는 이유이기도 해요”
쿵!
커다란 충격음과 함께 성 전체가 흔들렸다.
그 바람에 내 중심이 흔들렸고 뒤로 나자빠질 뻔했다.
비아톤 경이 빠르게 다가와 내 허리를 꽉 안아 잡아주었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아요. 이렇게까지 진동이 심할 줄 몰랐어요.”
도대체 이 바깥에는 어떤 괴물이 있단 말인가. 1급 마물은 도대체 얼마나 무시무시한 생명체란 말인가.
이 강력한 진동 앞에 나는 새삼스레 무서워졌다.
“황녀님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데요?”
“무, 무서워요.”
“그냥 왕궁에 계셨으면 훨씬 안전했을 텐데요.”
“그건 옳지 못하잖아요.”
비아톤 경은 빙그레 웃었다.
다정한 손길로 나를 완전히 일으켜 세운 뒤,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일곱 살은 좀 옳지 않아도 돼요.”
“…….”
“그래도 옳지 않은 것보다는 옳은 것이 좋겠지요.”
비아톤 경은 애정과 걱정이 듬뿍 담긴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바깥에서는 괴성이 들려오고 성이 흔들흔들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두려움을 잊을 수 있었다.
비아톤 경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니 황녀님을 사랑할 수밖에요.”
아, 뭐야. 이거 상황상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는데…….
나 좀 설렜어.
나, 다정한 사람 좋아하네.
그때, 성벽 위로 무언가가 불쑥 튀어 올랐다.
“꺅!”
나는 온몸이 굳고 말았다.
엄청나게 커다란 붉은 눈동자와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그 눈은 마치 태양처럼 크고 붉었다.
1급 마물의 눈동자는,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공포스러웠다.
“읏차.”
비아톤 경이 나를 끌어안고 도약했다.
마치 하늘을 나는 것 같았다.
쿠구궁!
내가 있던 자리가 박살 났다.
“가끔 열 받으면 저렇게 뛰어올라서 방망이를 휘둘러요.”
“여, 여긴 성벽 위잖아요. 엄청 높은 곳이잖아요.”
“쟤는 거인이잖아요. 키가 무지무지 커요.”
비아톤 경은 나를 조심스레 내려준 뒤 작게 말했다.
“이대로 두면 성벽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거예요. 저는 내려가서 마법과 검으로 외눈박이 거인과 싸울 거예요.”
“저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 거죠?”
“눈치채셨어요?”
“네. 이곳은 수백 년 전, 외눈박이 거인의 서식지라고 했어요.”
그리고 이곳은 다른 곳보다 평균기온이 훨씬 높은 곳이다.
자원봉사자들이 더위 때문에 힘들어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더운 곳이니까.
“외눈박이 거인들은 따뜻한 곳을 무척 좋아하는 온혈 마물이고, 반대로 차가운 성질에는 무척 약하다고 알고 있어요. 마침 저는 차가운 성질의 마법을 많이 익히고 사용해 봤으니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외눈박이 거인에 대해서는 언제 공부하셨어요?”
“피가 차가워지면 움직임이 많이 느려진다고 알고 있어요. 원래는 그러려고 저 혼자 온 거구요.”
비아톤 경은 약간은 놀랍고, 또 약간은 기특해 죽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간만 충분히 있었으면 꼬옥 안아드렸을 건데요.”
“무사히 돌아와서 꼭 안아주세요.”
비아톤 경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 명령, 꼭 받들도록 하지요.”
* * *
비아톤이 하늘 높이 뛰었다.
“여기야, 친구야.”
비아톤의 움직임은 하늘에서도 자유로웠다.
그는 마검사이며,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공중에서 몸을 움직였다.
마치 공중에 땅이 있는 것처럼.
이사벨은 깜짝 놀랐다.
‘어, 엄청 빠르다.’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빨랐다.
이사벨의 눈으로는 비아톤의 동작을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과연 검술 제국의 수석 보좌관다운 몸놀림이었다.
그의 몸이 빛살처럼 빠르게 움직여 외눈박이 거인 여기저기에 생채기를 내었다.
‘나도 집중하자.’
이사벨이 해야 할 일은, 그녀가 가진 모든 마력을 끌어내어 차가운 성질의 마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상급의 마법사라면 눈 폭풍을 일으키는 등 거대 마법을 사용할 수 있겠지만, 그건 무리였다.
‘나 혼자서라도 여기 오려고 했어.’
그런데 지금은 비아톤과 함께였다.
여전히 무섭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덜 무서웠다.
‘아주 커다란 냉장고를 생각하는 거야.’
아니. 냉장고로는 부족했다.
‘냉동고?’
냉동고를 떠올려 보았지만, 아무리 큰 냉동고를 상상해도 저 성벽만큼 거대한 외눈박이 거인을 담을 냉동고를 떠올리지 못했다.
아무리 이미지를 구현하려고 해봐도, 이미지 속 냉동고보다 1급 마물의 온혈이 더 뜨거웠다.
상상 속 냉동고가 산산조각이 났다.
‘냉동고로는 어림도 없어.’
그렇다면 조금 다른 것을 생각해 봐야 했다.
