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was reincarnated, and the ancient language was Korean RAW novel - Chapter 26
@26. 혼자 밥을 못 먹습니다
“처리할 게 조금 남아서요. 뭐 놔두고 갔어요?”
“아직 당신이… 아뇨. 일이 남았습니까?”
이아페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들었다. ‘당신이….’라고 하는 것을.
나는 팔짱을 낀 채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에게 한껏 꼰대 같은 질문을 했다.
“하하, 단장보다 먼저 퇴근하려니 눈치라도 보이는 거예요?”
물론 진심으로 묻는 건 아니었다.
눈치를 보며 사회생활 하는 신입사원 이아페라니. 너무 말이 안 되어서 웃음이 났달까.
“네, 눈치가 보이는군요.”
“그렇죠? 눈치가… 네?”
이아페가 발걸음을 옮겨 곧장 내 자리로 왔다.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는 순식간에 의자를 끌고 와 내 옆에 앉았다.
“당신은 단장이고, 나는 일개 단원이니까요.”
그의 시선이 나와 마주쳤고, 알겠냐는 듯 눈썹을 까딱했다.
‘이아페가 이 정도로 사회생활을 한다고?’
그렇게 날 전전긍긍하게 만들고 밀당하던 인간이 내 눈치를 본다니.
희열이 느껴지면서도 가시방석에 앉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하다가 다급하게 말했다.
“농담이에요! 어서 퇴근해요! 당신의 권리를 지키세요! 다른 사람들도 다 갔잖아요!”
“그러니까.”
“네?”
“전부 다 갔군요. 당신만 두고?”
오히려 내 말이 어딘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대체 어느 포인트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건지 알 수 없었다.
이아페는 내 책상 위에 펼쳐진 고서들을 힐끗 보더니 하나를 집어 들었다.
“함께하도록 하죠.”
“이건 제 일인데요?”
“연구단은 같이 일하라고 만든 거니까요.”
음,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에게 야근까지 시키는 것이 맞는 일인가.
“제가 맡은 분량이에요. 그렇게 일하고 싶으면 이아페는 내일부터 분량을 줄 테니 오늘은 가요.”
이아페는 나의 말에 대답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싫습니다.”
다시 제가 들고 있는 고서로 시선을 옮겨 버렸다.
책을 빼앗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너무도 가볍게 피했다. 내가 다시 손을 날리자, 그는 부드럽게 그것을 잡았다.
내 손은 커다란 감옥에 갇힌 듯 꼬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이아페는 그런 내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그 상태로 눈을 들어 올려 내게 말했다.
“돕게 해 주세요.”
웃음기 띤 그의 입가가 어쩐지 잔망스러웠다.
손등에 하는 입맞춤.
분명 이 세계 귀족들에게는 아무런 사심 없이, 예의상 하는 인사일 것이다.
하지만 이 유교걸에게는 굉장히 낯선 문화였다.
이렇게 더 있다가는 얼굴이 빨개질까 봐,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으… 30페이지까지 대충 해서 줘요. 모르는 단어가 있으면 남겨 두고. 그건 제가 번역할게요.”
이아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도 본인이 모르는 단어의 의미를 유추하고 해석하는데 시간을 쓰는 것보다, 그동안 다른 부분을 해석하는 게 낫다는 걸 알고 있을 터였다.
사실 그 정도라도 해 주면 나에겐 훨씬 수월했다.
이 세계에만 있는 고유명사나 전문용어도 많아서, 이아페가 맡아 준다면 훨씬 부드러운 해석이 될 것도 분명했고.
그래, 오늘 내 분량의 10%만이라도 대신해 준다면 땡큐지.
이아페는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작업을 시작했고, 나도 얼른 펜을 움직였다.
사각사각. 조용한 연구실에 기분 좋은 펜촉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그런데….
“이걸 다 끝냈어요?”
생각보다 너무 빨리 끝나 버렸다.
이아페는 무서울 정도의 사기캐였다. 사기캐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매번 깜짝깜짝 놀라게 했다.
1장에 5개 정도의 단어나 문장이 비워져 있긴 했지만, 나머지 부분은 무리 없이 번역해 냈다.
그렇게, 오늘의 분량은 예상보다 2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저녁 시간을 조금 넘겼을까. 내 자리 뒤편에 나 있는 창밖을 보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마부님께는 시간에 맞춰 오라고 말해 놓았는데. 전갈을 넣어야 하나?’
자리에 앉은 채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내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이아페가 아까 놔둔 의자에 다시 앉아 있었다.
“데려다드릴까요?”
귀갓길 카풀을 제안하면서.
그는 책상에 옆으로 팔을 괴고 턱을 받친 채였다. 그의 몸은 온전히 나를 향해 있었다.
가까이에서 연한 우드 향이 느껴졌다.
