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Just Having Fun With The Time Limit RAW novel - Chapter (96)
시한부를 즐겼을 뿐이었는데 96화
“그다음은 황녀님을 살리고 싶다고 말했어요.”
“저를요?”
“그게 무슨 뜻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그렇게 말했어요.”
키르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녀는 오늘 비아톤이 이곳을 찾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일부러 이 시간에 카린을 찾은 것이었다.
‘황녀님을 몇 번 보지 못한 나보다 네가 더 황녀님을 모르면 어떡해?’
키르엔은 늘 카린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퇴근 후에 이것저것 신경을 많이 써주며 자매처럼 지내는 중이었다(물론 카린은 그런 키르엔을 부담스러워했으므로 키르엔 입장에서만 자매처럼 지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키르엔은 그런 사소한 것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황녀님이 고작 그런 걸로 널 미워할 것 같아?’
그래서 보여주어야 했다.
이사벨이 어째서 제국의 햇살로 불리는지. 알페아 왕국의 왕국민들이 왜 이사벨을 보면 함박웃음을 짓는지.
‘네 눈으로 직접 봐. 황녀님이 어떤 사람인지.’
키르엔이 결국 말했다.
“결국 습격자들은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카린 경은 그것이 안전을 위한 최선이라 판단했었고, 저 또한 그 뜻에 동의합니다.”
“그만……!”
카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사벨에게 모든 것을 말했으니, 이제 더 이상 이사벨에게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러운 피가 묻은 살인자는 이사벨과 함께할 수 없으니까. 눈보다 맑고 깨끗한 이사벨의 심성이 오염될 테니까.
카린이 뒷걸음질 쳤다.
어딘가로 도망치듯.
이곳에서 도망쳐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집착이, 비아톤의 초급 구속마법을 풀어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사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다쳤어요?”
그 말에 카린의 몸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네?”
“선생님, 안 다쳤냐고요.”
이사벨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사실 이사벨도 자신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했다.
‘나 왜 이렇게 슬픈데?’
카린은 최종 흑막이다.
저 모든 모습이 가짜일 수도 있고 연기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마음이 너무 아팠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저 모습이 너무 속상했다.
‘모르겠어.’
지금은 지금의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나는 어린이니까.’
어린이는 이것저것 재지 않는다. 울고 싶으면 울고 웃고 싶으면 웃는다.
그게 어린아이의 특권이다.
이사벨은 잠시 어린아이가 되기로 했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안 다친 거죠?”
혹시 크게 다쳐서 황궁으로 복귀하기 어려웠던 걸까, 그런 마음이 들자 카린이 걱정되었다.
키르엔이 대신 대답해 주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하나도 없어요. 다만 마음이 많이 다친 모양입니다.”
“암살자들 때문에요?”
“아뇨.”
키르엔이 고개를 저었다.
카린이 애절한 눈빛을 보냈다.
제발 그만 말해.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녀님 때문에요.”
“저 때문에 마음이 다쳤다고요?”
“카린은 스스로를 불결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티 없이 깨끗한 황녀님께 어울리지 않는 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이사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지만 이사벨은 머리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 불결해요.”
“…….”
이사벨이 카린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카린의 벽이 등에 닿았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데가 없던 카린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가오지 마세요.”
내 불결함이 옮아요. 그러니까 제발 멀리 가요.
“다가갈 거예요.”
“…….”
이사벨의 걸음은 생각보다 빨랐다.
마력을 잃은 카린은 무력했고, 이사벨에게서 도망치지 못했다.
이사벨이 카린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 다쳐서 다행이에요.”
“…….”
“걱정했어요.”
“…….”
이사벨은 문득, 카린이 무척 야위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린을 위로하고 싶어졌다.
“선생님은 하나도 안 불결해요.”
“…….”
“설령 불결하다고 해도 괜찮아요.”
저쪽에서 먼저 습격했다. 말하자면 카린은 정당방위였다.
“그게 불결한 거라면.”
이사벨이 카린의 품에 파묻었던 얼굴을 떼어내 카린을 올려다보았다.
이사벨의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맘껏 불결하도록 해요. 명령이에요.”
비아톤이 옆에서 한마디를 거들었다.
“카린 경이 황녀님의 명령을 거부하면 혼내실 작정이시군요!”
“맞아요!”
“어떻게 혼내실 겁니까?”
“엄청 무섭게요.”
“그게 어떤 거죠?”
최종 흑막을 어떻게 혼내야 하는가.
이사벨은 사실 잘 몰랐다.
“울어버릴 테다!”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버렸다.
이사벨이 후에에엥-! 진짜 울음을 터뜨리자, 카린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 * *
결국 카린은 황궁으로 복귀했다.
며칠의 시간 동안, 이사벨은 스스로의 마음을 정리하고 다독일 수 있었다.
‘경계는 해야 하는 게 맞아.’
이 모든 것이 카린의 술책이고 가면일 수도 있다. ‘최종 흑막 설정’이 어디 가는 건 아니니까.