저 무시무시한 1급 마물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들 수 있을 정도의 차가운 성질을 가진 것.
‘북극!’
북극을 실제로 가본 적은 없지만 다큐멘터리로 많이 봤다.
얼음만이 가득한 세상. 수평선 너머까지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곳.
그런데 TV로만 봤던 북극을 구체화하는 것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어?’
아주 오래전, 잊고 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맞아.’
전생의 어린 시절.
그녀에게는 작은 소망이 있었다.
북극처럼 아주 커다란 빙수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을 커다란 팥빙수.
북극처럼 펼쳐진, 상상 속 빙수 세계에는 커다란 북극곰 친구도 함께였다.
북극곰 친구와 함께 북극 빙수에 파묻히는 상상.
병실에만 누워 있던 그녀에게 있어서 그건 아주 행복한 꿈이었다.
그때에는 그 상상에 꽂혀서 3일 내내 팥빙수, 팥빙수, 맛 좋은 북극 팥빙수를 입에 달고 다녔을 정도였다.
‘그때 빙수 먹고 싶다고 하도 졸라대는 통에 의사 선생님들이 꽤 고생을 했었지.’
마법은 이미지의 현실화다.
이미지가 견고하고 단단할수록, 마법의 성공률이 높아진다.
‘북극 빙수를 떠올리는 거야!’
그것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마력을 끌어올리며 이미지를 상상했다.
그 이미지를 현실로 끌어오려면, 각종 마법 지식과 직관이 필요하다.
그리고 북극 빙수는 어릴 때 아주 구체적이고 단단하게 상상했던 것이었다.
어릴 때 각인된 것은 잘 잊혀지지 않는 법이었다.
‘먹어도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빙수의 세계!’
한기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 *
비아톤은 과연 제국의 수석 보좌관다운 실력으로 외눈박이 거인과 전투를 이어갔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내가 아는 외눈박이 거인보다 훨씬 강한데?’
쿵!
거대한 방망이가 비아톤이 있던 땅을 내려치자 흙먼지가 자욱이 일었다.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 외눈박이 거인은 다른 개체들과는 많이 달랐다.
왼쪽 어깨에 이상한 문양이 박혀 있는 것도 특이했다.
‘저건 도대체 뭐야?’
해골 모양의 문양이었다.
‘어디서 본 것 같기는 한데…… 이크!’
외눈박이 거인은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맹해졌다.
그에 반해 비아톤은 슬슬 지쳐갔다.
‘폐하는 언제 오시는 거야?’
그런데 그때,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더위를 모조리 날려 버릴 만큼 커다란 바람.
그 바람에는 강력한 한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쩌적-
땅이 얼기 시작했다.
마치 재난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문득 시선을 돌려 보니, 깜짝 놀랄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성벽이 얼었어?’
성벽 전체가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같았다.
이야기책에서나 등장할 법한 ‘얼음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푸르스름한 냉기가 이쪽을 향해 빠르게 뻗어왔다.
‘나도 위험하겠는데.’
비아톤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서 냉기의 해일을 피해냈다. 그러나 외눈박이 거인은 그러지 못했다.
거인의 발끝이 얼기 시작했다.
쩌적- 쩌적-
발가락 끝이 얼고, 발목이 얼고, 무릎이 얼고, 허리가 얼었다.
비아톤은 공중에 뜬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얼음 조각처럼 변해 버렸네……?’
얼음으로 조각한 것처럼 변해서 완전히 얼어버렸다.
‘이크. 이건 또 뭐야?’
갈색인지 검은색인지. 그 중간 크기의 우박 같은 것들이 떨어져 내렸다.
약간 달콤한 냄새가 나기는 했는데, 위력은 무시할 수 없어서 모두 피해내야 했다.
‘팥……?’
팥이라고 하기에는 알갱이가 굵고 단단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팥과 비슷하게 생겼다.
‘휴우. 이제 좀 멎었네.’
비아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는 뭐, 에르베 산맥이야?’
설원, 아니, 빙원이 펼쳐져 있었다.
갈색 팥처럼 생긴 우박이 곳곳에 꽂혀 있었고, 노란색의 쫀득쫀득한 형체의 무언가가 여기저기 생성되어 있었다.
신기한 건 달콤한 냄새가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연유 같은 냄새였다.
비아톤은 마법을 다루는 마검사이기에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
‘이 정도 대규모 광역 마법은…… 혼자서는 못 해.’
비아톤은 이사벨 쪽을 바라보았다.
이사벨은 눈을 꾹 감고 마법 영창을 외우고 있었다.
마법 영창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팥빙수, 팥빙수, 맛있는 팥빙수, 토핑은 인절미, 연유는 국룰이야. 북극곰 친구랑 같이 먹는 북극 팥빙수.”
비아톤은 허공에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천천히 걸어 내려오다가 이내 황급히 뛰었다.
“황녀님!”
이사벨이 쓰러졌기 때문이다.
비아톤이 다급히 뛰어가 이사벨을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먼저 맥박을 확인하고 이사벨의 안위를 살펴보았다.
이사벨의 얼굴에는 혈색이 하나도 없었다.
“황녀님?”
1급 마물을 상대할 때도 비교적 여유롭던 비아톤의 표정에서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