그 향에 홀려서 즉시 ‘네! 네!’ 하고 외칠 뻔했으나, 나는 어른이기 때문에 대답하기 전에 3초를 더 생각했다.
‘앞으로는 연구단 일 이외에는 그와 최대한 엮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물론 굳이 피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본능이 불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아페는 칼린느를 좋아한다.
하루 빨리 마법으로 칼린느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이렇게 사회생활까지 할 정도로.
그게 명백한 사실임에도, 괜히 저 다정한 말투와 행동에 싱숭생숭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고맙지만 괜찮아요. 저도 타고 갈 마차가 있어서.”
“당신의 마차는 없던데.”
“아직 안 왔지만 곧 올 거예요.”
“같이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이아페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바로 답했다. 생각보다 사회생활을 더 열심히 할 심산인 모양이다.
“괜찮아요.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편이거든요.”
“파티에 참석한 모든 이들을 대통합해 놀이를 하고 계셨던 분이?”
“…그걸 봤어요?”
“못 볼 수가 없었죠.”
도서관을 찾기 전날 열린 가면무도회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팔짱을 끼며 허리를 폈다. 향기가 멀어졌다. 나는 참았던 숨을 티 나지 않게 뱉었다.
“저는 외향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내향적인 성격을 소지하고 있는 사람으로….”
“저와 마차를 타는 게 싫으십니까?”
나지막한 질문을 뱉은 이아페가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역시 너무 피하는 게 티가 났나?
생각해 보면 이아페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호의로 제안한 건데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 이건 서브 남주가 조연에게 베푸는 작은 성의다.
그리고 내게도 이건 아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엑스트라인 내가 서브 남주 기를 죽일 순 없지 않은가!
“그럼 오늘만 부탁드릴게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걸 본 이아페가 먼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몸을 일으키며 스친 그의 표정에 살짝 미소가 어려 있었다. 미션을 클리어해서 후련해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후작저에 마차를 보낼 필요 없다고 연락을 넣은 뒤 밖으로 나섰다.
붉은 하늘 아래, 정문에 세워진 이아페의 마차가 보였다. 이번에도 그 검은 마차가 아닌 평범한 마차였다.
그 때깔 좋은 건 역시 칼린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타고 왔던 모양이다. 칼린느는 알현실에서만 만났으니 마차를 보진 못했겠지만.
“잡고 올라와요.”
이아페가 먼저 마차에 올라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조심히. 나지막이 건넨 말과 함께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겼고, 나는 가볍게 마차 위로 올라왔다.
출발한 마차 안에는 몇 분간 정적이 맴돌았다. 저택까지 가려면 30분도 더 걸리는데 이대로 계속 아무 말 없이 어색하게 갈 수는 없었다.
결국 내가 말을 꺼내려는데, 이아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으십니까?”
원래 안 고팠는데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이미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나 있었다.
이럴 때 안 고파요, 라고 하는 것은 꼬르륵 플래그다. 드라마를 보면 배 안 고파요, 하자마자 꾸르르르르윽 소리가 들리곤 하지.
“시간이 시간이다 보니 고프긴 하네요. 어서 돌아가서 식사해야겠어요.”
“저도 그렇습니다. 원래 식사를 제때 하는 편이라.”
“아, 이아페는 저까지 데려다주고 먹으면 식사 시간이 꽤 늦겠네요.”
“네, 지금도 조금 늦은 시간이니….”
이아페가 말끝을 흐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더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었기 때문에, 그가 생각하는 바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막상 태워 주고 나니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분명해! 그렇다고 내리라고 말하기는 뭣해서 말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출발 전 노을이 지고 있던 하늘은 이제 거의 검게 바뀌어 가고 있었다.
안 그래도 같이 일해 줬는데 밥까지 늦게 먹으라고 하고 싶진 않았다.
이제 에르트르 거리에 다 와 가고 있었다. 여기엔 분명 환승이 가능한 공용마차 정거장이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 해도 어디야.’
잘 생각했어, 시샤. 멋있다, 시샤!
“아, 그럼 저는 이 근처에서 내려 주세요. 여기까지라도 태워다 줘서 고마워요.”
“…….”
이아페의 표정이 굳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뭐가 문제지? 내가 심각하게 그를 바라보며 고개를 살짝 갸웃하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도 모르게 그의 입꼬리로 시선이 향했다.
“그게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려 했던 건….”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다음 말을 꺼냈다.
“곧 에르트르 거리인데, 식사하고 가시겠습니까?”
그의 눈이 예쁘게 휘어졌다.
열어 둔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뺨에 닿은 바람이 살짝 차가워서, 나는 내 뺨이 조금 붉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괜히 차오르는 미묘한 감각에 황급히 거절했다.
“저는 일찍 들어가 봐야 하는데.”
내 대답에 이아페가 “아….” 하고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충격적인 비밀을 털어놨다.
“사실… 전 혼자 밥을 못 먹습니다.”