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1
@1. 머리 미는 후작 영애에 빙의했다
“시샤 아르비나, 그대가 고대 언어를 해석할 수 있단 말인가?”
황좌에 턱을 괴고 앉은 황제 칼린느 키르테미스는 가히 혼을 잃을 만큼 눈부셨다. 찬란하게 흘러내린 은발에 살짝 낮은 톤의 목소리까지.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그녀의 머릿결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1시간은 족히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가리키는 ‘시샤 아르비나’가 나만 아니었어도.
“그렇습니다.”
나는 눈을 내리깐 채 최대한 짧고도 정중하게 대답했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했지만, 사실 속은 말이 아니었다.
칼린느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소설 속, 패왕이라는 표현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칼린느가 보좌관에게 눈짓하자 그가 장갑을 낀 손으로 옆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는 섬세하고도 조심스러운 손길로 중간을 펼쳐 들더니, 내게 그것을 건넸다.
거기에는 칼린느가 말한 ‘고대 언어’가 적혀 있었다.
“읽어 보라.”
나는 작게 심호흡하고 적힌 그대로를 읽었다.
마인드 컨트롤, 마인드 컨트롤. 저 사람은 황제가 아니라 친한 동네 언니다.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파나의 에메랄드는 소지자의 열을 낮추는 효과를 낸다. 그 크기 또는….」
낭독을 듣는 칼린느의 눈빛은 흥미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말을 끝낸 내가 책에서 고개를 들자 말했다.
“상당히 특이한 발음이군. 무슨 뜻이지? 키론어로 번역해 보아라.”
“파나의 에메랄드는 소지자의 열을 낮추는 효과를 낸다. 그 크기 또는 밀도에 따라 지속 시간은 달라지나….”
내 입에서 나오는 낯선 언어에 나는 다시 한번 빙의를 실감했다.
뇌를 거치지 않고도 술술 번역되어 나왔다. 입력과 동시에 출력이 이뤄지는 느낌. 마치 알파고가 된 기분이다.
“직접 듣고도 놀랍군. 코레아리아의 언어를 그대가 알고 있다니.”
칼린느가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코레아리아는 5천 년도 더 전에 멸망한 고대 제국이기 때문이다. 당시 전 대륙을 지배할 만큼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었으나, 어찌어찌해서 멸망해 버렸다나 뭐라나.
그런데 전설로만 전해져 오던 마법 제국의 도서관을 바로 엊그제 발견한 것이다.
그곳에는 수많은 고서가 어떠한 공기도 통하지 않게 보관되어 있었다. 분명 그 책들에는 다양한 마법 도구 제조법과, 마력의 운용 방법 등이 적혀 있을 터였다.
문제는 책들이 다 5천 년 전 코레아리아어로 쓰여 있다는 것이었다. 황실 수석 언어학자도 해석할 수 없는 언어였다.
그런 언어를 이제 갓 21살이 된 후작 영애가 알고 있었으니, 놀랍지 않은 게 더 이상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나는 그 언어를 알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고대 제국의 언어가 한국어였을 줄 어떻게 알았겠냐고!’
그래도 이 원작 파괴의 위기를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 마른침을 삼키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내 위로, 칼린느의 선포가 파도처럼 덮쳤다.
“앞으로 코레아리아의 고서 해독 작업은 모두 시샤 아르비나가 총괄한다.”
“예?”
“그대는 이제부터 황실로 출근하도록 해.”
칼린느는 만족스럽다는 듯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망했다.’
대체 왜 전생에도 못 했던 취업을 여기서 해 버린 걸까.
나는 지난 1달간의 기억을 되짚어 볼 수밖에 없었다.
* * *
내가 죽은 그 밤은 유난히 별이 밝았다. 그러니까, 벼락에 맞아 죽을 날씨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나는 국문과를 갓 졸업한 취준생이었다.
한참 자소서를 쓰다가 집에 가는 길. 횡단보도 앞에서 웹소설을 정주행하고 있는데 별안간 하늘에서 빛이 번쩍했다.
픽. 그대로 나는 종이처럼 쓰러졌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눈물을 흘릴 틈도, 유언을 남길 새도 없었다. 주변의 웅성거림이 점점 멀어지더니, 이윽고 퓨즈가 나간 듯 정적이 흘렀다.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물 속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듯했다.
그렇게 어둠 속을 얼마나 유영했을까.
숨이 막힐 듯 아찔한 열기가 나를 심연으로부터 끌어 올렸고.