이 세상에서 작가의 설정이라는 건 엄청나게 중요한 거니까. 내가 시한부를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캐릭터에게 정해진 운명이니까.
‘그렇지만 설정값은 가끔 바뀌기도 하잖아.’
자식을 후계자로만 생각했던 아빠가 나를 자식으로서 좋아하는 것처럼. 악녀로 설정되어 온갖 패악질을 했을 이사벨 자신이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이사벨은 유리가 만들어진 청귤 에이드를 홀짝홀짝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왜 절 위해서 그렇게까지 했어요?”
“……무엇을 말입니까?”
“미로텔 마법 연방을 배신했잖아요. 마력도 모두 사라졌고요.”
“황녀님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카린도 청귤 에이드를 한 모금 마셨다.
이사벨은 분명히 봤다.
‘카린의 눈이 커졌어!’
그럼, 그럼.
저 에이드는 유리 언니가 손수 담근 수제 청귤청으로 만든 에이드라고!
괜스레 이사벨의 마음속에 자부심이 피어올랐다.
“그럼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한 건데요?”
“진실을 위해서입니다.”
카린은 또 청귤 에이드를 마셨다.
한 모금, 두 모금 먹다 보니 잔이 비어 있었다.
“…….”
“…….”
이사벨과 카린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이사벨은 카린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카린은 이사벨의 시선을 은근슬쩍 피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에요?”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한참 동안 침묵을 유지했던 카린은 결국 입을 열었다.
“청귤 에이드가 너무 맛있어서 그랬습니다.”
“네?”
의미 없는 말이었다.
그냥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둘러댄 말. 진심을 내보이기 전에 얼떨결에 내뱉은 핑계 같은 말.
“어쩌면 황녀님을 위한 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한 것 같기도 한 것 같긴 합니다.”
“저를 위한 것이 맞다는 얘기죠?”
“그런 것 같기도 한 것 같기도 한 것 같다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는 중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하는 중인 것 같습니다.”
카린의 귓불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이사벨이 손뼉을 한 번 치자, 방문이 열리고 유모 루루카가 청귤 에이드 두 잔을 더 가지고 들어왔다.
루루카는 쟁반 위에 놓인 청귤 에이드를 테이블 위에 놓아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많이 드시면 배탈 나요, 황녀님.”
“알겠어. 이것까지만 마실게!”
카린은 리필된 청귤 에이드를 집어 들고 홀짝홀짝 마셨다.
상큼달콤한 탄산수가 몸 안을 가득 적셔주는 기분이었다.
이사벨이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셨어요?”
마력 회로가 폐쇄되고 마력을 잃었다.
마법사가 마력을 잃는다는 건, 멀쩡한 사람이 팔다리를 잃는 것과 비슷했다.
이사벨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저는 이해가 안 돼요.”
카린은 최종 흑막이다.
최종 흑막에게 아무리 꿍꿍이가 있다고 해도, 마력을 잃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최종 흑막 노릇도 마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
지금 상태라면 김벌꿀과 싸워도 질 것이다.
“선생님은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잖아요. 더 많이 가질 거고.”
이사벨은 카린의 속셈을 알아야 했다.
감정적으로 카린이 불쌍하고 애처롭고 고마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했으니까.
카린은 분명 각성한 최종 흑막이고 그 최종 흑막의 속셈을 알아차리기 위해 상콤한 청귤 에이드 두 잔이라는 비술까지 사용했다.
‘단서라도 알아내야 해.’
최종 흑막 카린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래야 빌로티안 황가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선생님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해요. 비밀로 할게요. 저한테만 말해주세요.”
나는 무해하다-
나는 무해한 생물이다-
마치 저기 있는 쪼꼬만 인형 같다-
이사벨은 마치 최면을 걸듯 방긋방긋 웃으면서 카린을 떠보았다.
카린은 또 한동안 그 미소를 마주 보았다.
“그것은…….”
카린은 손에 들린 청귤 에이드 잔을 만져보았다. 잔은 여전히 기분 좋을 정도로 차가웠고, 입 안에 맴도는 청귤청의 향은 달콤쌉싸름했다.
괜스레 마음이 몽글몽글해져서 오늘은 솔직해져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약간은 최면에 걸린 것 같기도 했다.
‘그냥, 나는 청귤 에이드에 취했을 뿐이다.’
청귤 에이드가 너무 달아서.
청귤 에이드가 너무 맛있어서.
청귤 에이드에 너무 취해서.
그래서 오늘은 솔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제게도 봄이 왔기 때문입니다.”
“네?”
청귤 에이드가 너무 달콤해서.
청귤 에이드가 너무 청량해서.
이건 그냥 청귤 에이드 탓이었다.
그런 청귤 에이드를 함께 즐기는 눈앞의 이 아이가 너무 소중해서.
일생에 단 한 번 찾아온 봄을 하릴없이 놓치고 싶지 않아서.
이사벨은 고개를 갸웃했다.
“……지금 11월인데요?”
더군다나 오늘은 찬 대륙고기압의 영향을 크게 받아 온도가 평년보다 훨씬 낮은 날인데…… 그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