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23
@23. 성기사, 르디엘 체르실로프
“내 인맥은 더 이상 신경 쓰지 말아 줘. 너도 알잖아, 노임포턴스 가문 사람들이 얼마나 재미없는지.”
생각만 해도 질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자, 잠깐 생각에 잠겼던 비알로가 동의를 표시했다.
“…그렇긴 하지.”
도움이 안 되는 가문을 일부러 시샤에게 붙여 줬는데, 재미까지 없어서 시샤가 다른 길로 새려고 하니 그도 고민이 많았을 터다.
“나한테 도움 되라고 소개해 준 거 나도 알아. 하지만 비알로, 나는 도움 되는 사람 말고 마음 맞는 사람들이랑 놀러 다니고 싶어. 지금까지 못 누렸던 귀족 문화를 즐기고 싶단 말이야.”
사실은 최대로 도움 되는 사람에게 붙어 있을 심산이었지만, 비알로가 듣고 싶을 졸부 마인드의 대사를 해 주었다.
“뭐, 그동안 그렇게 살아왔으니… 이렇게 사는 걸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이해해.”
비알로는 금세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는 우월감 가득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얘기 끝난 거겠지? 나는 방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마, 시샤. 너는 어차피… 됐어. 네가 알 턱이 없지.”
비알로가 본인에게 해야 할 말을 내게 던지고는 돌아섰다. 평소의 타이르는 말투와 조금 다르게 미묘한 울분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왜 저래.”
내 알 바인가.
딱히 부모님께 잘 보이려고 애쓰진 않겠지만, 잘난 사실은 이야기하는 것이 좋겠지.
조금의 휴식을 취한 후, 나는 어머니의 방으로 올라갔다.
“별일이구나. 네가 내 방에 다 오고.”
소파에 문을 등지고 앉아 술을 마시던 어머니가 뒤를 돌아보며 우아하게 손짓했다.
나는 조심히 옆의 소파에 가 앉았다.
“저택을 비우신 동안 몸이 안 좋았었는데요. 그러고 나니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 비알로에게 들었다. 가벼운 몸살이 있었다더군. 지금은 괜찮은 거지?”
가벼운 몸살? 그렇게 말해 놨단 말야?
죽다 살아나서 거의, 아니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지만 지금 그렇게 말해 봤자 엄살이 심하다고만 생각하겠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이젠마어는 배울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요, 어머니.”
“그래. 아직 적응하느라 힘들겠지. 사교계에 데뷔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내가 신경을 많이 못 썼군.”
“그게 아니라요, 어머니.”
“그래.”
“저 사실 황제 폐하의 시녀가 되었어요.”
“뭐?”
어머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척 놀란 듯했지만, 코웃음을 치거나 내 말을 농담처럼 넘겨 버리진 않았다.
내 표정을 살피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구나. 그 자리를 네 손으로 직접 꿰차다니.”
실제로 고용된 역할은 코레아리아어 연구단장이지만. 내 손으로 꿰찬 건 맞으니까 맞는 말이라고 치자.
아직은 비밀을 유지해야 했다. 마법을 쓴다는 것도, 코레아리아어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도.
하지만 공표가 있기 전까지도 황실로 출근은 해야 했으니, ‘황제의 시녀’로 위장 취업을 하기로 한 것이다.
“폐하는 너를 어떻게 아시고 시녀로 삼은 것이냐.”
“두어 달 전 황실 연회가 있었잖아요. 그때 뵈었는데 제가 마음에 드셨나 봐요.”
“그 자리에서 폐하와 대화하는 걸 보지는 못했던 것 같은데.”
“짧은 대화였거든요. 다소 따분해 보이시기에 잠깐 말동무가 되어 드렸는데, 제겐 과분한 판단을 내리신 거겠죠.”
뭐, 틀린 말은 아니다.
시샤는 그날 칼린느에게 “무기를 찾으신다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스치듯 말했을 뿐이다. 그 후에는 칼린느에게 다가가지도 못했다.
칼린느가 그 말에 흥미를 느끼고 시샤를 부르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출근은 언제부터 하느냐.”
“3일 후예요.”
“곧이군. 축하의 자리를 만드는 게 좋겠구나.”
“저, 어머니. 당분간은 오빠에겐 말하지 말아 주세요.”
“왜지?”
“제가 직접 말하고 싶거든요. 저를 많이 걱정하니 조금 안정되면 자신 있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 내가 황제의 시녀가 되었다는 걸 알면 괜히 또 비알로의 경계심을 폭발시킬 수도 있다.
마법이 공표되면 그때 말을 해야지.
“그래, 네가 그렇다면.”
다행히도 어머니는 ‘자기의 일은 알아서, 스스로 하자!’가 좌우명인 사람인 만큼 더는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암튼… 어머니께는 먼저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피곤하실 텐데 얼른 쉬세요.”
“그래.”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장된 몸이 미션을 클리어했다는 안도감으로 조금 풀어졌다.
문으로 걸어가며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도 담백했던 어머니의 답에, 혹시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한 번 더 살갑게 웃을 요량으로.
하지만 소파에 기댄 뒷모습만이 보였다.
역시 내게 그렇게 관심이 있진 않은 건가.
그러나 문을 닫기 직전.
“오랜만에 보니 좋구나, 시샤.”
“…네. 저도요.”
