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117
@117. 약점(2)
“연락을 하고 오지. 준비한 게 없는데….”
이아페가 상기된 표정으로 일로제를 티 테이블로 안내했다. 일로제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미묘한 불안이 묻어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마침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급한 일?”
이아페가 의문으로 눈썹을 끌어 올렸다.
다과를 놓은 사용인들이 모두 나가자, 일로제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누군가 나를 찾아왔어. 어머니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여자였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이아페가 손을 멈칫했다. 그리고 가만히 일로제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런 생각들이 들더군.”
“…무슨 생각?”
일로제가 말을 하기 전 잠시 망설였다. 그가 맞은 편의 이아페를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이아페를 죽여야 한다, 그럼 더 이상 괴롭지 않을 것이다.”
이아페가 숨을 훅, 하고 들이쉰 채 멈추었다.
그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가 초조한 표정으로 일로제에게 몸을 기울여 손을 뻗었다.
그날, 남부에서 서로의 생각을 나눴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형의 마음이 풀리지 않은 걸까.
“형, 그건….”
이아페의 어두운 표정을 바라보며, 일로제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알아. 다 말도 안 되는 극단적인 생각이지. 그런 생각을 품은 내가 싫어질 정도로.”
일로제의 미소가 쓰게 변했다. 그의 눈썹이 죄책감으로 기울어졌다.
“…….”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런 말들이 머릿속에 가득 찼어. 순간적으로 울분까지 차오르더군. 마치… 누군가 그런 생각이 들도록 나를 억지로 쥐어짠 것처럼.”
일로제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먹을 꽈악 쥐었다.
“억지로…? 그럼 지금은….”
“안 해, 그런 생각. 그 극단적인 지시들 사이에서, 문득 시샤 단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거든.”
일로제가 주먹을 펴고 고개를 들었다.
지난여름, 남부 일로제의 집에서 그들이 함께했던 때. 시샤는 마차를 타기 직전 달려와 일로제에게 말했다.
〈어두침침하고 수상해 보이는 사람들이 일로제 경을 꾀어내도 절대 넘어가지 마요! 그런 사람들 말 듣지 않아도 앞으로 더 평화롭고, 돈독하고,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간이 펼쳐질 거니까.〉
“그 말이 떠오른 순간 정신이 확 든 것 같았어. 머릿속 목소리가 흐려졌고, 그제야 깨달았지. 내가 뭔가에 홀린 듯 몽롱해져 있다는 걸.”
“조종을… 당했다는 거야?”
“그런 것 같아. 뭐, 금방 떨쳐 버렸지만.”
일로제가 걱정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나 이아페에게는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해도, 솔직히 말하자면 위험했다.
‘아마도… 이아페와 화해하지 않았더라면, 그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행동했겠지.’
그랬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본능적으로 깨달았어. 이것이 시샤 단장이 염려한 상황이라는 걸. 그래서 나는 그들의 의도대로 된 척, 너를 내 손으로 해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여인이 기뻐하며 보여 주더군. 자신의 로브를.”
“설마….”
일로제의 이야기를 듣던 이아페가 미간을 찌푸렸다.
로브를 입은 이들에게 조종을 당했다. 처음 들은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로브의 색을 기억해?”
“그래. 검은색이었다.”
“……!”
역시. 시샤 또한 의도와 다른 주문을 썼다. 그녀는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에게 납치당한 후, 조종을 당한 것 같다고 했고.
“형은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이아페가 황급히 일로제의 얼굴과 몸을 살폈다. 난데없는 동생의 접촉에 일로제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애초에 대화했다는 얘기를 듣고 왜 육체가 다쳤냐고 묻는단 말인가. 말로 맞은 것도 아닌데.
시샤가 검은 로브에게 납치되었던 것을 모르는 일로제로서는 너무나도 당황스러운 손길이었다.
“괜, 괜찮아.”
“다행이다….”
“…….”
둘 사이에 어색한 정적이 맴돌았다. 이아페가 정적을 깨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검은 로브를 쓴 이들. 그들에게 시샤 님이 납치당한 적이 있어.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을 쓰는 자들이었어. 시샤 님의 추측으로는… 흑마법인 것 같다고 하셨지.”
이아페는 그가 아는 정보를 일로제에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일로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이아페가 일로제에게 물었다.
“뭔가 아는 게 있는 거야?”
일로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신중한 눈빛으로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들이 쓴 힘은 신성력이야.”
“뭐라고?”
일로제를 향한 이아페의 시선이 흔들렸다. 일로제가 말을 이었다.
“그 여인이 돌아간 직후, 나는 마법사와 신성능력자를 불러 내게 남은 잔재가 있는지를 확인했어.”
“그 결과가….”
“그래. 분명히 신성력이었어. 그것도 꽤나 강한 힘이었다더군.”
