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95)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95화
이사벨이 찾아오기 전날 밤.
카린은 새벽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작은 항아리에서 머리에 뿔이 난 악마가 새어 나와 ‘넌 살인자야, 결코 황녀에게 돌아갈 수 없어’라고 속삭였다.
세상은 온통 어두웠는데 그녀 자신의 몸이 보였다.
손가락을 보니 붉은 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붉은 비가 쏟아져 내렸다.
‘씻고 싶어.’
하지만 아무리 씻어도 온몸에 묻은 피는 지워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작은 사람이 한 명 나타났다.
이사벨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경멸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꿈속의 카린은 ‘제발, 저를 미워하지 말아주세요’라고 빌고 있었고 이사벨은 등을 돌려 멀어졌다.
그런데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카린 선생님. 일어나 보세요. 아침이에요.”
꿈인가. 악몽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나…….
카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지난 밤사이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눈곱이 가득 껴 있었다.
‘밝아.’
이상하게도 오늘의 아침은 너무 밝았다.
이내 카린은 벌떡 일어섰다.
“황녀님?”
늘 무표정을 유지하던 카린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평소와 많이 다른 모양새였다.
그 모습이 이사벨에게는 수상하게 다가왔다.
‘왜 저렇게 놀라지? 이 정도로 놀랄 사람이 아닌데.’
이사벨은 아직 카린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내가 다가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을 텐데…….’
역시 수상해. 뭔가 엄청난 것을 꾸미고 있었을지도 몰라.
이사벨은 가까이 다가가 활짝 웃었다.
“선생님은 잠꾸러기네요.”
나는 무해해요- 라고 주장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는 조금 아껴주는 것 같으니까.’
카린이 자신을 좋아해 준다는 사실 자체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다만 그 호감의 동기가 ‘나르비달의 낙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지만 말이다.
나르비달의 낙인을 연구하기 위한 귀중한 연구재료로써 자신을 아낀다고 생각 중이었다.
‘무해한 어린아이가 다가가면 그래도 마음의 경계를 조금은 풀겠지.’
카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너무나 반가워서, 너무나 밝아서, 너무나 좋아서, 이사벨을 와락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는 불결하고 더러워. 황녀님을 안을 수 없어.’
“선생님. 한 달 전에 복귀했다면서요.”
“그랬습니다.”
“그런데 왜 황궁으로 안 돌아와요?”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기다리고 있었단 말이에요.”
“……저를 왜 기다리셨습니까? 저는 그저 무서운 마법 선생일 뿐인데요.”
“그래도 내 옆에 있어야지요!”
이사벨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카린은 무조건 황궁에 붙여놔야 해. 심지어 이미 각성한 상태잖아.’
저번에 분명 최종 흑막으로서 각성했었다. 소설 속 내용을 몸으로 체감했었다.
「그녀가 각성했을 때, 주변인들은 그녀의 각성을 자연스레 알아차렸다.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녀의 분위기가 달라졌고, 그녀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근데 지금은 또 분위기가 달라졌네?’
그건 사실 카린에게서 마력이 사라졌고, 카린의 내면이 많이 무너져 있어서 그런 것이지만 이사벨은 그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안 속아. 최종 흑막 카린이라면 자유자재로 자기의 분위기와 아우라를 바꿀 수 있으니까.’
카린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물었다.
“왜 제가 황녀님 옆에 있어야 합니까?”
저는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저 먼발치에서 황녀님을 돕겠습니다, 이번처럼 말입니다.
이사벨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아이답게 또박또박 말했다.
“왜 선생님은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해요?”
“……예?”
“선생님이 떠나면 싫다고 말했죠.”
“…….”
“진짜로 기억 안 나요?”
“…….”
“부끄럽지만 용기 내서 말한 건데 너무해요. 엄청 미운 일이에요.”
사실 카린은 그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사벨이 내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카린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제가 떠나면 싫습니까?”
“싫죠. 제 옆에 있으면 좋겠는걸요.”
“왜죠?”
“선생님이 옆에 있어야 안전한 기분이 든단 말이에요.”
이사벨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 허리에 손을 얹고 또 엄한 표정-그러나 무해하다고 주장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고 직무유기예요. 제가 다 알아봤어요. 선생님, 사표도 안 냈다면서요. 아직 제 선생님인데 왜 출근을 안 해요? 혼나야 돼요. 제가 혼낼 거예요. 완전 무서울걸요? 저 호락호락한 어린이 아니거든요.”
“……사표 냈습니다.”
이사벨이 고개를 돌려 뒤쪽의 비아톤을 바라보았다.
“비아톤 경, 사표 받았어요?”
“못 받았습니다.”
“제가 분명…….”
카린은 말을 하려다가 참았다.
외성 수비대장 키르엔 편으로 사표를 전달했는데, 키르엔이 누락한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내 정신 좀 봐라, 까먹고 있었네.”