“허억…!”
나는 벼락처럼 눈을 떴다.
그 순간 모든 걸 집어삼킬 듯한 화려한 불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
허리춤에서부터 무섭게 올라오는 붉은 화마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코끝을 찌르는 지독한 탄내와 기분 나쁘게 지직대는 소리는 덤.
혼란스러운 상황에도 이것만은 분명했다.
불이 붙었다.
그것도 나한테.
‘뭐, 뭐야? 빨리 꺼야 돼!’
하지만 너무 놀라 경직된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녹슨 철근처럼 무겁게 삐걱대는 목덜미에 극심한 뻐근함이 느껴졌다.
손이 차갑게 식는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나는 가위에 눌린 듯 굳어 버린 목을 쥐어짜 토하듯 비명을 뱉었다.
“도와주…!”
처억.
불현듯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살짝 까슬한 질감이 볼에 와 닿았다.
내 위로 두껍고 커다란 천이 덮인 것이었다.
탁탁! 누군가가 빠르고 절도 있는 손길로 내 머리와 등을 두드렸다.
심장 박동보다 조금 느린 그 템포는 사람을 묘하게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불이 꺼졌어….’
어둠 속에서 더 이상 불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자 거칠던 숨이 잦아들었다. 휘달리던 심장이 진정되어 갔다.
그제야 두려움이 의문으로 바뀌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야?
벼락에 죽은 게 아니라 불이 붙은 건가?
날 구해 준 건 누구지?
그때였다.
천이 스르륵 내려가 발치에 떨어졌다. 각이 잡힌 군청색 소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손이 위로 올라오더니, 내 턱을 부드럽게 잡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헙….”
분명 입을 꾹 닫고 있었으나, 미처 막지 못한 탄성이 슬쩍 입가로 흘러나왔다. 단전에서 올라와 농축된 감탄이었던 탓이다.
‘이승의 존재가 아닌 게 분명하다.’
밤하늘 같은 흑발을 가진 남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이 저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도 되는 걸까.
겨울나무처럼 하얀 피부.
립스틱을 바른 것 같지도 않은데 붉은 생기가 가득한 입술.
나른하게 깔린 눈꺼풀과 대비되는 살짝 올라간 눈꼬리.
그 모든 것이 합쳐져 묘한 매력을 자아냈다.
‘눈동자에는 누가 자수정 광산을 통째로 박아 놨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에 익숙한 듯 건조하게 식어 있었으나, 그럼에도 그 빛깔은 어슴푸레한 새벽처럼 짙고 아름다웠다.
다만.
그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시선 속에 미처 가리지 못한 멸시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다.
“공작저를 불태울 생각이십니까?”
차게 내려앉은 목소리가 울렸다. 조용한 말투였으나 명백히 가시가 박혀 있었다.
내가 불을 낸 게 아니에요.
그렇게 반박하려던 순간, 무시할 수 없는 위화감이 나를 덮쳤다.
‘생전 처음 듣는 언어인데, 나는 어떻게 알아들은 거지?’
그리고 그보다 더 혼란스러운 건.
〈내가 마법사라는 걸 보여 주면 공자님도 솔직히 말할 건가요?〉
낯선 기억이 천천히 스며들어 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손을 튕겨 불을 만들어 내는 장면까지도.
모든 게 뒤죽박죽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말도 안 돼… 진짜로?”
나는 지금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
그리고 이건 이 몸의 주인이 가진 기억이다.
“당신….”
나도 모르게 질문했다.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 채.
“마법사 맞죠?”
“…아니라고 말씀드렸을 텐데.”
그의 시선에 스친 형형한 빛에 몸을 움찔했다.
숨 막히는 정적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온몸을 옥죄는 듯한 비뚜름한 시선에 나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남자는 내 턱을 쓸듯이 놓으며 뒤로 몇 발짝 물러섰다. 손이 닿았던 자리에 짧은 여운이 머물렀다.
그는 몸을 돌려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발걸음이 멈춘 곳은 어느 서랍장 앞이었다.
드르륵. 서랍이 열리고, 은색 가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얇은 가위는 햇살과 부딪쳐 날카로운 빛을 번뜩였다.
“가위는 왜….”
남자가 살짝 내리깐 시선으로 가위를 이리저리 돌리며 살피더니 내게로 천천히 걸어왔다.
‘위험해…!’
나는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페이퍼 나이프를 낚아챘다.