이아페의 얼굴이 혼란과 의문으로 물들었다.
신성력이라니, 그럴 리 없다.
시샤가 납치되었던 날, 분명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 자리에 신성력의 잔재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시샤에게서도 신성력을 사용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고….
“설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던 가능성이 다시 치고 올라왔다.
‘르디엘 체르실로프.’
안일하게도… 그날 신성력의 사용 여부를 판단한 것은 르디엘 단 한 명뿐이었다.
시샤가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젖어, 수많은 가능성을 검증하지 못했다.
…르디엘이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을 포함해서.
“나도 이해가 안 가. 신전에서 왜 그런 짓을….”
일로제가 말끝을 흐렸다.
이아페는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짚었다.
검은 로브를 입은 이들. 그들이 신성력을 쓴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서도 강하게 주장하지 않은 것은, 은연중에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그런 일에 쓰일 힘이 아니라는 걸.
미엘교는 이 대륙의 유일한 종교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권력에 결부되기도, 사사로운 목적에 이용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들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신의 힘은… 근본적으로는 선하리라는 믿음. 악행에 이용되는 일은 없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의심해서는 안 되는,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처럼 당연한 이치와도 같았다.
그러나 지금, 믿음이 부서지고 있었다.
* * *
위드는 일찍이 정화 신전에 도착해 제단을 살폈다.
예정된 세뇌 의식은 모두 끝났다. 이제는 시샤에게 세뇌가 완벽히 이뤄졌는지 확인하는 것만이 남아 있었다.
“저… 위드 님!”
그때 들려오는 다급한 소리에 위드는 뒤를 돌았다. 엘딕과 미르셀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엘딕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위드에게 보고했다.
“일로제 카일라인이… 사라졌어요. 분명 오늘 함께 이아페 카일라인을 죽이러 가겠다고 했는데… 남부에 갔더니 며칠 전에 떠났다고 했어요.”
위드가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을 기울였다.
“세뇌에 성공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네 신성력을 추적하면 될 텐데. 세뇌가 잘되었다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융화되어 추적이 쉬울 거야.”
“그게… 그런 줄 알고 며칠을 기다렸는데요…. 세뇌가 풀렸나 봐요.”
“뭐?”
엘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위드가 성난 목소리를 내었다.
“없던 증오를 만들어 내라 한 것도 아니고, 증폭하기만 하는 것만큼 쉬운 게 없거늘. 그걸 실패해?”
“분명 성공했었거든요. 그런데 생각보다 정신력이 강했….”
“언젠가 일을 칠 줄 알았지!”
화가 나서 엘딕에게 다가서는 위드를 미르셀이 막았다. 그가 엘딕을 변호하듯 말했다.
“저희가 파악하지 못한 새에 동생과 화해를 한 것이 아닐까요? 그랬다면 엘딕의 힘만으로는 세뇌가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위드가 한숨을 후, 하고 내쉬었다. 감정을 누르며 천천히 감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우선 엘딕, 너는 자숙해.”
“네….”
“그리고… 아무래도 그 형제를 모두 죽여야겠어.”
“뭐가 문제인가?”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사제들이 뒤를 돌았다. 드하이센이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한 표정을 보니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간단히 자초지종을 설명한 위드가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저희가 직접 나서서 해결을….”
“그럴 필요가 뭐가 있겠나.”
드하이센이 눈을 빛냈다. 그가 좋은 해답을 갖고 있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오늘은… 귀하신 분이 완벽히 우리의 사람이 되었는지 확인하는 날이지.”
“그렇습니다만… 아.”
위드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드하이센을 바라봤다.
여기서 그녀를 언급한다는 것은 분명….
“귀하신 분을 이용해 그들을 처리하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일거양득 아니겠는가?”
드하이센이 눈을 휘어 웃었다. 위드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미르셀이 걱정이 된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러다가 이아페 카일라인이 귀하신 분을 죽이진 않을까 염려됩니다.”
“…아니,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고민을 끝낸 위드가 대답했다. 미르셀이 의문을 담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몇 번의 의식 때마다, 신성력이 잘 침투하였는지 확인하기 위해 귀하신 분의 기억을 잠시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모든 기억을 훑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강렬하게 자리한 기억들은 엿볼 수 있었다.
“그들은 연인 관계 같았어. 분명… 이아페 카일라인은 절대로 귀하신 분을 해치지 못할 거야.”
그녀가 자신을 공격하더라도.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할지라도.
시샤의 기억에서 엿본 이아페의 행동은,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도 아깝지 않다는 듯하였으니.
“그래. 그리고 이아페 카일라인의 마력이 얼마나 크든 관계없이, 귀하신 분의 힘이 월등하겠지.”
드하이센이 더 논의할 필요가 없다는 듯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조금 후, 그곳에 시샤 아르비나가 모습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