키르엔이었다.
* * *
비아톤이 물었다.
“외성 수비대장이 여긴 어쩐 일이죠?”
“그냥 오다가다 들렀어요.”
“오다가다 들른 모양새가 아닌데?”
“순찰이죠.”
“요즘은 장바구니 들고 순찰하는 게 트렌드인가 봐요?”
“그럼요. 뭘 좀 아시네.”
키르엔의 손에는 커다란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는 이런저런 식재료가 가득했다.
키르엔이 장바구니에서 커다란 대파를 꺼냈다.
대파를 휙휙 휘두르며 무인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다.
“이거 하나면 충분하니까요.”
“근무시간, 근무지 이탈이니까 경위서 작성하세요. 제국 수석 보좌관으로서 명령합니다.”
“아, 진짜 선배……!”
“친한 척 금지. 지금 근무시간입니다.”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키르엔이지만 글씨를 빽빽하게 채워 넣어야 하는 보고서 작성은 질색이었다.
키르엔이 당당하게 말했다.
“봐줘라. 좋은 말로 할 때.”
비아톤이 더 당당하게 대답했다.
“좋은 말로 해도 안 봐줍니다. 그렇다고 나쁜 말로 해도 봐주지 않을 겁니다.”
“진짜 이럴 거야? 요?”
“진짜 이럴 거야요.”
“봐줘. 이거 줄게.”
손에 들고 있던 대파를 건넸다.
“뇌물입니까? 뇌물청탁에 대한 보고서도 쓰고 싶은가 보죠?”
“선배, 이렇게 꽉 막힌 사람이었어? 요? 나랑 사귈…… 아니, 옛날엔 안 그랬잖아.”
비아톤이 빙그레 웃으며 대파를 받아 들었다.
“경위서 안 쓰고 싶어요?”
“당연하죠.”
“안 쓰고 싶다면?”
“그렇다면 방법을 알려주죠.”
비아톤이 카린 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내가 후배님을 카린 경한테 보냈는데, 후배님은 나한테 아무것도 안 가르쳐 줘서 섭섭했답니다. 카린 경에 관해 보고 들은 것들을 가르쳐 줘요, 전부 다.”
“…….”
키르엔은 카린과 비아톤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카린이 말했다.
“사표 수리해 주세요.”
“나중에요. 일단 수비대장의 얘기부터 들어보고요.”
카린은 연거푸 말을 걸며 화제를 돌리려 했으나 노련한 비아톤은 넘어가지 않았다.
손가락을 튕겨 카린에게 마법을 걸었다.
음소거의 마법, 사일런스였다.
그것만으로도 대부분의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 정도 초급 마법이 먹혔어. 정말로 마력을 잃었군.’
이왕 이렇게 된 거, 구속마법도 하나 추가로 걸어주었다.
이제 카린은 움직이지도, 말할 수도 없게 되었다.
“자, 수비대장? 말할 기회를 3분 드립니다. 3분 안에 나를 납득시켜 봐요.”
“제일 납득시켜야 할 부분이 뭔데요?”
“어째서 카린 경이 우리 황녀님을 외롭게 만들었는지.”
키르엔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비아톤도 더 이상 보채지 않고 기다려주었다.
이사벨도 잠자코 키르엔의 말을 기다렸다.
‘알아내야 해. 카린의 속셈을.’
그런데 키르엔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의외였다.
이사벨을 변호하다가 마력 회로가 모두 파괴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충격이었다.
‘이게 무슨 말들이야?’
아무리 최종 흑막다운 속셈이 있다고 해도…… 저게 가능한 거야?
이사벨은 혼란스러웠다.
“……하여 미로텔 마법 연방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추방당했습니다.”
이 또한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미로텔 마법 연방을 누구보다 잘 이용해 먹어야 할 최종 흑막이, 스스로 미로텔 마법 연방의 비호를 걷어차고 배신자가 되었다니.
“……해서, 복면인들이 저희를 습격했습니다.”
“…….”
“……하여 모두 제압하는 데 성공했고. 그다음은…….”
키르엔은 카린의 눈치를 다시 한번 살폈다.
카린이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제발 더 이상 말하지 말아 달라고. 적어도 황녀님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이사벨 또한 그 눈빛을 읽어냈다.
‘저게…… 연기로 되는 거야?’
최종 흑막은 연기의 달인이다.
소설에도 그렇게 언급된다.
분명히 최종 흑막은 천 개의 가면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괴물처럼 묘사된다.
‘근데…….’
카린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박하고 애처로웠다.
저 애처로움 또한 연기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왜…….’
이사벨은 카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분명히 연기일 텐데.
최종 흑막일 텐데.
‘근데…….’
이사벨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나 왜 아파?’
키르엔이 말을 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