남자에게로 나이프를 확 치켜들자, 그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위협을 한 건 그쪽인데.”
그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가위의 날이 제 쪽으로 향하게 고쳐 잡았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내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당신 머리.”
“머리…?”
“곤란한 건 빨리 치워 버리는 게 낫겠죠.”
질문인지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남자가 내 손을 감쌌다. 눈을 맞춘 채, 안심하라는 듯이.
내 손에 있던 나이프를 빼내 테이블 위에 얹은 남자는 내 어깨 너머로 양손을 뻗었다.
곧이어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에 와 닿았다.
흠칫.
간지러운 느낌에 살짝 몸을 떨었다. 하지만 몸이 마비된 듯 그 손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지금 뭐 하는….”
“수습.”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대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낯설면서도 익숙한 ASMR이 들렸다.
싹둑.
후두둑.
“…….”
아래로 시선을 옮기자 펼쳐진 것은, 무수한 머리카락이 흩날리듯 떨어지는 광경이었다.
아름다운 라벤더 빛과 거무튀튀한 재가 꼬불꼬불 뒤엉키며 바스러진다.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내 머리카락이 다 타 버렸구나.’
남자는 마른나무의 죽은 이파리를 떼어 내듯 주저 없이 잡은 머리를 모두 잘라 냈다.
그리고 충격을 받은 내 표정을 힐끗 보더니, 손수건으로 가위를 닦아 내며 무감하게 말을 뱉었다.
“전부 재입니다. 귀가하시는 걸음마다 검은 흔적을 남기셨다간 피차 곤란해졌겠죠.”
그래도 정녕 이게 최선이었단 말인가?
나는 멍하니 그가 손에 든 가위를 바라보았다.
가위에 묻은 머리카락이 한 올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어떤 대화가 뒤통수를 친 것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르비나 후작 영애도 이아페 카일라인 공자에게 고백했다 까였었다죠?”
“충격이 커서 즉시 그 아름다운 보랏빛 머리를 밀고 산에 들어갔다면서요.”
“그리고 죽었… 다시는 못 돌아왔잖아요… 크흠.”
“불쌍한 아르비나 후작님! 젖먹이일 때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딸인데 말이에요.”
“어머머, 안타까워라! 공자님이 죄가 많네요!”
실제 사람들의 대화가 아니었다. 귀족들이 가십거리를 이야기하는 장면이었다.
소설, ‘황제는 그 꽃을 꺾지 않는다’에서.
소설 초반부, 서브 남주 이아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이용된 과하다 싶을 수준의 막장 일화였다.
저 ‘아르비나 후작 영애’는 저게 처음이자 마지막 등장이었다. 아니, 사실 등장한 적도 없다. 대화 속에서 언급만 되었을 뿐.
그럼에도 내가 이 부분을 기억하는 이유는, 머리를 민 후작 영애라는 것이 뇌리에 박힐 만큼 어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나는 앞에 선 남자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아페…?”
그가 무슨 헛소리냐고, 이아페가 누구냐고 하길 간절히 바랐다.
‘소설 속에 빙의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데, 심지어 서브 남주한테 까인 충격에 머리 밀고 산에 들어갔다가 죽는 역할일 리 없어!’
다행히도 남자는 대답 없이 날 직시할 뿐이었다. 아마 본인이 아니라 그런 거겠지. 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휴, 제가 착각….”
“선을 넘지 말아요.”
소름이 돋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그 다정함에 취해서 그가 하는 말의 뜻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숙여 왔다. 깊이 가라앉은 시선과 마주한 내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어느새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그를 밀어 내기 위한 손이 단단한 어깨에 가 닿는 찰나.
얼굴의 방향을 돌린 그는 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닐 텐데, 아르비나 영애.”
온몸이 울리는 듯한 낮은 음성이었다. 얼음처럼 싸늘한 말투에 몸 전체에 솜털이 쭈뼛 섰다.
남자는 내게서 몸을 떼어 냈다.
가슴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이건 공작저를 찾아 주신 답례.”
언제 그랬냐는 듯 그가 입꼬리를 살짝 늘이며 내 손에 가위를 쥐여 주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 들었고.
“조심히 귀가하십시오.”
미련 없이 돌아선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빠져나갔다.
쾅!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한 후에야,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교도 전파되지 않은 세계관에서 머리 밀고 산에는 왜 들어가나 했는데….
서브 남주가 직접 밀어 준다고는 안 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