닫힌 문 앞. 시샤의 것인지 내 것인지 모를 고요한 행복감이 나를 감쌌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드디어 대망의 첫 출근을 앞둔 마지막 휴일이었다.
그동안 여기저기를 쏘다니며 맛집과 명소를 탐방했지만, 오늘은 집에서 정원을 산책하며 여유를 즐기기로 했다.
맑은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조금씩 널려 있었다. 보이는 면적에서 하늘과 구름의 비율이 7:3. 딱 내가 좋아하는 정도다.
나는 기분 좋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었다. 이번에 돌아다니며 본 음악극, ‘악마의 기억’의 노래였다.
파란만장한 내용은 물론이고 섬세한 감정선, 주옥같은 노래까지 보물 같은 극이라 여러 번 보러 갔었다.
하지만 인기가 없는 극이라 금방 막을 내려 버렸다. 얘기해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극이었지.
노래를 허밍하며 걷다 보니 다시 극의 감동이 느껴졌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가 있으면 이어폰을 끼고 1곡만 반복 재생해 듣곤 했는데.
지금은 그럴 수 없으니 내가 나를 위한 마이크이자 스피커가 되어 주기로 했다.
흥얼거림으로 시작한 노래는 점차 커져서 열창이 되었다.
이 시간의 정원에는 항상 아무도 없으니 괜찮겠지? 자연 노래방이다, 후후.
그리고 이제 대망의 클라이맥스 구간이다.
“영원을 약속할 순 없지만…!”
“영원을 약속할 순 없지마아안!”
……?
누가 방금 화음 넣었어.
“지금은 우리, 함께하기로 해요오….”
당황해서 노래를 멈춘 나와는 달리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음 소절까지 불렀다.
나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누구야. 누가 노랫소리를 내었어.
그때, 노래가 들렸던 방향의 나무 뒤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하하, 죄송해요. 듀엣곡이라 저도 모르게 따라 불렀네요.”
연한 금발을 가진 남자. 흰색 제복과 푸른색 케이프, 그리고 옷을 장식하고 있는 금색 견장과 장식들.
옷차림을 보니, 아무래도 성기사단에 속한 기사인 것 같았다.
그를 빤히 바라보자, 그는 예의를 갖춰 몸을 숙여 인사했다.
“키론 제국 성기사단의 명예로운 기사, 르디엘 체르실로프라고 합니다.”
키론 제국 내에는 몇 개의 기사단이 있는데, 기사단끼리는 서로 정기적으로 인력 파견을 주고받곤 했다.
이번에 아르비나 기사단에는 성기사단에서 1명이 온다고 들었는데 그게 저 사람인 모양이다.
그런데.
“기사 훈련소와 연무장은 정원과 반대편에 있는데요. 왜 여기에 있죠?”
“오늘 처음 왔는데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길을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이런 전개 소설에서 많이 봤어. 이렇게 스스럼없이 길을 안내해 달라는 걸 보면 나를 사용인으로 착각하고 말을 걸었다는 전개가….
“시샤 아르비나 아가씨.”
르디엘이 싱그럽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다.
뭐지, 이 화사함은. 그에게만 꽃잎이 흩날리는 필터가 장착되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내가 시샤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우리… 어디서 본 적이 있나요?”
나는 로맨스의 고전 같은 대사를 날려 보았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우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사아… 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옅게 들렸다.
어쩐지 지금, 정말로 로맨스 소설의 한 장면 같은데.
“아뇨, 없는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명랑한 목소리로 단칼에 선을 그었다.
르디엘이 내 앞으로 걸어와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고 농담조로 말했다.
“아가씨와 제가 만난 적이 있다면, 그건 아마 전생이 아니었을까요?”
오… 엮이지 말자.
나는 그에게 눈으로만 싱긋 웃어 주고는 돌아서서 걸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그렇게 정색하실 필요까지는 없잖아요!”
르디엘이 크게 웃으며 내 옆으로 따라왔다. 그를 쳐다보지 않고 더 빨리 걸었지만, 그가 내 보폭에 맞춰 따라왔다.
“그나저나 아가씨도 그 음악극을 보셨다니 깜짝 놀랐네요.”
나도 정말 깜짝 놀랐어. 그 극 봤다는 사람을 만난 건 나 빼고 네가 처음이거든.
그런데 그 극 제목이….
“…당신은 미엘 신의 힘을 받은 성기사가 아닌가요?”
“맞는데요.”
“그 극은 제목이… 악마의….”
“어흠어흠!”
“악마의 기억….”
“아가씨! 제목은 표면일 뿐이랍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죠.”
내가 평소에 생각했던 성기사의 이미지는 고고하고 올곧고 신실한 느낌이었는데.
이 사람 뭐 낙하산 이런 거 아니야? 애초에 성기사는 맞나?
나는 이 산들바람 같지만 어딘가 믿을 수 없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을 핵심을 뚫는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본 결과.
고놈 참 잘생… 아니, 이게 아니라.
능글맞게 웃는 르디엘은 어딘가 수상했지만, 그 마이너한 극을 본 사람을 만나니 반가운 게 사실이었다.
결국 나도 모르게 떠보듯 물어보고 말았다.
“그 음악극, 어땠어요?”
“예술이었죠! 특히 샬롯과 칼록스가 죽음의 다리 위에서 만나는 장면은 정말…!”
“오오오! 맞아맞아맞아!”
나도 모르게 너무 신이 나서 르디엘의 팔을 찰싹찰싹 때려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